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을 위한 바른 소리, 의료를 위한 곧은 소리
updated. 2024-03-29 15:21 (금)
시론 실용인가 포퓰리즘인가?
시론 실용인가 포퓰리즘인가?
  • Doctorsnews kmatimes@kma.org
  • 승인 2008.08.25 13:49
  • 댓글 0
  • 페이스북
  • 트위터
  • 네이버밴드
  • 카카오톡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박호진(의료와사회포럼 자문위원)

"왜! 정권이 교체되었는지 모르겠다"는 여당 대표의 푸념처럼, 지난 선거에서 보수 정당을 지지했던 유권자들은 하루하루가 곤혹스럽다. 국민의 압도적 지지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정부-여당은 매사에 자신 없는 태도를 보이기 때문이다. 정권 교체의 의미가 무엇인지 피부로 느낄 수 없고, 더 나아가 '잃어버린 10년'을 되찾을 수 있다는 기대가 줄어든다. 물론 정부-여당이 처한 현실은 그리 단순하지 않고 대단히 복합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국민들 사이에 "기대를 접고 5년을 더 기다려야 한다"거나 "모 후보가 집권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느냐"는 자조적 얘기가 심심치 않게 들리는 것도 엄연한 현실이다.

 '실용과 포퓰리즘' 사이에서 혼란을 겪고 있으며, 의료분야도 마찬가지다. '의료 민영화'라는 단어의 뜻을 놓고 벌이는 선문답은 순진한 자유주의자의 입장에서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지난 10년 보건의료정책을 쥐락펴락한 사람들은 민간보험이나 영리법인의 도입을 의료 민영화라고 말한다.

 그러나 전재희 보건복지가족부 장관에 의하면, 민영화는 건강보험의 운영 주체 변경이라는 관점을 견지하며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다고 단언한다.

 이러한 미묘한 신경전은 건강보험의 역할에 대한 인식의 차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으로는 자신이 지향하는 의료서비스의 배분 원리나 이론이 없거나 숨기기 때문에 일어나는 혼란이다. 의료서비스의 제공은 정치철학의 구현이라는 점에서 양측은 솔직하지 못한 인상을 준다.

 한국에는 '이윤보다는 생명!'이라는 구호가 있다. 약 3년 전부터 주로 민노당 혹은 민노총 계열의 주장에서 보게 되는데 아주 감성적으로 접근하는 대표적 예이다. 서구 사회도 마찬가지라지만 이 정도는 아닐 것이다. 한국 사회는 2만 달러 시대에 진입했음에도, 못살던 시절의 추억을 떨치지 못한 듯 "병원에 한 번 가보지도 못하고…"라는 표현이 남아있다. 이런 생각들은 의료서비스에 대한 접근성은 평등해야 하고, 사회적 지위에 관계없이 누구나 '필요에 따라' 치료받아야 한다는 주장으로 비약한다. 즉 심정적 차원에서 경제적 재화의 분배로 논점을 에스컬레이트시킨다. 이쯤 되면 감성의 문제가 아니라 철저한 이념적인 문제가 된다. 어쨌든 재화의 분배를 감성적으로 접근한다면 재원 문제와 관련하여 사회적 갈등에서 절대 헤어나지 못할 것이다.

 

 '재화의 분배'를 '감성'으로 접근

 

 공공성의 구현은 전적으로 정치철학의 과제라는 점에 이의를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잘 알고 있듯이 대한민국의 건국 이념은 자유민주주의이다. 그런데 일부 학자들은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념을 숨기고 공공성을 일방적으로 해석한다. 또한 사회 통합을 내세우며 사회적 기본권인 건강권을 다른 기본권에 우선하는 것으로 주장한다. 그 결과 총론에 해당하는 자유의 개념에 상치되는 하위 법령이 만들어졌다. 이런 부정합성은 개혁의 대상인데도 포퓰리즘으로 인해 극복의 대상이 아닌 굴복의 대상이 되고 있다. 분명한 점은 공공성의 문제를 다루는 데 대한민국의 건국이념인 자유주의로 접근해야 한다. 공공성을 내세우다 보면 멸사봉공(滅私奉公)을 글자대로 요구하게 된다.

