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을 위한 바른 소리, 의료를 위한 곧은 소리
updated. 2024-04-18 21:27 (목)
짐바브웨 <끝>

짐바브웨 <끝>

  • Doctorsnews kmatimes@kma.org
  • 승인 2009.05.18 10:39
  • 댓글 0
  • 페이스북
  • 트위터
  • 네이버밴드
  • 카카오톡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짐바브웨는 폭발적인 인플레이션으로 물가가 비싸서 물이며 음료수·담배 등 필요한 모든 물건을 미리 보츠와나에서 사서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짐바브웨는 땅이 비옥하여 예전에는 지금보다 살기 좋았다고 한다.

정권의 독재가 오래 지속되면서 인플레이션이 심해졌다고 하며 살인적인 인플레이션 때문에 화폐는 가치가 없고 쿠폰(식료품이나 생필품을 사는 쿠폰)을 월급대신에 주기도 하며 달러를 사용하거나 실물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물물교환을 통해 물건들을 사기도 한다고 하였다.

▲ 짐바브웨 초등학교 운동장 전경
치안은 다른 곳은 위험하나 빅토리아 폭포주변은 관광지로 비교적 안전하며 그렇다 하더라도 밤에는 돌아다녀선 안 된다고 하였다.

국경을 통과 한 뒤 비교적 높은 산악지대를 통과하여 빅토리아폭포시에 도착하였다. 트럭에서 내리니 주변에서 젊은 청년들이 저마다 공예품의 가격을 제시하며 하나라도 팔아보려고 끈질기게 따라 붙는다.

들고 있는 물건 중엔 꽤 상태가 좋아 보이는 물건도 있었으나 어느 정도 가격이 적정선인지 모르고 위험할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들어 일체 대꾸하지 않고 이동하였다. 지나가다 보니 주유소가 있는데 사람도 없고 차도 없다. 짐바브웨는 나라의 거의 모든 주유소에 기름이 없다 한다.

필요한 경우 이웃나라인 보츠와나나 잠비아 등에 가서 주유하고 와야 한다고 하며 트럭을 타고 지나가다 본 상점에도 물건이 거의 없었다. 가이드 필라니의 안내로 그가 졸업했다는 초등학교로 향했다.

지나가다 본 마을은 집집마다 텃밭을 일구어 놓았는데 상당부분을 텃밭에 의존하여 생활하는 듯 하였고 어쩌다 집 밖에 나와 있는 사람들은 낡은 옷차림에 지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초등학교에 들어서니 아주 넓은 운동장에 오래된 건물들이 한쪽으로 몇 채가 있었고 한가운데에는 큰 나무가 몇 그루 심어져 있어 진료를 하고 축구골대를 세우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아 보였다.

다음날 한쪽에선 아디다스팀이 축구골대를 짓고 한쪽에선 우리 고대의료원팀이 진료를 하였다.

우리의 진료는 내 영어 실력도 부족하고 아이들도 영어 실력이 훌륭한 편은 못되어 의사소통이 쉽지는 않았지만 영어를 잘하는 김윤섭 선생님과 아프리카에서 영어실력이 일취월장 하신 박미숙 수간호사선생님의 도움으로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었다.

아이들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의 키를 재보는 경우가 많아 자신의 키를 아는 것 만으로도 상당히 기뻐하는 모습이었다.

의외로 소화기 증상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았고(내 세부 전공이 소아소화기영양학이어서 더 보람 있었다) 위염이나 장염, 일부는 과민성 대장 증후군의 증세를 보이는 아이들도 있었다.

