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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항암제 비급여 판정, 누구를 위한 결정인가

시론 항암제 비급여 판정, 누구를 위한 결정인가

  • Doctorsnews kmatimes@kma.org
  • 승인 2008.02.13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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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세환(인제의대 교수 상계백병원 외과)

암 치료에 있어 이상적인 의료 서비스는 잘 교육된 전문 의료진이 축적된 임상자료를 통해 최선의 치료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의료진 뿐 아니라 의료시설 및 기자재 그리고 적절한 치료제가 이상적으로 조합을 이루어야 한다. 하지만 이런 모든 것이 준비돼 있다 해도 모든 암환자들이 만족스러워할 만한 진료를 제공하기 힘든 것이 오늘의 의료현실이기도 하다.

암환자들은 저마다 이상적인 치료를 받기를 원한다. 하지만 우리 얼굴이 저마다 다르듯 같은 암환자라도 사회·경제적 환경이 다르고 병의 예후마저도 다를 수 밖에 없다. 암을 진료하는 의사로서 이렇듯 다른 환경에 처한 환자 개개인에게 맞는 적합한 치료를 제공하려고 하는 것을 결코 과한 욕심 부리기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공공성을 강조하는 한국의 의료 시스템은 환자의 상황과는 상관없이 모두 다 획일적인 진료를 강요한다. 2008년 한국에서 암에 걸린 환자들은 본인과 담당의사의 전문 지식에 근거한 결정보다는, 식품의약품안전청과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허가한 항암 치료제 및 그 사용법을 환자의 상태와 상관없이 획일적인 형태로 제공받을 수밖에 없다. 심지어는 용량 뿐 아니라 다른 약제와의 배합 그리고 투여 순서까지 정해진 형태로만 사용할 수 있다. 이론적으로는 분명히 질병 자체에 치료의 모든 관심을 두어야 할 것이겠지만 실제로는 효율성이란 개념이 더욱 강조되는 현실이다.

현 의료시스템 아래 암환자는 인격과 개성을 무시당한 조직의 단순한 구성원일 뿐이며 사회 여론에 힘입은 의료의 효율성과 공공성 강조는 진료권과 처방권을 제한하는 기전으로 작용하고 있다. 물론 건강보험을 운영하는 입장에서는 재정적인 면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조금만 시각을 바꾸어 환자나 의사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일률적이고 획일적인 보험재정의 운영 혹은 급여 제한에 앞서, 진정으로 정부차원의 지원과 보조를 필요로 하는 질병은 무엇일지 먼저 생각한다면 대답은 자명하다. 암과 같이 치료를 끊는 순간 희망이 사라지고 죽음을 기다려야 하는 치명적인 질병에 대해 신약에 대한 급여를 제한한다는 것은 의사가 환자에게 최선의 치료를 제공하는 수단을 처음부터 차단하는 일이다.

필자가 진료하는 유방암 환자들은 수술 후 다양한 방법으로 재발이나 전이를 막기 위한 처방을 받고 있다. 이들 중에는 호르몬제로 치료받고 있는 환자들도 있고 방사선이나 항암화학요법을 꾸준히 받고 있는 환자들도 있다. 안타까운 점은 환자들이 열심히 치료에 매진해도 이들 중 상당수는 원인을 알 수 없이 나타나는 재발이나 전이를 사전에 예방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최근 새로운 표적치료제로 주목받고 있는 한 유방암 신약이 약제급여평가위원회에서 비급여로 판정 받았다는 실망스러운 소식을 접했다. 내가 진료하는 환자들 중에서도 꼭 필요로 하는 환자가 있어 보험등재 여부에 관심을 가졌던 약이다.

이에 앞서 부작용 논란이 많았던 모 백혈병 치료제가 보험급여에 포함되는 것을 보며, 우리도 이제 오로지 가격이나 소위 말하는 비용효과성만이 아니라 환자를 위한 의학적 필요성을 인정하는 시대에 접어들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환영해마지 않았었다. 그런데 기대와는 달리 이 유방암 신약은 급여 판정을 받지 못했다. 또 몇몇 중증질환 치료 신약들도 비용효과 측면에서 인정을 받지 못해 비급여 판정을 받았다고 하니 의사로서 환자의 생명을 연장시킬 수 있는 신약을 권할 수 있는 기회마저 박탈당한 듯한 허탈한 심정이다.

암 특히 발견이 늦었거나 치료 방법이 제한된 말기암을 치료해야 하는 경우, 최선의 방법은 환자가 생명을 연장하면서 암으로 인한 고통을 조금이라도 완화할 수 있는 길을 제공하는 것이다. 연장할 수 있는 시간이 비록 한 두 달에 불과하더라도 환자나 그 가족에게는 절실한 시간일 수밖에 없다. 말기까지 간 환자들은 이미 기나긴 투병생활로 경제적인 어려움이 더해진 상태인 경우가 흔하다. 외국에서도 항암제의 급여를 결정할 때는 보통 구조의 원칙(Rule of Rescue)에 입각해 판단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백혈병 치료제로 효과가 있는 해당 약은 현재 비록 가격 협상에서 난항을 겪고 있지만 일단 의학적인 필요성이 인정되어 보험급여가 결정된 상태다. 이 결정을 두고 논란이 많은 것도 사실이지만, 암을 진료하는 의사로서 백혈병과 같이 심각한 질병은 부작용이 다소 있다 하더라도 가장 핵심이 되는 생명연장 측면의 치료에 집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할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말기암에 사용하는 이 유방암 치료제 역시 비급여 판정을 재고해야 한다는 바람이다. 조금만 생각을 바꿔 환자나 그 가족의 입장이 되어 본다면 단 며칠이라도 더 오래, 덜 고통스럽게 살 수 있는 것이 항암 치료의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데 무리가 없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의학 및 진단기술의 발달로 암도 조기에 발견하여 만성질환처럼 꾸준히 관리하고 치료하면 얼마든지 수명까지 사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 주변에는 암이 진행되어 경제적으로 고통받고 있는 환자들이 많이 있다. 적어도 내 환자만큼은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최상의 치료 혜택을 주고 싶은 것이 암환자를 치료하는 의사가 갖는 공통적인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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