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을 위한 바른 소리, 의료를 위한 곧은 소리
updated. 2024-04-23 17:54 (화)
죽음의 위상도(位相圖)(하)

죽음의 위상도(位相圖)(하)

  • Doctorsnews kmatimes@kma.org
  • 승인 2008.09.29 09:42
  • 댓글 0
  • 페이스북
  • 트위터
  • 네이버밴드
  • 카카오톡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호들러 작 '밤' 1890, 베를린 큰스트미술박물관 소장

스위스의 화가 호들러(Ferdinand Hodler 1805∼1918)는 상징주의 화가이다. 그의 작품 '밤'(1890)은 상징주의 화가로서 처음 그린 것으로 매우 인상적이다. 그는 이 그림으로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림의 내용을 살펴보면 밤에 잠자리에 들었는데 누군가가 어깨를 흔들어 눈을 떠보니 검은 옷을 입은 자가 자기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 자는 옷에다 얼굴을 깊숙이 묻어서 누구인지 알 수는 없지만 직감적으로 그가 죽음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결국은 죽음이 다가온 것이다.

죽음은 흔히는 자고 있는 사람에게 다가선다고 하는데 오늘 밤에는 그에게 다가온 것이다. 이 방안에는 그 말고도 여러 사람이 자고 있는데 하필이면 왜 자기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공포에 질려 소리를 질렀으나 그의 비명은 아무도 듣지 못한다. 아니 아무리 소리지르려 해도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질 않는다.

밤이면 우리 모두는 잠자리에 드는데 잠들었던 모든 사람이 모두 깨어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이는 그대로 죽음으로 이어지는 수도 있다.

낮에는 전연 생각하지도 못했던 공포스러운 일이 밤에 일어나고는 한다. 가려진 인간의 내면, 그것이 무의식의 세계이다. 꿈을 꾸는 밤이 바로 그 무의식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한다. 우리들 스스로는 무의식의 세계를 알지 못한다. 밤이 무의식의 세계를 깨닫게 해준다.

이렇듯 시간은 단순히 물리적인 흐름뿐만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낮과 밤, 의식과 무의식, 그리고 익숙한 세계와 낯선 세계를 오고 가게 하는 마법의 기회를 준다.

그림을 다시 보자 저 공포에 쌓인 얼굴은 바로 화가 자신의 얼굴이다. 그는 평생을 죽음의 공포 속에서 살았다. 그리고 인생을 따라다니는 죽음의 공포를 이 한 장의 그림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공포를 느낀 얼굴의 표정, 즉 죽음의 공포가 이토록 적나라하게 드러난 얼굴이 어디 또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죽음 앞에 보이는 표정이다.

죽음의 공포가 오직 그 한사람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것이기도 하다. 오늘날 죽음은 다시 무섭게 야성화되었다. 그리하여 사납게 날뛰는 야생마처럼 다가서고는 한다. 그래서 인류는 역사상 유례없는 커다란 공포감을 갖게 된 것이다.

옛날 중세와 그 이전 사람에게서 볼 수 있었던 죽음에 초연한 태도는 이제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또 한때 옆에서 죽음을 함께 지켜 봐주던 그 많은 사람도 이제는 여기에 없다. 단지 한밤중 군중속에서 자기 혼자 깨어나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는 가운데 죽음을 맞이하기 때문에 현대인은 죽음에 공포를 갖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 그림은 현대인의 죽음에 대한 개념을 잘 나타내어 워타하우스의 '잠과 그 형제 죽음'과 이 그림을 번갈아 비교하면 옛 사람들의 죽음에 대한 개념과 현대인의 죽음에 대한 개념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들 그림은 죽음의 위상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인생은 낮과 같이 명료하면서도 밤과 같이 불명료한 가운데 지나게 되며 그것이 바로 인생임을 암시하는 것 같기도 하다.

문국진(고려대 명예교수·학술원회원)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 기사속 광고는 빅데이터 분석 결과로 본지 편집방침과는 무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