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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풀 수 있다는 건 축복"
"베풀 수 있다는 건 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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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5.10.06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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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예수병원 외과 유봉옥 과장

전주 예수병원에서 의료인으로서의 첫발을 내디딘 유봉옥 과장은 생활이 어려워 의료혜택을 누리기 어려운 전북의 산간벽지를 오가며 무료진료를 시작했고, 1984년에는 예수병원 의료선교회장을 역임하면서 무료진료 사업을 더욱 확장해 나갔다.

농촌 의료 취약지와 영세민 지역에서부터 조선족들이 기거하는 중국 연변과 소외되고 가난한 나라 방글라데시를 오가던 그의 시선은 이제 북한을 향한다. "베풂으로 인해 얻는 행복이 더 크다"며, 친근한 미소를 담고 봉사의 발걸음을 재촉한다.

 

유봉옥 과장

■ 배운 대로 실천하다

1974년 연세대 의대를 졸업한 농촌 출신의 의사 유봉옥 과장은 대학시절부터 선교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품어왔다. 유 과장은 그 막연한 동경을 구체화시킬 수 있었던 것은 스승 설대위 박사(David John Seel)와의 만남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G선상의 아리아를 연주하는 바이얼리니스트이자 감상적인 문필가였던 설대위 박사는 유 과장의 젊은 가슴을 순수한 꿈으로 가득 차게 했다.

"훌쩍 큰 키에 단정히 빗어 넘긴 머리. 이지적인 푸른 눈을 가진 그 분을 예수병원 인턴 면접 때 처음 만났지요. 화상치료에 대한 걸 물으셨는데, 더듬거리며 답을 못하고 있을 때 해주신 말씀이 있어요. 항상 준비된 의사만이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

기술만 좋다고, 혹은 품성만 좋다고 해서 좋은 의사가 될 수 없고 그 두 가지에 성실이라는 감미료가 첨가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완전한 의사가 될 수 있다고 한 스승의 말에는 신앙과도 같은 믿음이 있었다.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타지에서 삼십여 년 동안 몸소 보여준 봉사정신은 유 과장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스승과의 만남을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인연이라고 믿으며, 유 과장은 소외되고 낙후된 지역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주로 수요일 저녁을 이용해 자원봉사자들과 병원 가족들을 모아 농촌으로 향한다. 한쪽 벽 달력에 빼곡히 채워진 봉사 일정이 다소 버겁기도 하지만, 이제는 생활의 일부처럼 되어버린 일이다.

"무료진료를 하게 되면 유방암이나 갑상선 등이 꽤 많아요. 초음파 검사 같은, 조기 진단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을 많이 하려고 하지요. 농촌 사람들은 정기 검진이라는 개념도 없고…. 경제적으로 부담이 클 때에는 사유서를 써주거나 다른 단체와 연계해서 도와주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뭐 봉사라고 할 것까지야 있나…. 그냥 배운 대로 실천하는 겁니다."

상추나 호박 등을 주섬주섬 꺼내어 내놓는 농촌 사람들을 볼 때 이게 바로 사는 맛이구나, 감탄하고 훈훈한 인정을 느낀다. 흙이 있는 농촌은 사람의, 그리고 마음의 고향이라는 말이다. 의식과 마음이 이토록 건강할진대, 건강해 보이는 모습에는 확실한 그만의 비결이 있었던 모양이다.

 

■ 방글라데시에서의 선교, 그리고

유 과장은 해외 의료 봉사에도 애정을 베풀어 1991년에는 약 4개월간 방글라데시 퉁기 지역에서 열악한 환경 아래 풍토병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위해 인술을 펼쳤다.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일은 그리스도인의 당연한 의무로서 운명적인 의미가 있으며 그 일을 하지 않으면 오히려 화를 당한다는 말씀을 가슴에 간직하고 있던 중이었다. 선교사명이라는 말을 다소 추상적인 것으로 여기고 있더라도 하나하나 실행해나가는 중요성을 알고 있던 차였다. 7개 기독병원 해외선교연합(KOMMS)에서 방글라데시에서 일할 단기의료선교사를 구한다는 소식과 함께 자원해보지 않겠느냐는 목사님의 권유를 받았다.

