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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조직 '의사연구회' 의협 초석 놓다
항일조직 '의사연구회' 의협 초석 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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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8.01.01 0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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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협 100년... 질곡을 넘어 새 시대로]
▲ 일본 천황의 무조건 항복 방송이 있은 뒤, 서울역 광장에 몰려든 시민들이 해방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다(1945. 8. 15).

'의사연구회' 의사 단체 첫 발(1908)

굴욕적인 한일합방으로 일본에게 국권을 송두리채 빼앗기기 2년 전인 1908년 11월 6일 한성 안팎의 의사 10여명이 모여 '의사연구회'를 발족시키기로 의견을 모으고, 11월 15일 창립총회를 열어 정식 출범했다.

당시 한국에 머물고 있던 외국인 의사는 300여명인데 비해 정작 한국인 의사는 60여명에 지나지 않았다.

'의사연구회'는 학술연구나 회원들의 친목을 도모하기 위한 의사단체라기 보다는 일제의 침략정책과 일본인 의사단체인 '계림의학회'에 맞서 항일구국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조직체의 성격이 짙었다.

초대 회장에는 김익남(육군군의장), 부회장은 안상호(관립의학교 교관) 선생이 선출됐다.

'의사연구회'는 창립 이후 1910년 한일합방과 함께 강제 해체되고 다시 발족하는 등 숱한 고난과 역경을 겪으면서도 꿋꿋하게 명맥을 이어 왔다.

'의사연구회' 출범은 대한의사협회 100년 역사의 초석을 놓는 획기적이고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신경정신과학회 필두로 분과학회 태동(1945)

광복 직후인 1945년 9월 1일 창립된 조선신경정신과학회를 필두로 10월에는 소아과학회·피부비뇨기과학회·방사선의학회가, 12월에는 조선내과학회가 창립됐다.

이듬해인 1946년에는 병리학회·생리학회·미생물학회 등 기초학 분야 3개 학회가 선 보여 전문과목별 연구 분위기를 조성해 나갔다.

중앙의사단체인 '조선의학협회'가 창립된 1947년에는 외과학회·산부인과학회·안과학회·이비인후과학회·의사학회·약리학회·해부학회 등 기초·임상의학 주요 학회가 대부분 발족돼 의학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해 오고 있다.

조선의학협회→'대한의학협회'로 명칭 변경(1948)

8·15 광복 직후 건국의사회·조선의학연구회·조선의사회 등으로 난립된 의사단체를 발전적으로 해체시키고 중앙의사회를 발족시켜야 한다는 움직임이 의료계 안에서 일기 시작하면서 1947년 3월 각 시도의사회장들이 발기인대회를 열어 윤일선·이용설·심호섭·백인제 선생 등 23명을 창립준비 위원으로 선임하는 등 창립 채비를 갖췄다.

4월 2일 열린 창립준비위원회는 위원장에 심호섭 선생을 선출하는 한편 7일 규약초안위원회 위원을 선임했다. 이어 9일 두번째 창립준비위원회를 열어 의사회의 명칭을 '조선의학협회'로 정하고 창립준비위원회를 구성했다.

같은해 5월 10일 서울의대 강당에서 각 시도의사회 대의원과 분과학회 대원원들로 대의원회를 열고 '조선의학협회'를 정식 출범시켰다.

회장에는 심호섭·대의원 의장에 김정상·이사장에 손금성 선생을 각각 선출했다. 대의원회에서는 의협 정관(당시는 헌장)과 세칙을 정했다.

1948년 1월 과도 정부로부터 의사회 중앙단체로 공인 받았다. 창립 초기 의사회 명칭을 '조선의학협회'로 한 것은 그때까지 국호가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인데, 1948년 8월 정부 수립 이후 9월 21일 임시총회 결의를 거쳐 '대한의학협회'로 명칭을 확정했다.

조선의학협회지 창간(1948)

의협이 의사단체중앙회로 재발족한지 1년 후인 1948년 5월 10일 협회지 창간호가 발간됐다. 국호가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협회지 제호 역시 '조선의학협회지'로 첫 선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당시 미군정청 정치자문관으로 국내에 머물고 있던 서재필 박사가 권두사와 제호를 썼다. 심호섭 의협 회장의 창간사, 이용설 보건후생부장의 격려사가 실렸다.

창간호에는 학술정보 뿐 아니라 의협 임원명단과 의사 출신 정치인들의 동향 등을 게재해 기관지와 같은 역할을 했다. 창간호 발행인은 심호섭 회장, 편집인은 김성진 상임이사였다.

제2호는 창간호가 발간된지 1년 후인 1949년 10월 10일 속간됐다. 이 때의 제호는 의협의 명칭이 바뀜에 따라 '대한의학협회지'로 변경됐으며, 이 때부터 제약회사의 광고가 실리게 됐다. 제2호 발행인은 윤일선 회장, 편집인은 김성진 총무이사였다. 초창기 1년 단위로 발간하던 협회지는 6·25전쟁으로 한동안 중단됐다가 1959년 속간됐으며, 1961년 1월부터 월간지로 탈바꿈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의료계 강력 반발 보건부 분리 독립(1949)

미군정 과도정부 때 보건후생부였던 보건 관련 행정기구가 1948년 정부 수립과 함께 사회부 보건국으로 격하되자 보건의료단체가 심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대한의학협회를 중심으로 한 보건의료단체 대표자들은 1948년 12월 10일 보건부 독립촉진회를 구성하고 정부와 국회를 상대로 보건부 독립을 촉구해 나가기로 했다.

