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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의학전문용어 사용…포기할 수 없는 권리

시론 의학전문용어 사용…포기할 수 없는 권리

  • Doctorsnews kmatimes@kma.org
  • 승인 2008.09.01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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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남건(부산의학전문대학원 외과 교수 대한대장항문학회장)

모든 언어는 각 구성원 간의 의사소통을 기본 목적으로 그 시대와 상황에 맞게 점차적으로 발전해 왔다. 의학 용어도 다름이 아니어서 그리스의 히포크라테스 이후 각 국가간의 학문적 발전과 더불어 그 소통영역이 넓어지며 여러 어원과 언어가 혼재되어 발전해 왔다. 이러한 다양성과 과학적 사고에 바탕을 둔 의학용어를 순수한 우리말로 바꾸는 것은 여러 오류와 혼란을 일으킬 여지가 많다.

과거에 북한에서도 우리말 찾기 운동의 일환으로 의학전문용어가 전면적으로 바뀌었으나 현실에 맞지 않아 다시 원상 복귀된 상태로 알고 있다. 우리나라도 다소 그 영향을 받아서인지 해부학 전문용어가 전면적으로 우리말로 바뀌었다. 하지만 새 용어로 교육받은 학생이 실제 임상현장에서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갑작스런 용어변경에 따른 부작용들이 발생하고 있다. 특히 사람의 생명이 달려있는 수술 중에도 의사소통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실정이다. 언어는 의사소통의 매개로 사회적으로 규정된 약속이다.  물론 언어는 시대에 따라 그 모양과 의미를 달리했지만, 그 변화는 매우 서서히 모든 사회 구성원들의 합의를 바탕으로 무리 없이 진행되어 왔다.

오늘의 해부학 용어 변경 또한 맹장은 '막창자', 결장은 '주름창자'와 같이 좀 더 쉬운 우리말로 바꾸자는 취지는 좋다. 하지만 이를 단번에 바꾸자는 주장은 위험할 수 있다.

현대 용어는 간편함을 추구하는 시대적 경향과 인터넷의 발달로 인해 하루가 다르게 생소한 신조어들을 쏟아내고 있다.

'안습'·'?'·'지못미' 등의 단어는 인터넷을 접할 기회가 부족한 기성세대에게는 의사소통이 전혀 불가한, 그야말로 '외계어'에 다름 아닐 것이다. 조금 과한 예가 되겠지만 의학용어 또한 생소하고 어려운 우리말로 성급하게 변경함으로써 의료인 각 계층 간의 의사소통에 장애가 되고 있는 실정이다. 일상용어가 아닌 환자의 생명을 다루는 의료 현장에서 사용하는 용어인 만큼 그 심각성과 위험도가 크다고 할 수 있다.

한때 일부 언어학자들이 통일을 대비해 우리말에 포함된 외래어를 순화하고 일본식 용어의 잔재를 버려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 적이 있으나 지금은 그에 대한 논의가 시들해진 상태이다. 치질이 일본어라하여 치핵으로 바뀌었으나 아직도 보편화되지는 못하고 있다. 언어를 바꾼다는 것은 그 집단 구성원의 합의와 시간이 필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학용어의 개정을 위해서는 각 분과학회의 동의를 받아 용어개정위원회를 구성해 심도있는 논의를 진행시킬 필요가 있고, 개정안이 나왔다면 각 분과학회의 최종 동의를 얻어 새 용어가 무리 없이 정착할 수 있도록 기존 용어와 병기하는 시간을 충분히 주어야 할 것이다.

대한외과학회에서 현재의 논문들을 50년, 100년 후에도 볼 수 있도록 타임캡슐에 넣어 묻어두던 것이 불과 몇 년 전 일이다. 용어의 성급한 변경은 오늘의 우리가 과거 한시를 읽고 바로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것처럼 현재의 우수 논문과 성과들이 생매장되어 우리의 후학들이 이해하지 못하도록 만들지도 모른다. 현재의 젊은 의사들이 과거 한자 가득한 논문을 읽어내기 어려워하는 것처럼 말이다. 급박한 응급 상황에서, 긴장감 가득한 수술실에서 의료인 각 계층이 사용하는 용어가 다르다는 것은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필자가 동경대병원에서 연구원으로 있을 때에 일본 의학책을 잃어내는 것을 보고 아시아 남부지역에서 온 의사들이 매우 부러워하는 것을 느낀 적이 있다. 그들은 구미의 영향을 받아서 한자계통의 의학전문용어가 잘 통용되지 않았던 것 같다. 한·일·중의 동북아 의학 문명의 연대를 잘라버리는 것과 강화시키는 쪽 중 어느 편이 한국 의학을 성숙시키는데 유리할 지를 심각하게 평가해보아야 그 해답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미국의 의학전문용어도 순수 영어로 통용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라틴어·불어·독어 등 세계 여러나라 언어가 혼재된 것을 체계화해 받아들임으로써 미국 의학이 성숙되었던 것이다. 영어를 가장 잘 알고 있는 미국인 영어 선생일지라도 미국 의학전문용어는 대부분 알지 못한다. 필자가 미국에서 논문을 발표하기 위해 비디오 녹화를 할 때 미국인 내레이터를 고용해 작업을 한 적이 있다. 그에 따르면 의학전문용어는 한마디로 말해서 영어가 아니라는 것이다. 인류 역사상 최고의 결과물인 의학의 내용을 단일 민족의 용어로 표현하고자 하는 욕망은 지나친 자기만족일 뿐이다.

예를 들면 TME(Total Mesorectal Excision)이라는 용어는 영국인 Heald교수가 주장해 일약 의료계 핵심 단어로 등장했다. 그러나 내용상 실제로 과거의 직장암 전문 외과의사는 대부분 시술하던 방법과 별도의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개념을 정립해 새로운 단어를 창출함으로써 학문적 인정을 받은 예이다. 기준 용어를 갑자기 바꾸려는 것은 혁명적 사고이다. 학자는 새로운 전문용어를 만들어 내거나 단지 기존 용어와의 혼동을 방지하기 위해 용어의 뜻을 더 세밀하고 정확하게 다듬는 역할만 가지고 있을 뿐이다. 더더욱 기존의 전문용어 사용을 금지시킬 수 있는 권한은 아무도 가지고 있지 않다.

기존 전문용어의 지속적 합법적 사용으로 과거의 학술 성과물을 후학에게 유산으로 남겨주는 것은 포기할 수 없는 우리의 권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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