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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가족계획은 불필요 한가
시론 가족계획은 불필요 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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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7.11.26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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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병주(서울 중구·배산부인과의원 대한산부인과학회 명예회장)

30~40년 전에 그렇게도 열심히 전개했던 한국의 가족계획운동은 사라지고 그 일에 헌신적으로 노력했던 사람은 뒷쪽으로 밀려나 숨소리도 못내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무슨 큰 죄라도 지은 듯이 한물 간 사람처럼 맥이 풀려 아무 소리도 못 내고 있다. 그러나 냉철하게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우리가 먹고 입고 살기가 지독히도 어려웠던 40~50년 전을! 그렇게도 어려웠던 시대의 민족적 시련을 겪으면서 가난을 극복해 나가기로 마음먹고 전개한 갱생(更生)운동 중 하나가 바로 이 가족계획운동이었다.

이제 와서 혹자는 가족계획운동을 산아제한, 다시 말해서 그저 아이 안 낳게 하는 일로만 생각해 장차 한국의 인구가 감소되어 노동력은 물론 국방력마저 저하하고 노령인구를 부양할 장래 인력의 감소로 인해 어려움이 닥칠 것을 걱정하고 있다. 그래서 사회지도층과 위정자 간에 가족계획사업은 필요 없는 괜한 일이었다는 생각이 싹트게 됐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합리적인 계획성이란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한 가정, 한 사회, 또 한 국가를 꾸려 나가는 데 계획성이란 절대로 필요한 것이다. 계획성 없는 가정이나 국가가 결국 멸망으로 이어지는 것을 우리는 여러 번 보았다.

가족계획을 그저 아이를 적게 낳게 하는 일로만 생각하는 것은 오해다. 너무 높은 출산율로 곤란을 겪을 때에는 줄이고, 출산이 적어서 어려울 때는 늘리면서 그 시대, 그 사회의 요구에 적합하게 내리기도 하고 올리기도 하는 즉, 가감을 조절하는 계획이라고 이해하면 좋겠다.

돌이켜 보면 50~60년대에는 이른바 3·3·35의 슬로건을 내걸고 출산을 장려하였다가 그 뒤 둘만 낳기 운동을 거쳐 하나만 낳기까지로 변화해가기에 이르렀으나 그 뒤에는 가족계획운동이 없었는데도, 생활환경이 좋아지고 여성의 사회활동이 현저하게 향상되면서 점차 현재와 같은 출산기피현상으로 변해 바야흐로 세계적으로 출산율이 낮은 나라가 됐다.

이렇게 되니 최근에 와서 정부는 아이를 하나 낳으면 어떤 혜택을 주고, 둘을 가지면 좀 더 좋은 혜택을 주고, 셋을 가지면 그 이상의 혜택을 준다는 등 출산율을 높이는 정책을 쓰기에 이르렀다. 진정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더 많은 수의 국민이 필요하다면 하나 뿐 아니라 둘이든 셋이든 더 낳아야 할 것이므로 늘리는 가족계획을 세워야 한다.

역설적일지 모르지만 산아 수를 늘리는 것도 가족계획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왕년에 소리 높게 외쳤던 3·3·35 운동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세 살 터울로 셋 낳고 35세에서 끊기만 한다면 그야말로 대성공이 아닌가? 그러나 여기서 또 한 가지 생각해야 할 문제가 있다. 3·3·35라 하여 무작정 무선택적으로 아이를 낳기만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낳아서는 안 될 아이도 분명히 있다.

가족계획에 있어서 금언으로 되어 있는 'A child, wanted child', 즉 낳는 아이는 어떤 아이든지 원하는 아이라는 것이 있다. 아이를 낳았을 때 어느 아이라도 으레 '축하합니다'라는 인사를 한다. 사실 태어난 모든 아이는 축복받아야 한다. 그래야 둘도 좋고 셋도 좋지 않겠는가? 그러나 세상에는 그렇지 못한 아이도 있다.

지난여름 어느 날 진료가 끝날 무렵 한 어머니가 여학생을 데리고 와 진찰을 좀 해달라고 했다. 생리가 좀 이상하다는 것이었다. 진찰을 끝내고 "며느님이세요? 축하합니다. 임신 5주인데요!" 하자마자 그 어머니는 여학생의 머리채를 쥐어흔들며 "이 죽여도 시원찮을 ×!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싸돌아다니더니 이게 무슨 꼴이야! 이 ××, 너 이제 어떡할래?"라며 한바탕 소란이 벌어지는 딱한 광경을 보았다. 이 아이는 생기면 안되는 아이였다.

얼마 전 서울 어느 주택가에 어느 외국인이 살던 집 냉동고에서 얼어 죽은 갓 난 쌍둥이가 발견되어 세상을 놀라게 한 일이 있었다. 아이의 부모는 벌써 외국에 가버린 뒤라서 수사에 어려움이 있던 모양인데 하여튼 이런 아이도 애당초 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데 안타깝기 그지없다. 또 공중변소에서 버려진 핏덩이가 있었는가 하면 쓰레기통에서 태어난 지 얼마 안 되는 아이가 발견된 일도 있었다. 또릿또릿하게 잘생긴 갓난 사내아이가 강보에 싸인 채 생년월일만 쓰여 있는 쪽지와 함께 어느 집 대문 밖에 버려진 아이도 있었다(옛날엔 개구멍받이라는 것이 있었다). 하여튼 낳기는 하여도 기를 수가 없는 아이의 슬픈 일들이 전해지고 있다.

어느 나이 어린 남녀 학생이 병원에 찾아와 진찰받고서 임신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나 어떡해!"하며 울상이 되어버린 소녀의 경우나, 나이 40이 넘은 듯한 점잖게 생긴 중년 부인이 생리가 좀 이상하여 진찰을 받고서 "임신인데요, 늦둥이 축하합니다"라는 의사의 말에 이 무슨 창피냐고 한탄하는 미망인의 늦게 핀 로맨스의 기막힌 처지에 동정도 갔다.

결혼 후 심한 가정불화로 이혼수속중인 젊은 부부에 아이가 생겨서 "임신입니다. 축하합니다"하는 의사의 말에 "축하는 무슨 놈의 축하! 죽어라, 죽어라 하는군!"하며  얼굴을 찌푸린 부부의 입장과 그 심정도 충분히 이해는 갔다.

그 밖에도 연간 수많은 미혼모가 생기는 일, 국내·외에 양부모를 찾아가는 입양아 등 모두가 축복받지 못한 아이들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피임의 필요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원치 않은 아이를 갖지 말아야 하는 것은 물론 순결 교육이 필요하다. 성생활의 순결이 요구된다.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는 만전을 기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불필요한 아이의 출생을 막으려면 사전에 피임으로 막아야 하는데 이것도 가족계획이다.

아무리 아이를 많이 낳기 원해도 낳아서 남에게 피해가 되는 아이는 곤란하다. 이왕 세상에 나왔으면 남에게나 사회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1당 1000의 인물이면 물론 더 말할 나위 없겠으나 적어도 1당 10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제 몸 하나도 제 구실 못하는 사람은 낳아서 무엇 하는가 싶다. 최소한 제 몫이라도 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인구는 많이 요구되지만, 인구의 질이 필요하다. 자질이 좋은 인구가 필요하다. 이것도 가족계획의 일면이다.

출산의 감소와 증가에서도 원치 않은 아이의 감소에도 산아의 축복이나 가정의 행복에도 가족계획의 힘은 역시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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