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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는 직업이 아니라 천직이다
의사는 직업이 아니라 천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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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6.03.26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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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용복 회원(가톨릭의대 명예교수)

<고용복 회원>

이름

고용복(65)

소속

가톨릭의대 명예교수(의정부성모병원 외과)

경력

1966

가톨릭의대 졸업

 

1977~1979

뉴욕대학 메디컬 센터 외과 수련

 

1992~1998

강남성모병원 외과장

 

1999~2003

대한이식학회 이사장

 

1999~2006

가톨릭중앙의료원 장기이식센터소장

 

2003~2005

국제범외과학회장

 

2006.3~

의정부성모병원 외과

 

선우경식 회원(서울 영등포·요셉의원장)
"1년 365일을 늘 환자와 함께하는 의사"
고용복 교수님는 저와는 의대 시절부터 절친하게 알고 지내온 선후배 사이입니다. 하지만 꼭 알고 지내는 사이이기 이전에, 동료 의사로서 제가 보고 배워야 할 점이 많은 사람입니다.
무엇보다 환자들을 대하는 태도나 의사로서의 자세 등이 어느 누구보다 훌륭한 사람이지요. 1년 365일 24시간에 걸쳐 한 순간도 머릿속에서 환자 생각을 지우는 적이 없을 정도로 유난히 환자들에 대한 애정과 열정이 큰 사람입니다. 오죽 그 정성이 대단하면 주말이나 공휴일에도 개의치 않고 병원을 나가서 환자 곁에서 살 정도니까요.
그런 모습을 뵙노라면 고 교수님은 아마도 의사를 직업으로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천직이자 사명이라고 생각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요즘처럼 뜻과 행동이 따로따로인 시대에 진정으로 소명의식에서 자신의 할 본분을 지켜나가는 분이라고 할까요?
또 신앙심도 깊고 매사에 열심이셔서 의과대학 학생시절에 활동이 지지부진했던 가톨릭 학생회를 부흥시키는데 애를 많이 쓰셨죠. 덕분에 저도 함께 부지런히 일했던 기억이 납니다.
요셉의원 초창기부터 형수님과 함께 봉사활동을 자주 다니러오셨는데, 요즘도 종종 뵙고 있습니다. 고 교수님은 학문이면 학문, 임상이면 임상, 성품이면 성품 어느 것 하나 버릴 것 없는 존경하고픈 선배입니다.

 1969년 3월 25일 화요일 오후. 지금으로부터 37년전의 이야기다. 명동성모병원의 굳게 닫힌 수술실 문은 여간해서 열릴 줄을 모른다. 무영등이 켜진 환한 수술실 안에는 수술 보조에 나선 젊은 전공의들의 분주한 발걸음과 굳은 표정을 한 스텝들의 긴장된 손놀림 뿐. 집도의의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이 바닥에라도 닿는 날이면 팽팽하게 당겨진 고무줄이라도 끊어질 것 같은 분위기다. 그렇게 수 시간이 흘렀을까. 국내 최초의 신장이식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고국 땅에서 수술하겠다며 비행기에서 내릴 때만 해도 숨 쉬기 어려워서 누울 수조차 없었던 환자는 생명을 건질 수 있었다.

정확했다. 고용복 교수는 전공의로서 국내 최초의 신장이식수술에 참여한 당시의 일에 대해 오늘 점심에 먹은 반찬을 얘기하듯 칼날같이 예리한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환자의 상태며, 수술 진행과정이며, 하다못해 40여년이 지난 지금에조차 생각만으로도 북받쳐오는 당시의 감정 따위에 대해 말이다.

그런 고 교수가 지난해 10월에는 신장이식 수술 1500례 시행이란 대기록을 세우기에 이른다. 국내에서 '신장이식'하면 첫 번째로 떠오를만한 의사가 된 것이다. 하지만 오늘의 그가 있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다.

"이식 술기 연습한다고 쥐를 참 많이 잡았죠. 제가 잡았던 쥐만해도 아마 2000마리는 족히 넘을 걸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실험에 몰두하다가 당시 병원 앞 중국집에서 고량주 한 잔을 입안에 털어넣는 맛이란……."

첫 신장 이식 수술 환자가 하룻밤에 2만리터가 넘는 소변을 쏟는 바람에 곁에서 밤샘을 했다던 고 교수는 지금까지도 환자를 돌보기 위해서라면 밤이든 쉬는 날이든 마다하지 않는다.

