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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퇴르의 자취를 찾아서 <中>
파스퇴르의 자취를 찾아서 <中>
  • Doctorsnews kmatimes@kma.org
  • 승인 2005.04.23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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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퇴르연구소

파스퇴르 박물관의 백미는 지하에 있는 그의 무덤이다. 생전에 이미 프랑스의 영웅이 된 파스퇴르는 정부로부터 프랑스의 위인들이 묻히는 팡테옹에 묘를 주겠다는 제안을 받았으나 이를 거절하고 자신이 만든 연구소의 한 구석에 묻히기를 희망했다.

그만큼 자신이 만든 연구소에 대한 애착이 컸던 모양이다. 집 안에 무덤이라… 다소 으스스한 느낌이 든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로 내려가면 무덤으로 들어가는 문이 나타난다. 문이 열리면 대리석으로 된 그의 관이 중앙에 놓여 있는 것이 보인다. 천정은 궁륭모양인데 모자이크화로 파스퇴르 생애의 주요 사건들을 그려놓고 있다. 상당히 화려한 무덤이다. 내가 보기에도 팡테옹의 외진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것보다는 여기 이렇게 널찍하게 자리 잡고 누워있는 것이 더 좋아 보인다.

그런데 이 무덤의 풍경이 어째 조금 낯익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필자가 본과 1학년 때 윤정구 선생님이 미생물 강의 시간 중에 보여주셨던 파르퇴르 연구소의 사진 가운데 이 무덤의 사진이 있었던 듯하다. 파스퇴르 연구소에서 오래 일하시다 귀국하신 선생님은 당신의 강의 마지막 시간에 파스퇴르 연구소의 사진들을 보여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그때만 해도 직접 이곳에 와서 박물관을 보고, 더구나 그 도서관을 들락거리며 구내식당에서 매일 밥까지 먹을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어쨌든 파스퇴르 박물관 관람은 파스퇴르의 무덤을 보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파스퇴르 박물관이 있는 건물과 길 건너 맞은편에 있는 건물이 가장 오래된 건물이기는 하지만 그 외에도 연구소 구내에는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건물이 여러 채 있다. 필자가 다니던 도서관과 식당도 이쪽에 있다.

도서관에서 식당으로 가는 길에 온실로 쓰는 건물이 하나 있는데 그 곳에서 점심시간마다 몇 사람이 모여 실내악 곡을 연습하곤 했다. 식사를 하러 가는 길에, 혹은 식당에서 돌아오는 길에 들려오는 음악소리는 딱딱한 연구소의 분위기를 한결 부드럽게 만들어주었다. 도서관 뒤쪽에는 에이즈 연구동이 있는데 에이즈 바이러스의 발견자인 뤽 몽타니에 교수가 아직도 일한다고 한다.

1980년대에 에이즈 바이러스의 발견을 둘러싸고 뤽 몽타니에 교수에 대한 일화가 있는데, 미국의 로버트 갈로 교수와 논쟁이 벌어졌다고 한다. 이 논쟁은 나중에 프랑스와 미국의 외교문제로까지 비화되었는데 결국은 몽타니에 교수의 판정승으로 일단락된 것으로 알고 있다.

이 논쟁에 관한 이야기를 처음 들은 것도 역시 미생물학 시간이었다. 그 이야기를 들려준 분은 존스 홉킨스에서 바로 그 갈로 교수에게 배우고 돌아와 당시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에이즈 바이러스를 분리해낸 이원영 선생님이었다. 그러고 보면 미생물학 강의는 내게 적지 않은 의학사 지식을 가르쳐주었던 셈이다.

에이즈 연구동 앞에는 조금 오래된 건물이 있는데 지금은 실험실로 쓰이지만 에이즈 환자가 막 생겨나던 1980년대에는 에이즈 환자의 병실로 쓰였다고 한다. 파스퇴르 연구소는 일차적으로 연구기관이지만 이처럼 환자치료를 위한 병실도 갖추고 있었고, 지금도 소규모의 감염질환전문 병원을 운영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한때는 감염질환의 치료제나 예방백신까지도 연구소 내에서 직접 생산했다. 일찍부터 치료제나 백신을 제약회사에서 상업적으로 생산한 미국과는 달리 프랑스에서는 파스퇴르 연구소에서 직접 치료제나 백신을 만들어 공급했다.

그러나 아무래도 연구소에서 만들었기 때문에 수작업으로 인한 문제점이 있었다. 반드시 그 이유 때문은 아니겠지만 초창기 파스퇴르 연구소에서 만든 BCG를 수입해 접종한 한 독일 도시에서 접종받은 아이들이 죽는 사고가 일어나기도 했다.

여기서 잠깐 파스퇴르 연구소의 역사를 살펴보자. 이미 당대에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파스퇴르는 세계 각국의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1888년 11월 14일에 파스퇴르 연구소를 설립하였다(문서상의 설립 시기는 이것보다 조금 빠른 1887년 6월 4일이다). 파스퇴르 연구소의 명성은 물론 일차적으로는 파스퇴르 자신의 위업에 근거한 것이지만 그의 뒤를 이은 학자들의 업적도 파스퇴르를 세계적인 연구기관으로 만드는 데 크게 공헌했다.

파스퇴르 연구소에서는 모두 6개의 노벨상을 받았다. 일개 사립연구기관에서, 그것도 단일 분야에서 6개의 노벨상을 받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말라리아 원충을 발견한 라베랑, 파스퇴르와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에서는 요구르트의 이름으로 더 유명한 메치니코프, 페스트의 원인균을 발견한 예셍, BCG를 만든 칼멧과 게링을 비롯하여 최근에는 오페론 이론으로 분자생물학의 토대를 마련한 자크 모노와 프랑수아 자콥에 이르기 많은 학자들이 이곳에서 훌륭한 연구업적을 남겼다.

파스퇴르 연구소는 세균연구로 시작되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그 전통을 살려 세균학 외에도 기생충이나 바이러스에 의한 감염질환, 그리고 이와 관련된 면역학을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파스퇴르 연구소는 일찍부터 해외에 분소를 설립했다. 최초의 해외분소는 파스퇴르 연구소가 설립된 지 불과 3년 후인 1891년 베트남의 사이공에 세워졌다. 이어 1893년에는 튀니지에, 1895년에는 다시 베트남의 나트랑에, 1896년에는 세네갈의 다카르에 세워졌다.

이후 계속해서 각 대륙에 파스퇴르 연구소가 설립되어 현재는 20개가 넘는 파스퇴르 분소가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다. 내년에는 우리나라에도 파스퇴르 연구소 분소가 설립된다고 한다. 초창기에 분소가 세워진 지역은 대부분 당시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곳이다. 이처럼 풍토병 연구의 역사는 식민지 경영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

더운 지방의 풍토병 연구가 주로 당시 활발하게 식민지를 경영하던 프랑스와 영국과 같은 국가들에 의해 이루어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영국에서는 'London School of Hygiene and Tropical Medicine'이 열대의학 연구에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식민지 의학과 관련하여 해외에 설립된 파스퇴르 연구소의 역할이 컸기 때문에 현재는 해외의 파스퇴르 연구소에 대해 연구하는 의사학자들도 여럿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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