▲ 선생님들의 펼친 전통춤 공연

꽤 오랜 기간 동안 복통이 있었으나 그냥 참으며 지내온 듯 하였고 섭취하는 음식의 위생상태나 음식의 질 등에 문제가 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자세한 질문을 하기에는 시간이 너무나 부족하였다. 아이들의 대기 행렬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고,

나중에는 어른들도 진료받기를 원하였으나 통관 문제로 많은 약을 준비하지 못하여 아쉽게도 진료를 해 줄 수가 없었다. 진료를 마치고 남은 약제와 물품을 인근 병원에 기증하기로 하고 규모가 상당한 빅토리아폭포 병원을 찾아 갔다. 의료진들은 얼마 안되는 약들과 물품에도 너무나 고마워하였다.

물품을 접수하는 간호사에게 약들에 대한 설명과 메모를 해주고 짐바브웨에 물자가 너무 부족하다는데 여기는 어떻냐고 묻자, 약을 구하지 못해 외국에서 기부 받는 물품에 전적으로 의존해 병원을 꾸려가고 있다는 놀라운 대답이 돌아왔다.

인근에서 가장 큰 규모의 병원이 이 정도라면 짐바브웨 전체에 의료자원이 거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안타까웠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시점에 짐바브웨는 우리가 떠난 다음주부터 콜레라가 창궐하기 시작하여 3000명이 사망하였다 한다. 그때 진료 했던 아이들과 짐바브웨의 열악한 의료환경이 떠올라 마음이 참으로 무겁다.

▲ 빅토리아 폭포의 웅장한 모습
다음날 아프리카의 마지막 일정으로 빅토리아 폭포를 향해 출발하였다. 입구를 조금 걸어들어가자 폭포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우기에는 수량이 너무 많아 물보라 때문에 빅토리아폭포를 제대로 볼 수 없다고 하며 건기에는 수량이 너무 적어 진면목을 볼 수 없다 하였고 제대로 보려면 우기와 건기 사이 정도에 와야 제대로 볼 수 있다고 했다. 관람코스로 조금 더 들어가니 빅토리아 폭포가 보이기 시작하였다.

세 번째 관람코스쯤 가보니 폭포의 양끝까지가 눈에 들어왔다. 수량이 줄어서인지 물줄기는 왼쪽 아주 일부에서만 떨어지고 있었고 오른편은 마치 그랜드캐년 같은 협곡이 아주 멀리까지 펼쳐져 있었다. 수량이 늘어 저 멀리 전체에서 물이 떨어진다고 상상하니 그 절경이 떠올랐다.

수량이 많을 때 왔으면 좋았을걸 그랬다는 아쉬움이 남긴 했지만 폭포와 어우러진 깊고 넓은 협곡은 그 자체로도 장엄하고 아름다웠고 왜 빅토리아폭포가 세계 삼대 폭포중의 하나인지 굳이 따지지 않아도 이해 할 수 있었다. 호텔로 돌아와 호텔 근처에 기념품을 사러 나갔다.

거리를 걸어가니 예의 그 청년들이 들러붙는다. 거리엔 여행객을 위한 경찰들이 있어서 계속 따라다니면서 우리를 보호 해주었다. 이곳의 은행에선 일인당 하루 50센트가 출금한도라 하니 경제 사정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갔다. 기념품을 사고 식사 후 짐을 꾸려 빅토리아폭포 공항으로 이동하였다.

두 차례 비행기를 갈아 타고 빅토리아폭포 공항을 떠난지 만 하루가 지나 인천공항에 도착하였다. 삼 주간의 가족 같은 생활에 절친해진 모든 이들과 포옹을 하고 헤어졌고 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보이는 도시의 풍경이 생경하게 느껴졌다.

뜨거운 기후와 광활한 대지 위에 펼쳐진 대자연, 그곳에서 만나고 보았던 사람들, 함께 했던 이들과의 추억이 어우러져 아프리카는 어느덧 내게 향수처럼 남아 있다.

발전해가면서 대자연과 순수는 조금씩 사라져 갈 것이기에 내가 본 아프리카는 다시 볼 수 없는 아프리카란 생각이 들지만, 아이들이 기아와 질병의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마음속으로 빌어 본다.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 기사속 광고는 빅데이터 분석 결과로 본지 편집방침과는 무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