"의사라면 누구나 그렇겠지만, 대동맥 수술이나 이식 수술 등 규모가 크고 어려운 수술을 주로 하다보니 특히 환자들을 곁에서 잘 지켜봐야 합니다. 사실 워낙 젊었을 때부터 환자들 옆에만 매달려서 지내다시피 해서 그런지, 쉬는 날 혼자 우두커니 앉아 있으면 병원에 두고 온 환자들이 궁금해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요."

이렇게 하루가 멀다하고 환자들을 가까이에서 돌보다보니 환자와 보호자들이 그를 따르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동안 수많은 환자들을 본 만큼, 그를 따르는 환자가 많아서 이제는 제법 유명인사가 됐을 정도다. 이제는 지하철을 타도 저 멀리서 그를 알아보고 악수를 청하며 인사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자신이 수술했던 사람이 건강해져서 자신을 보고 고마워하는 것을 보는 만큼 뿌듯하고 즐거운 일은 없다고.

하지만 학문과 환자에 대한 애착과 열정이 강한 고 교수도 자신의 힘으로 어찌하기 어려운 게 있다. 이식이 이루어지려면 기본적으로 공여자가 있어야 하는데, 국내 현실에서 1년에 4000여명 씩 이식을 필요로 하는 환자가 늘어나는데 비해, 공여자는 매년 1000명 내외로 한정돼 있기 때문.

"미국 통계에 따르면 뇌사자의 10%만이 장기 이식을 한다고 해요. 모르긴 몰라도 한국은 그보다 덜하지 않을까요. 오히려 핵가족화되면서 이제는 형제끼리도 이식을 하기 힘든 상황이에요. 가끔 중환자실에 찾아가 보호자에게 이식을 권하면 불난 집에 휘발유 붓나며 따귀를 맞기 일쑤죠. 그래도 요즘은 과거보다 장기이식에 대한 인식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앞으로 더 노력해야죠. 국가에서도 적극적으로 장기이식을 홍보해야 하고요."

환자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은 수술을 통해 수많은 환자들에게 생명을 찾아주는 일을 하고 있지만, 한 때 훌륭한 외과의사이면서 자신의 건강을 어찌하지 못할 정도로 심각한 환자였던 적이 있다.

"1981년 잠수교에서 차를 타고 가다가 큰 교통사고를 당했어요. 사경을 헤매고 있었을 때 동료들과 선후배들이 두 번에 걸쳐 대수술을 해줬죠. 그 뿐 아니라, 당시 입원했던 병실 옆에 김수환 추기경의 방이 있어서 거의 매일 김 추기경이 저를 위해 기도해주셨어요. 나중에 여쭤보니 촉망받는 젊은 의사가 뜻을 펼쳐보지 못한채 가버리는 게 안타까우셨다고 하시더군요. 하여간 저는 하나님과 주변의 좋은 사람들 덕분에 지금 이렇게 건강하게 살고 있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라도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면서 살려고 해요."

"그저 평생을 착실하게 살고자 했다"는 고 교수는 지난 2월 말로 가톨릭의대에서 퇴임하고, 3월부터는 가톨릭의대 명예교수로서 의정부성모병원에서 근무하고 있다. 이제 고 교수는 평생을 바쳐온 의업을 완성하기 위해 봉사활동에 적극 나설 작정이다. 오래전부터 요셉의원 등 자선병원이나 무료 진료소에서 부인과 함께 봉사활동을 벌여왔던 그는 죽는 날까지 자신이 할 수 있는 봉사활동을 하고 싶다는 소망을 털어놓았다.

"6·25 동란때 10살의 어린 나이였습니다. 당시엔 병이 나거나 사고를 당해 죽는 사람이 참 많았는데, 어린 나이에 그 모습을 보며 '나는 꼭 의사가 되어서 어려운 사람을 돕겠다'고 마음 먹었죠. 그리고는 정말 의사가 되어 40여년간 환자를 돌보았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 의사를 한다는 생각은 결코 한 적이 없어요. 시간이 많이 흘러 이제는 백발의 노인이 되었지만, 10살 꼬마였던 그대로의 마음가짐으로 살려 합니다. 후배들에게도 이야기해주고 싶어요. 항상 의사로서 배우는 자세를 갖고 매순간 최선을 다하라고요. 의사는 직업이기 이전에 천직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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