 이런 모순은 개인 건강의 관리 책임이나 사회보험인 국민건강보험의 운영에서 잘 드러난다. 즉 개인의 건강은 사회적 가치에 귀속되고 개인의 건강 정보는 중앙에 집중해야 한다. 지난 정권이 시도했던 가칭 '국민건강정보법'과 '정보관리원'이 그런 예이다. 자원의 효율적 사용을 위해 개인 정보는 사회적으로 공유되고 이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의 부작용은 개인 건강정보의 불법 유출로 나타났다. 지난 대선 당시 야당 후보들의 개인 정보는 악용되었고 일부 노조원들이 주도했다. 이 현상은 정권이 바뀐 지금에도 계속되고 있다. 따라서 개인 정보는 전국적으로 한 군데 집중할 게 아니라 분권화시킨 조직체에서 분할 관리해야 한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의 운영도 마찬가지다.

 국가와 개인의 관계에서, 어느 한 쪽이 커지면 반대쪽이 작아지는 것은 상식이다. 한국이란 국가는 예나 지금이나 강성(强性)이었고 역할이 대단히 넓다. 이런 모델은 박정희식 개발독재에 국한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은 개인의 자율성을 마음껏 누리면서 동시에 강력한 국가를 원하는 예가 있었다. 이것은 불가능하다. 이제는 작은 정부를 지향하고 개인들의 영역은 최대한 넓혀야 한다.

 지난 10년간 복지가 확대되어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부분도 있다. 그러나 이 경우 정부 부처와 기구는 비대해지고 비효율이 증가한다. 이런 예는 건강보험공단 등에서 잘 나타난다. 따라서 그런 기구는 반드시 '분권화'된 형식으로 운영되어야 한다. 의료의 국가서비스(NHS)를 운영하는 영국조차 말이 국가서비스이지 실제의 내용은 각 지방의 책임제로 운영한다.

 

 '개인 건강정보' 중앙 집중화 위험

 

 사회민주주의는 의식주 외에 교육·교통·의료를 국가에서 직접 공급하고 싶어 한다. 유감스럽게도 '잃어버린 10년' 동안 이런 정책은 끈질기게 시도되었고 많은 갈등을 유발했다. 교육과 의료 부문에서 특히 심했는데 그 때마다 공공성은 단골 메뉴였다. 그뿐 아니라 공공성은 상당한 위력을 갖고 반대파의 입을 막는 데 유효한 수단이 되었다. 일부 저항이 있긴 했으나 당시 야당 정치인들은 이런 이론과 포퓰리즘 앞에 맥을 추지 못했다.

 건강보험의 역사 30년 동안, 정치인들은 자신의 정치적 사익을 위하고 국가의 역할을 과장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즉 의료 혜택을 베푸는 것을 집권자의 전리품으로 여기면서 의료 분야를 도구적으로 이용했다.

 전두환 대통령은 보험의 급여 대상자를 늘리는데 과감했고, 노태우 정권은 내친김에 전 국민 의료보장을 완성했다. 김영삼 정권은 보험료 인상을 외면하고, 보험 혜택을 늘리는데 인색하지 않았다. 결국 이런 정책들은 재정적자로 이어져 1995년 최초의 당기적자를 기록했다. 더구나 김대중 정부는 건강보험 재정을 통합해 재정 적자를 심화시켰고, 노무현 정부는 의료서비스의 '배급제'를 시도했다. 그러나 대단히 유감스러운 것은 정권이 바뀐 지금에 와서도 일부 정치인과 학자들은 '지속 가능성'이란 말로 지난 10년의 정책을 답습하고자 노력한다는 점이다.

