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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2024-03-29 06:00 (금)
백낙조 인제학원 설립자 조사
백낙조 인제학원 설립자 조사
  • 송성철 기자 songster@kma.org
  • 승인 2000.02.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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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낙조 이사장 영전에 올립니다.

지난 1월 28일의 돌연한 비보는 우리 인제가족 모두에게 놀라움과 슬픔을 안겨 주었습니다. 한달 전 본인과의 전화 통화에서도 목소리가 약간 가쁘기는 하였지만 비교적 건강한 편이었고, 일산백병원의 성공적인 개원과 기타 재단 운영 전반에 관해 "형님 정말 수고가 많다"고 치하의 말을 해 주었는데, 그것이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이 될 줄은 정말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낙조 아우님!
우리의 만남은 지금으로부터 61년 전인 1939년 내가 고향 정주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서울 휘문중학에 입학하게 되어 서울에 올라오게 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살던 집은 가회동 1번지 31호의 대지 200평이 훨씬 넘고 연건평 100평도 더 되는 벽돌 건물로서 대문에 들어서면 서재 겸 응접실이 이층으로 우뚝 솟아 있고 나머지는 단층으로 된 멋있는 집이었습니다.

재동과 가회동 골목에서 삼청공원을 향하여 경사로를 올라가다 보면 제일 끝에 위치하고 있어서 걸어서 올라가기는 조금 힘들지만 일단 올라가면 서울시내가 한눈에 다 보이는 전망 좋은 집이었지요.

지금도 변함없이 아침마다 삼청공원으로 아침 운동을 떠나는데 가회동에서 삼청동 쪽으로 넘어가는 오른쪽의 마지막 집을 지나갈 때마다, 60여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집의 형태도 바뀌고 주인도 몇 번 바뀐 그 집을 보며 과거를 회상하곤 합니다.

나보다 8년 아래인 아우님은 그 당시 아직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이었고, 5년 아래인 향주가 경운동의 사범학교 부속 소학교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아버님은 서울대 의대의 전신인 경성의전 외과 주임교수로 재직하고 계셨고 외과의사로서 전성기였다고 생각됩니다. 밤이건 일요이건 수시로 응급 수술을 위하여 나가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우님!
아버님은 일제 식민지하에서 선각자요 애국자였고 우리나라 외과학계의 개척자였습니다. 무엇보다도 미국의 철강재벌인 카네기가 미국 최초의 공익재단을 만들어 오늘날 미국 자본주의의 번창을 가져온 기초를 다진 것같이 백인제 박사께서는 일제시대에 모아두신 전 재산을 아낌없이 기부하여 해방 후 우리나라 최초의 공익법인을 창립하시어 아직은 성장기에 있지만 21세기 민족의 대학, 세계의 대학을 지향하는 오늘날의 인제대학교와 백병원의 토대를 만들어 주신 위대한 분입니다. 지난 해 1월 백인제 박사 탄신 100주년 사업을 준비하면서 창립자의 위대함을 다시 한 번 발견하였습니다.

백병원 중흥에서 시작하여 1979년 인제대학의 설립 및 개교, 부산백병원 개원, 83년 김해캠퍼스 확장, 89년 상계백병원 개원, 98년 어려운 IMF 시대의 일산백병원 착공부터 99년 12월 성공적인 개원에 이르기까지 이사장으로서 아우님의 전폭적인 이해와 뒷받침이 있어서 큰 힘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특히 서울백병원 건축과정이 가장 어려웠다고 생각됩니다. 1970년 아우님이 귀국 당시 서울백병원은 골조 건설 중이었다고 기억됩니다. 당시 서울백병원 신축은 절대적인 과제였습니다. 50년대 말에서 60년대에 걸쳐 국립의료원, 성모병원, 신촌 세브란스 병원 등 대부분의 큰 병원들이 현대적 건물을 완공하였습니다.

낡은 목조건물에 의지하고 있던 백병원은 생존 자체도 불가능하였습니다. 그래서 최경진 이사장님 주도하의 이사회에서 만장일치로 현대식 건물 신축을 의결하였습니다만 재원이 부족하여 그 당시의 상황으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앉아서 죽음을 기다딜 수는 없었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1969년 현재의 서울백병원을 착공하여 7년이라는 오랜 시간이 걸려 1975년에야 13층 500병상 건물을 완공하였지요. 아우님은 70년에 귀국하여 이러한 타당성을 이해하는데 시간이 걸렸지만 결국은 이를 이해하고 밀어주어 큰 힘이 되었습니다.

나와 아우님이 함께 설립한 인제대학교는 89년 종합대학으로 승격되면서 Hardware 및 Software 양면에서 착실하게 전진하여 인덕제세의 건학이념과 교훈인 정직, 성실, 근면의 실천, 자연보호, 생명존중, 인간사랑의 구체적 교육목표를 가지고 창의적 인간, 도덕적 인간, 실천적 인간을 만들어보고자 교수, 학생, 직원 그리고 학부모까지 한마음 한 뜻으로 노력하여 급속도로 면학분위기와 연구열이 고조되고 있습니다.

특별히 지난 해 인제인성대상을 제정하여 12월에 제1회 시상식을 성공적으로 마치게 됨으로써 우리 사회의 도덕성 회복에 일조하게 된 것은 인제대학교가 정신적으로도 크게 성숙하게 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재단의 이사장으로서, 백병원의 창립자 백인제 박사님의 장남으로서 아우님이 가지고 있었던 깊은 사명감이 있었기 때문에 아우님과 나의 아름다운 협력을 통해 이 모든 일들을 이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학교법인 인제학원 이사회가 만장일치로 본인과 아우님을 학교법인 인제학원의 공동 설립자로 확인해 준 것 아니겠습니까?

아우님은 엄격하면서도 자상하신 부모님 슬하에서 곱게 자랐고, 그 성품이 본래 착하고 다방면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특히 어학에 특별한 재능이 있어서 일어, 영어, 독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였으며, 80년대 중반 본인이 대한병원협회장 및 국제병원연맹 운영 이사로 활동할 당시 영어 연설문의 마지막 교정은 늘 아우님 몫이었지요.

본인이 의사가 되고 백병원에서 몸을 바쳐 일하게 된 것, 그리고 아우님과 만나 손잡고 합심하여 백병원의 중흥을 위해 노력하고, 인제대학교를 설립 및 개교하여 오늘날에 이르게 된 것은 어른의 큰 뜻을 구현하기 위한 과정이었고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본인은 먼저 떠난 아우님의 영전에서 이 생명이 다할 때까지 변함없이 창립자의 큰 뜻을 받들고 하나님의 뜻 가운데 학교법인 인제학원의 운영을 위해 몸을 바칠 것을 다짐합니다. 또한 후견인으로써 아우님의 남은 가족들을 따뜻하게 보살펴 그들의 뜻한 바를 펴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이제 남은 가족들에 대한 걱정은 조금도 말고, 다만 10년 가까운 아우님의 투병생활에서 아우님의 굳건한 투병의지를 지켜준 계수씨 하네로레 여사의 헌신적인 노력을 꼭 기억하면서 하나님 곁에서 안주하기를 빕니다.

2000년 2월 8일
인제대학교 총장 백낙환(白樂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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