촉진회 회장에 윤일선 의협 회장을 선출하는 한편 임명재·김성진·정기섭 선생 등으로 9인 상임위원을 선임하고, 보건부 독립을 촉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결의문 채택에 앞서 발기회에 참여하지 않았던 대한한의사회와 대한한약종상회 등도 가담해 거의 모든 보건의료단체가 동참했다.

1949년 1월 15일 의협 윤일선 회장과 정구충 부의장 등 의협 대표들이 경무대로 이승만 대통령을 예방하고 보건부 독립의 필요성을 진정한 데 이어 1월 17일에는 이범석 국무총리와 신익희 국회의장을 만나 보건부 독립을 건의했다.

다행히 제헌국회 때에는 의사 출신 국회의원이 9명이나 됐고, 청원 내용을 먼저 심의하는 국회 문교사회 분과위원장을 세브란스의전  교장인 이영준 의원이 맡고 있어 2월 10일 열린 위원회에서 무난히 통과했다.

그후 2월 19일 보건부 독립 청원안이 국회 본회의에 상정돼 재석의원 127명 중 찬성 67표·반대 32표로 가결됐다.

3월 11일 본회의에서는 보건부 독립을 주요 내용으로 한 정부조직법 개정안을 93대 13이란 압도적인 찬성으로 통과시켜 의료계의 숙원이 이뤄졌다.

개정안은 국무회의를 거쳐 대통령의 재가를 받은 다음 3월 25일 확정 발표됐다. 보건부 초대 장관에 세브란스 의대 구영숙 교수, 차관에 서울의대 이갑수 교수가 각각 임명됐다. 보건부 독립은 대한의학협회 발족 이후 최대 업적이란 평가를 받았다.

한의사제도 백지화 실패 의료이원화 고착(1952)

1952년 정부는 국민의료법 제정작업을 착수하는데 이 법안에는 지금의 의료이원화의 씨앗인 한의사제도 명문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이 사안은 당시 의사회 최대현안으로 떠올랐다. 6·25로 혼란의 와중에 있던 의협은 피난지 부산에서 5월10일  재건총회를 열어, 심호섭 회장 등 임원진을 새로 선출하고 전의를 가다듬었다. 의협은 한의사 제도화 반대 건의문을 정부·국회 등 요로에 제출하고 당시 세브란의전 출신의  최재유 보건사회부장관과  의사출신 국회의원들과 힘을 합했으나  한의사를 동정하는 다수 국회의원의 힘에 밀려 '의생'으로 존속돼 오던 한방의가 '한의사'로 승격됐다.

법정단체로 공인(1952)

1952년 9월 25일자로 공포된 국민의료법에 의해 10월 4일자로 사단법인 대한의학협회로 공인받았다.  

한지의사 승격 저지(1952)

일제강점기 때 각 지방에서 제한된 의료활동을 하도록 면허를 받은 한지의사들이 1955년 초 세력를 규합, 승격운동을 전개했다. 당시 각 지방에 흩어져 있던 740여명의 한지의사들은 이같은 운동을 통해 1955년 9월 국민의료법 개정안에 일정 수련후 정규 의사면허를 교부하도록 하는  조항을  삽입하도록 하는 데 성공했고 같은 해 12월 국회 보건사회 분과위원회에서 통과해 의료계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1956년 1월 4일 국회 본회의까지 통과하고 정부에 회부되자 한지의사 승격은 기정사실화 되는 듯 했다. 그러나  의협은 1월 6일 긴급 임총을 소집하고 반대 결의문과 성명서를 채택해 대통령·국무총리 등 관계 요로에 제출하고 각 시도의사회·학회·전국의과대학장회의·의대학생들까지 저지운동에 동참했다. 당시 의사출신 최재유 보건사회부 장관 등 행정부 관료들의 활약으로 1월 20일 국무회의에서 거부돼 국회에 반송됐으며, 국회 본회의 재표결에서 부결됨으로써 한지의사 승격은 백지화됐다.

서울 관훈동에 첫 자체 회관 마련(1955)

의협은 1965년 11월 12일 서울시 종로구 관훈동 구 의친왕궁을 회원 성금과 지원금으로 매입, 셋방살이를 청산했다. 사진은 관훈동회관 매각후 새로 입주한 관철동 의협 회관

셋방살이를 하던 의협은 1955년 11월 12일 서울시 관훈동 192~28번지 구 의친왕궁을 회원 성금과 지원금으로 매입, 자체 회관을 마련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1960년 11월 7일 화재가 발생, 협회의 각종 서류·비품·문헌이 소실됐으며, 그 책임을 지고 임원진이 총사퇴하는 홍역을 앓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1961년 1월 14일 관훈동 대지 매각 후 3월11일 쌍림동 회관을  매입하게 되나 매입 관련 부채문제로 한동안 진통을 겪은 끝에  입주 1년만에 매각하고 1962년 6월 서울역 앞 구 세브란스병원에 임시사무소를  마련하게 된다. 1963년 9월 14일 관철동 회관을 신축, 1974년 이촌동 이주 때까지 관철동 시대를 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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