 그러면 건강보험의 운영 원칙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건강보험이 국민의 건강을 모두 책임질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데서 출발한다. 즉 국가든 공보험이든 개인의 필요를 충족할 수 없다. 하향평준화를 전제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건강보험의 역할은 기본적 필요에 국한시켜야 한다. 그리고 그 이상의 필요는 개인들의 결정에 맡겨야 한다.

 

 건보가 국민의 모든 건강을 책임질 순 없어

 

 건강보험의 급여 대상 인구와 급여 범위의 확대는 선거 때마다 확대되었다. 그러나 지난 대선 공약을 살펴보면 새로운 현상이 발견된다. 즉 무료진료에 대한 '경쟁적' 공약이다. 민노당은 자신들의 정치 이념에 따라 무료 진료를 추구하기 때문에 당연할 것이고 또한 한국의 포퓰리즘과도 맞아 떨어진다. 반면 한나라당은 의료 문제를 다루는 정치철학도 분명하지 않은 상태에서 엉거주춤 포퓰리즘에 끌려가는 모양새이다.  

 한나라당은 그저 복지는 국정 운영의 양대 축 가운데 하나라는 원론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점은 최근 전재희 장관의 기자회견에서도 잘 증명된다. 그러나 지난 대선 과정에서 영유아에 대한 무료진료, 혹은 아토피에 대한 무료진료 등이 선거 공약으로 제시되어 큰 틀에서 보면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민노당의 아류인 것으로 보일 수 있다. 한나라당이 이런 오해를 불식시키려면 국민건강보험의 한계 즉 국가의 한계를 인정하고 개인들의 영역을 제도적으로 보장해야 한다.

 필자의 판단으로 민노당은 사회주의를 지향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그러나 '무료진료'는 엄청난 재원이 필요하고 국민들이 엄청난 세금을 내야 한다는 사실을 축소 혹은 외면하고 있다. 아니면 그런 의료의 완전 국유화는 의료서비스의 질을 하향 평준화시킨다는 점을 숨기고 있다. 민주당은 민노당의 아류가 아닌 척하지만 궁극적인 목표가 무엇인지 밝히지 않는다. 단지 민노당의 정책이 가능하도록 건강보험의 중앙집중화·재정의 통합·의료서비스의 배급제 등을 시행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이런 정책들은 의사들의 규격화로 귀결된다. 필자는 건강보험이 제공하는 무료검진을 받으며 충격적인 경험을 했다. 담당 의사들은 마치 '유격장의 훈련 조교' 혹은 대형 가전매장의 '판매원' 같다는 인상을 주었다. 의사들은 이제 환자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게 아니라 공단의 하수인 역할을 하여 국민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전락할 것 같다.

 

 엉거주춤한 포퓰리즘에 끌려가서야

 

 우선 포퓰리즘은 '굴복이 아닌 극복의 대상'이다. 이 말에 동의한다면 국민건강보험의 역할 재조정에 착수해야 한다. 그 이유는 건강보험이 모든 의료 문제를 감당할 수 없고, 개인적 선호의 보장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기본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서유럽의 사민주의국가들조차 개인의 선택권을 보장하고 있다. 전체주의를 제외하고 개인의 선호를 원천적으로 부정하는 나라는 없다. 그럼에도 한국의 건강보험이 개인의 선호를 제도적으로 막고 있는 현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현재 한국에서 건강보험의 폐지를 주장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즉 자유주의자라 해도 국민의 건강 문제에 어느 정도 국가의 개입을 인정한다는 말이다. 반면 일부 인사는 개별 국민의 선택권을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의료 문제에 관한 한 합리적 우파는 있어도 극우파는 없다고 단언한다. 한국의 현실에서 경계해야 할 대상은 이상적 시장주의자가 아니라 '엄격한 평등론자'들일 뿐이다.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