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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열린마음과 큰귀-고명인 산부인과 전문의

[인터뷰]열린마음과 큰귀-고명인 산부인과 전문의

  • 김인혜 기자 kmatimes@kma.org
  • 승인 2001.02.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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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고 싶었습니다

여느 여의사의 직함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이는 산부인과 의사 고명인. 그렇지만 산부인과 의사, 올해의 레지던트, 늦깎이 의대생, 주부, MBC아나운서, 국제그룹 여직원, 성균관대학교 사회대 수석졸업.

이렇게 시간을 거꾸로 열거해 놓으면 여느 의사와는 다른 그녀만의 삶의 자취가 드러난다.
“사회에서 `여자이기 때문에' 라는 벽에 부딪칠 때마다 실망하고 `다른 현실은 안 그렇겠지…'하는 기대를 가졌어요. 그러나 회피한 현실은 어느곳이나 마찬가지더군요. 진보적인 집단이라고 생각했던 방송국도 여기자 채용은 하지 않았구요. 오기로 아나운서에 지원해 합격했지만 그곳도 마찬가지로 여자에게 동등한 기회를 제공하진 않았어요. MBC 아나운서를 그만두고 결혼이라는 다른 세계를 만났지만 주부라는 정체된 현실에 안주하기 싫었습니다. 더구나 결혼한 여성이 할 수 있는 일은 완전히 봉쇄돼 아무것도 없었죠. 그래서 찾은 곳이 전문자격을 갖춘 의사라는 세계였습니다.”

사회적 지위와 안정이 보장된 길을 버리고 인생의 가보지 않은 길을 간다는 것은 쉽지 않다. 게다가 사회의 모순에 저항하려는 용기는 현실의 안이함에 주저하려는 족쇄를 푸는 것 만큼이나 버겁다. 이 때문에 의사 고명인은 21세기 성공여성이라기보다 `용기있는 여자'라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성균관대학교 신문방송학과 79학번. 그녀의 이력서를 채운 첫 칸이다. 단과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할 만큼 성실히 공부만 했던 그녀는 처음으로 여성을 공채로 뽑은 국제그룹에 합격, 사회에 진출한다.

그러나 그녀가 처음 만난 사회는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남자와 동등하게 경쟁할 기회마저 박탈했던 사회구조였다. 그녀는 핸들을 꺾어 MBC 아나운서로 우회했지만 그리 다르지 않은 현실을 만난다. 여러번의 방향전환을 한 후 그녀는 MBC PD인 남편을 만나 결혼이라는 또다른 세계를 꾸려갔다.

어렵고 힘들었지만 잘한 선택

가보지 않은 길의 위험과 불안, 미지의 세계는 고명인에게 끊임없는 손짓을 보냈다. 그녀의 또다른 미지의 세계는 미술. 그렇지만 여느 신혼살림이 그렇듯 미술공부는 경제적으로 부담되는 분야였다. 경제라는 현실의 부담이 찾게 한 또다른 미지의 세계는 졸업후 안정적인 직업까지 보장되는 의사였다. 다시 공부를 시작하던 처음, 어렵고 힘들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잘 선택한 것 같다는 그녀.

이렇게 그녀의 미지 세계에서 자리찾기는 의대에서 시작된다. 중앙대학교 의과대학 88학번으로 이력서의 두번째 공간을 채운 그녀는 우리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같이 고민할 또래의 동기는 만나지 못했다. 나이가 많아봤자 고작 사회경험 3년인 남자학우. 출세와 성공을 목표로 의대에 진학했다는 남자학우들은 그녀와 애초부터 의대 진학동기가 달랐던 것이다.

