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퐁파두르 부인의 흥망(하)
퐁파두르 부인의 흥망(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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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8.11.17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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퐁파두르 부인은 왕의 비서실장 역할도 도맡았는데 그녀가 왕을 정치적으로 돕는 일에는 실패하였으나 예술문화 분야에서는 성공적이었다. 부셰가 그린 퐁파두르 부인은 라투르의 그림보다도 화려한 빛깔의 옷을 입고 있으며 주변의 책은 없어지고 단지 한 권의 책만을 들고 있다.

▲ 부셰 작 '폼파두르 부인의 초상화'(1759), 런던 왈다스 콜렉숀
그녀는 베르사유 궁에 들어와 라이벌 격인 왕비 마리아를 정성껏 모시고 잘 대접하면서 왕비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그러자 루이 15세는 국정마저도 그녀에게 맡기고 왕은 주색으로 세월을 보냈다. 방탕한 왕과 접한 여인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으며 사생아만도 30명이 넘었다고 한다. 이런 가운데서도 20년 이상 왕의 마음을 사로잡고 실제로 프랑스를 통치한 것은 퐁파두르 부인이었다. 

그러다 보니 그녀에게는 적이 많이 생겨났다. 그런 가운데서 한 명의 짓궂은 악평가는 그녀가 죽은 후에 묘비에 쓰일 문구를 다음과 같이 적어 놓았다고 한다. '20년은 처녀로, 15년은 창녀로, 7년은 '뚜쟁이'이었던 여인 여기에 잠들다.' 이러한 악평을 뒷받침이라도 하는 듯한 그림들이 있다.

라투르의 그림에서 부인은 젊음을 간직하고 있지만 1757년에 그려진 부셰의 작품은 창녀기(期)라고 악평한 시기의 그림이고 세 번째 그림은 뚜쟁이기에 해당되는 시기의 그림이다. 

퐁파두르 부인은 일찍이 43세의 나이로 요절했는데 그것은 아마도 정적들과의 암투, 매일 밤 계속되는 연회로 지친 몸에 루이 15세의 왕성한 정력으로 매일 밤 시달리다 보니 벌서 30세의 나이에 들어서면서 건강이 급격히 나빠졌는데 그것은 아마도 왕이 지니고 있던 비너스 병(veneral disease)이 옮겨진 것도 한 몫을 한 것으로 해석하는 역사 평론가들이 많다.

퐁파두르 부인은 냉(대하증)이 심해서 뒷물을 자주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녀는 비데(bidet)를 새로 고안해서 사용했으며 비데가 지금과 같은 분수식이 아니라 뒷물용 대야를 따로 마련해놓고 청결 소독제와 향수를 넣어서 사용한 것이 점차 발전되어 오늘날의 비데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그녀는 비데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부셰가 그린 또 하나의 '퐁파두르 부인'(1759)은 악평가가 쓴 묘비문의 소위 뚜쟁이시기에 해당된다. 이제는 손에 책 대신에 부채를 들고 있으며 옷만 화려하지 몸은 지친 듯하다. 악평가가 왜 그녀를 뚜쟁이라 했는가 하면 왕의 정력에 지칠 대로 지친 부인은 궁 안에 녹원(鹿苑)을 마련하고는 여기에 각처에서 뽑혀 온 미녀들을 모아놓고 왕이 선택하게 했다.

매일 밤 젊고 싱싱한 미녀들로 왕의 잠자리 시중을 들게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7년간은 뚜쟁이라는 악평이 나온 것이다. 1764년 3월 26일자로 작성된 퐁파두르 부인의 진료부가 남아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부인은 월경을 전후해서 심한 두통을 호소했는데 20년간이나 계속됐다. 그 때에는 가벼운 변비도 동반됐는데 연하제의 투여로 변비는 경감됐다.

연하제로는 우유를 사용했다. 최근에 두통은 많이 호전되었으나 그 대신 기침이 심해졌다. 기침은 마치 백일해 때 같이 계속적으로 일어났으며 냄새나는 가래도 많이 나왔다.'


고려대 명예교수·학술원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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