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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카세트

어머니의 카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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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9.08.28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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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운집(서울아산병원 임상약리학과 R3)

열 살 무렵 학교가 파하고 집에 돌아와 보니, 어머니께서 카세트를 들으시며 눈물짓고 계셨다. 얼마 전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서울에 다녀오신 어머니 손에 처음 보는 카세트가 들려 있었다. 호기심에 카세트를 틀어보니 아무런 음악도 나오지 않았다.

잡담하는 소리와 거친 잡음이 마구 섞여 있었다. 가수 이름이 적혀있지 않은 테이프들 죄다 잡담뿐이었다. 잘 들어보니 외할머니 목소리였다. 그 후 몇 달 뒤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부쩍 몸이 아프시던 외할머니 목 주위로 덩어리가 잡히기 시작할 무렵, 서울 큰 병원에서 검사받고 돌아오신지 석 달도 채 되지 않아서였다.

우리 가족의 아침 풍경이 많이 바뀐 건 그 무렵이다. 어머니는 매일 동이 트기 전에 산사를 찾아, 서운하게 떠나신 외할머니의 영면을 기도하셨다. 산에서 내려오시는 길에, 아침 운동도 하시고 활기찬 기운으로 아침식사를 준비하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생생하다.

4남매 모두 고등학교부터 유학생활을 시작하였는데, 20년간 어머니는 떨어져 있는 자식의 건강을 기원하기 위해 기꺼이 아침잠을 설치셨다. 재작년 겨울, 의사인 아들 된 도리로 큰마음 먹고 어머니 건강검진을 해드렸다. 몇 차례 추가 검사를 실시하고 나서 비소세포폐암 4기로 판정받았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소식에 흔들렸지만 용기 내어 아들이 의사로 있는 병원에서 한 차례 수술과 항암 치료를 받으셨다. 아직 쌀알 크기의 의심병소가 양측 폐에 퍼져 있지만, 최근 검사 간격이 6개월로 늘어나고 체력도 회복하셔서 평소 좋아하시는 산행도 가능하시다.

우리 가족의 모습은 다시 한 번 크게 바뀌었다. 힘든 병이 생기면 가족의 건강함이 평가된다는 말처럼, 큰일을 겪어내며 가족 모두 어머니를 중심으로 한마음 되어 서로를 아끼고 격려하였다.

수십 년간 애연가이신 아버지도 담배 대신 어머니 곁에서 극진히 간병하시고 철없어 보이던 동생도 취직하여 걱정을 덜어주었다.

지난 달 여름휴가를 받아 집에 내려가 부모님과 함께 보냈다. 어머니의 일상을 따라 아침에 일어나 좋은 공기 마시며 산에 올라갔다 절에 들러서 내려오고, 저녁 무렵 앞바다 주변을 산보하였다.

석양이 아름답게 물든 바닷가를 걸으며 지난 힘든 일 년 동안 가슴에 담아두었던 아픔과 모자간의 사랑을 나누었다. "근데 말여,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 병 고치려고 아들 의사 만들었나벼." 어머니는 웃으며 말씀하셨다.

어릴 적, 외할머니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리움과 슬픔을 달래던 어머니의 얼굴을 떠올려본다. 아마도 그 시절, 어머니는 말기 암으로 아파하시던 외할머니와의 이별을 앞두고 목소리라도 몰래 담아 두기 위해 초라하게 카세트를 장만하셨으리라.

하지만, 나는 지금 당신의 든든한 아들로서 어머니와의 밀월기(蜜月期)를 한없이 달콤하게 즐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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