27살 고명인 주부의 늦깎이 의대공부는 매운 값을 톡톡히 치렀다. 공부도 힘들었지만 인턴, 레지던트를 선발하는 과정에선 여자라는 이유로 특정과에서 여의사를 제외했다. 결국 그녀는 내과과정에서 산부인과로 우회해야 했다. 말없는 저항으로 의사라는 지위는 얻었지만 의사사회도 별반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멀리 돌아 의사로 제자리를 찾은 그녀. 의대공부는 늦었지만 그래도 뭔가 장점이 있지 않았을까?

'열린 마음과 큰 귀' 다짐

그녀는 주저없이 말한다. “문과를 공부했기 때문에 사회에 대한 폭넓은 시각을 키울 수 있는 점이 좋았죠. 의사는 의사라는 공동체뿐 아니라 그 공동체를 벗어나 더 큰 우리 사회라는 공동체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데 의대공부로는 그런 시각이 쉽게 길러지지 않는 것 같아요”라고 말하는 그녀.

그녀는 의사로 세상에 태어난 값을 `열린 마음과 큰 귀'의 마음자세로 치르려 한다. “필수적인 지식은 혼자서도 얻을 수 있지만 주위환경과 환자에 대한 애정과 관심은 혼자서는 쉽게 가질 수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환자에게 친절히 대화하며 `매일 한번 더 환자들에게 웃자'라는 올해의 목표를 세웠어요.” 삶에 작은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이루는 것 자체가 고명인의 성공방식이다.

이런 저런 얘기보따리를 잘 풀어놓아 처음 보는 기자에게도 자신의 생각까지 자연스럽게 펼쳐보이는 그녀. 아직 경험이 없다며 겸손해 하는 고명인씨는 여자로 살면서 겪었던 불합리한 점들에 대해 우리 사회의 여성, 남성들과 공감할 수 있는 통로를 마련할 필요를 느껴 출간을 결심했단다.

그 통로가 바로 `나도 세상에 태어난 값을 하고 싶다'라는 책. 얼핏 책 제목만 보면 그녀가 마치 21세기형 성공사례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녀의 삶을 들여다 보니 작은 삶에 충실해 온 그녀의 모습과 가치관이 그녀가 세상에 태어난 값을 멋지게 포장했을 뿐이라는 것을 알게된다.

“결혼이 늘 행복만 있는건 아니잖아요. 어려울 때도 있지만 그만큼 어려움을 겪으면서 인생을 배우는 거죠.” 고통자체도 삶을 더욱 성숙케 하는 소중한 기회라고 말하는 고명인씨. 그녀의 삶을 더욱 풍성하게 도운 남편은 어떤 사람일까.

“제가 재수하던 시절 남편이 도시락을 싸 주었다는 잡지기사로 사람들은 남편의 외조에만 매우 놀라워 하죠. 여자에게는 당연시되는 일이 남자가 했다는 이유로 이례적인 평가를 받는 것은 아직도 남녀의 역할분담을 왜곡되게 상각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저는 소위 남편의 외조보다는 남편이 남성이라는 기득권을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로 생각하지 않고 그 권리에 대해 고민하며 자기반성하는 모습이 좋았어요. 다툼이 아주 없진 않았지만 남녀차별이나 부당한 여성차별등 기존 질서에 길들여지지 않으려고 합리적으로 사고하는 의식적인 노력이 좋았죠.”

여유 생기면 그림 그릴까…

경제라는 부담으로 잠시 접어두었던 미술, 이제 그녀에게 더 풍성한 의미를 주지 않을까? 그녀는 여유만 생기면 그릴 결심으로 신혼초에 구입했던 화구들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 산부인과 전문의가 되자 이제는 그림 그리는 것 자체에 자신을 잃었다고 한다. 아니 매일 새롭게 발전하는 의학이 그녀를 그림에 몰두하지 못하게 유혹하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화구 위엔 시간의 먼지만 쌓여간다. 환자와 상담할 때가 즐겁다며 일상을 즐기며 사는 고명인. 언제 고명인 습작전시회가 열리면 본인인 줄 알아달라는 그녀. 그녀의 일상의 흔적이 의협신보에 실리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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