가난하고 질병이 많으며 손으로 밥을 먹는다는 지엽적인 지식밖에는 없었지만, 세계 4대 빈국 중 하나로 열대지방이라 사람 살 곳이 못 된다는 말도 들어봤지만 애처로운 그곳 방글라데시에 가고 싶다는 막연한 충동에 선뜻 가겠다고 대답했다. 농촌 선교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이방지역까지 챙기는 일이 어쩐지 사치스럽다고 여기고 있던 터였지만, 소외되고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의 손길이 필요하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간호사로 오랫동안 근무해온 아내가 오히려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며 동행을 원했죠. 아이들은 장모님이 선교에 동참하는 마음으로 맡아 주셨어요. 가족들 모두 선교에는 뜻이 있어서 큰 어려움은 없었어요. 방글라데시에서의 선교는 매우 고귀한 경험이었지요."

영국의 식민지 정책 아래 자원은 고갈되고 경제 상황은 피폐되어, 빈부의 차도 심했고 인구의 80%가 하루에 한 끼로 연명하고 있었다. 문맹률 85%, 평균수명은 45세. 어느 교포가 표현한 대로 '인위적으로 저주 받은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나라였다.

유 과장이 일하던 곳은 1975년 닥터 카딩톤이 세운 진료소로, 카딩톤 박사는 우리나라에서도 광주기독병원을 설립하고 25년간 헌신한 바 있다고 한다. 하루 200여명의 외래환자가 겨우 세 명의 현지의사에게서 치료 받고 있는 그 곳은 한국 농촌의 보건 진료소와 다를 바 없었다.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았던 4개월간의 외지 생활. 상처를 어루만지면 씻겨준 아내는 심한 눈병으로 곤욕을 치렀고, 유 과장 역시 풍토열병을 앓았다.

"오히려 풍토 열병을 앓고 난 후 똑같은 증상을 호소하는 사람들을 쉽게 치료할 수 있었어요. 덕분에 간암 강의와 간염절제술을 지도하는 영광을 누렸고, 방글라데시 의사면허증을 얻을 수 있었어요.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고선 불가능한 일이었겠지만 말이죠."

그는 아직도 진료소에서 ?촌이라는 식모와 무지불이라는 경비원이 참석해 예배를 보아준 감격을 잊지 못하고 있다.

 

■ 북한이 열리면, 내가 간다

"감사패도 많이 받아 보았지만, 그런 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에요."

마음이 중요한 것이라고 말하는 유 과장의 얼굴에 행복한 미소가 번진다. 훗날 북한이 열리면 종합병원에서 첨단화된 기술을 전파하고 싶다는 포부가 더없이 당당하다. 예수병원장을 포함해 두 곳의 종합 병원장을 역임한 바 있지만, 사랑을 실천하는 내적 아름다움이 돋보인다.

"내년 즈음부터는 연변 조선족 병원에서 지내볼까 해요. 트레이닝 같은 개념이지. 이해도를 높여 문화 마찰을 줄여야지 않겠어요. 내가 가지고 있는 특수한 기술이 아직 북한에는 없을 거 같아요. 절대적 역사를 만들고 싶어요. 물론 잘 살았다는 말도 듣고 싶고요. 하하."

봉사하지 않으면 불편하고 허전한 기분이 든다는 유 과장은 행복한 삶을 나눠주고 싶어 하는 마음, 베풀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은 축복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많아질 때 더 밝은 사회가 될 것이라는 당부도 잊지 않는다.

"인터뷰에 응했던 건, 젊은 사람들에게 사는 재미가 다양하다는 걸 말해주고 싶어서였어요.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능력이 아무에게나 있는 건 아니잖아. 주는 것보다 얻는 게 더 많다고. 비단 의료봉사 뿐만이 아니에요, 좋은 글이나 좋은 음악처럼…. 남들을 덜 아프게, 행복하게 해주면서 재미를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글쓰기를 즐기는 유 과장은 마지막으로 보령의료봉사상보다도 보령수필문학상이나 달라고 농을 건네면서 웃어보였다. 우리의 아버지 같고 우리의 스승 같이 정이 넘치는 친근한 웃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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