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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2024-03-28 17:57 (목)
아쉬움은 있지만, 후회는 없습니다!
아쉬움은 있지만, 후회는 없습니다!
  • 조명덕 기자 mdcho@kma.org
  • 승인 2006.03.02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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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대 박용현 교수

2월 28일 정년을 3년이나 남기고 서울의대에서 명예퇴직한 박용현 교수(외과학)는 외과의사로 대성하고 싶었으나, 스스로 '반쪽 외과의사'로 칭했듯이 1993년부터 시작된 서울대병원 보직이 예상외로(?) 길어져 큰 외과의사가 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을 감추지 않았다.

그러나 박 교수는 보직을 통해 발휘한 경영능력으로, CEO로서는 대성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또 다른 아쉬움은 현재 의료계가 걱정스러운 부분이 많은데, 물론 해결할 능력은 없지만 의업을 유지하기 조차 점점 어려워지는 의료계를 지금 떠나게 됐다는 것입니다. 개원가와 중소병원이 의료계의 저변에서 활발히 움직이고 이를 바탕으로 대학병원이 제 역할을 해야 하는 의료전달체계의 문제를 풀지 못하고 나오게 돼 아쉽습니다."

10년전 쯤만 해도 고등학생들에게 의과대학 진학을 권하겠느냐고 물어오면 강력히 추천했으나 지금은 고생만하고 미래가 불투명해 그럴 수 없을 것이라는 박 교수는 이런 현실이 걱정스럽고, 의료계에서 해야 할 몫이 없어져 섭섭하다는 심정을 피력했다.

 

▲ 박용현 서울의대 교수

 "명예퇴직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 궁금해 하는 분들이 많은 것 같은데, 한마디로 말하면 후배들에게 미안했기 때문입니다. 11년이나 병원 보직을 맡다보니 의사로서, 교수로서의 역할에 소홀해 질 수 밖에 없었고 보직이 끝나고 진료실과 강의실로 돌아왔지만 사실 진료도 강의도 겁이 났습니다. 연구에 필요한 창의력도 없어진 것 같았구요."

진료와 교육과 연구, 모든 면에서 '잘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 박 교수는 마침내 '더 이상 있을 수 없는 자리를 후배에게 물려주자'는 용단을 내렸다.

"또 두산그룹에서도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현재도 두산그룹의 연강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기는 하지만 아마도 또 다른 역할이 주어질 것 같습니다. 그 역할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아직 모르지만요. 항간에 회장으로 간다는 소문도 돌았던 것으로 아는데 그건 아니구요."

두산그룹에서 병원을 새로 짓기 위해 박 교수를 필요로 하는 것이라는 소문에 대해서도, 현재 투자대비 효과가 가장 낮은 곳이 병원인데 적어도 5000억원 이상이 투입되는 병원 사업에 그룹이 발을 들여놓지 않을 것이라고 일축했다.

"두산그룹이 최근 실추된 이미지를 회복하고, 지금까지 소홀했던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창구로 연강재단을 활용할 것으로 보입니다. 아울러 40년동안 대학에서 봉사했으니, 다른 분야에서도 봉사활동을 해야 할 것 같구요."

박교수는 이어 "명예퇴직을 단행한 또 다른 이유는, 의료계내에서 의료계를 돕는 일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오히려 의료계 밖에서 의료계를 지원하는 것이 더 다양한 방법을 동원할 수 있고, 더 효율적일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고 덧붙였다.

1993년 기획조정실장으로 서울대병원 보직을 시작한 박 교수는 제2진료부원장(1995~1997년)과 진료부원장(1997~1998년)을 거쳐 1998년부터 2004년까지 두번의 임기동안 원장직을 수행하며 많은 업적을 이뤘다.

"1998년 IMF라는 국가 사회적 위기에서 중책을 맡았는데, 당시 의료계는 환자수 감소·병의원 도산 등 사상 최악의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병원 내부적으로도 권위주의·불친절·무소신 등 바람직하지 못한 관료주의적 조직풍토로 인해 경영의 효율성은 저하되고 현실에 안주하려는 소위 '대기업병'이 만연한 실정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박 교수는 서울대병원이 제2의 도약을 할 수 있는 토대를 굳건히 다지기 시작했다.

취임 직후인 1999년 1월 병원이념과 행동지침을 새롭게 정립하기 위해, '국민과 함께 하는 21세기 초일류 병원'을 슬로건으로, '깨끗하고 밝고 부드러운 병원'으로 거듭날 것을 대내외에 천명하는 '비전 21'을 선포한 박 교수는 이를 통해 새롭고 미래지향적인 병원문화를 정립함으로써 병원 발전의 계기를 마련한 것을 가장 보람있는 일로 꼽았다. 이같은 노력이 지난해 보건복지부가 시행한 병원평가에서 서울대병원이 1위를 차지하는 밑거름이 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소프트웨어적으로는 20년전부터 시작된 정보화사업을 마무리한 것, 하드웨어적으로도 분당서울대병원이 개원해 성공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것이 병원을 떠나는 지금 자랑스런 기억으로 남는 것 같습니다. 또 강남건진센터도 초기 반대와 회의론이 있었으나 지난해 흑자로 돌아서며 제 역할을 다하고 있어, 어린이병원과 임상의학연구소 운영으로 빚어지는 만성적자의 일부를 보충하는 재원으로 사용하고 있는 만큼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봅니다."

박 교수는 서울대병원이 추진해 온 의료정보시스템(MIS)·의료영상저장전달시스템(PACS)·전자행정시스템에 이어 전자의무기록시스템(EMR) 등 첨단 의료정보화 사업을 완결하는 한편 분당서울대병원과 강남건진센터를 성공적으로 정착시켜 본원·임상의학연구소·어린이병원·보라매병원과 더불어 이상적인 메디컬센터로서 완전한 모습을 갖추는 등 의료환경의 대전환점에서 최고병원으로서 서울대병원의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능력을 발휘했다.

한편 박 교수는 보직을 맡기 전에는 진료와 학술 분야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벌여왔다. 1979년부터 3년간 미국 하버드의대 브리감앤위먼스병원에서 담석에 관한 연구를 하고 귀국한 후 20여년간 줄곧 담석에 대한 연구와 치료를 병행하며, 한국인에서 담석의 발생 원인과 역학적 특성 등에 관한 연구에서 독보적인 족적을 남기기도 했다.

치료에 있어서도 최근 10여년간 복강경담낭절제술에 전념해 합병증이 거의 없는 안전한 수술로 자리잡도록 하는데 크게 기여했으며 한국간담도췌장외과학회를 창립하고, 아시아간담췌외과학회를 국내에 유치하는 등 국내 의료수준을 향상시키는데도 중추적 역할을 해왔다.

1943년 서울시 종로구 연지동 현재 연강재단 건물 자리에서 출생한 박 교수는 1968년 서울의대를 졸업하고 1976년 모교 외과학교실 교수로 부임했다.

제8차 아태소화기병학회 조직위원장(1984~1988년)과 제3차 아시아간담췌외과학회 조직위원회 사무총장(1993~1995년)으로 활동했으며, 대한외과학회 이사장(1996~1998년)·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이사(1999~2003년)·대한소화기학회 회장(2000~2001년)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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