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을 위한 바른 소리, 의료를 위한 곧은 소리
updated. 2024-03-29 15:21 (금)
"와인속에 진리가 있나니..."
"와인속에 진리가 있나니..."
  • 신범수 기자 shinbs@kma.org
  • 승인 2005.03.21 11:37
  • 댓글 0
  • 페이스북
  • 트위터
  • 네이버밴드
  • 카카오톡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와인 애호가 김문식 국시원장

  김원장을 만나기로 한 한남동의 모 와인바에 15분 일찍 도착했다. 실내에 들어서니 수천병의 와인이 멋지게 전시돼있는 것이 보였다.
   나무 계단을 올라 2층에 들어서자 작은 바(bar)와 고급스런 테이블들이 보였다. 그 때 종업원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어떻게 오셨어요?"

■ 어떻게 오신 와인바???

기분이 상했다. 무시하고 테이블에 앉았다. "리스트 주세요"라고 하니 불만섞인 표정으로 갖다 준다. 실내를 둘러보자 다른 종업원이 와인잔을 닦고 있는 것이 보였다. 순간, "아, 아직 오픈하지 않아서 그랬나 보다"하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후 그 종업원이 다시 다가오더니 정색을 하며 물었다. "죄송하지만 만나기로 하신 분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그렇다. 여기는 멤버십 와인바였다. 나중에 알고보니 연회비도 만만치 않았다. 곧 도착한 김원장은 "나 때문에 이곳 멤버가 된 사람들이 꽤 있지"라고 말해줬다. 그리고 기자와 안면이 있는 몇몇 분들도 이곳 회원임을 알게 됐다. 김원장은 능숙한 솜씨로 와인과 음식을 주문했고 기자는 와인에 관한 미묘하고도 신비한 세계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 김 원장의 '와인 즐기는 법'

보통 잡지나 신문 등에 기고한 와인에 대한 글을 보면, '와인은 어렵지 않다', '너무 격식차릴 것 없이 편하게 마셔라' 등의 내용이 많다. 그런 글들에 용기를 얻고, '나도 한번 와인을?'하는 사람도 많을 거다. 이런 사회 분위기 때문인지 최근 와인 인구가 급속도로 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김 원장은 이와는 조금 다른 스타일이었다.

김 원장은 기자를 만나자마자 한다발의 종이묶음을 내밀었는데, 김 원장 스스로 정리한 '와인즐기기'란 제목의 프린트물이었다. 약 40페이지 분량에, 와인 생산국들의 특징·구분법·역사·복잡한 격식 등 보통 사람들이 와인을 어렵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이유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김 원장은 "와인을 시작하려면 우선 책을 한권 사서 읽어라"고 했다. 본인은 20권의 책을 읽고서야 비로소 와인을 마시기 시작했다고 한다. 뭔가 시작하면 끝을 보며, 철저히 분석하고 치밀하게 연구하는 자세가 엿보였다. 김 원장은 10년전 와인을 처음 접하고 그 향기에 매료되어 미친듯이 책을 읽기 시작했으며, 매일 1병씩 와인을 마시면서 빠짐없이 감상문을 썼다고 한다.

■ 와인 얼마나 드세요??

주문한 와인과 작은 피자가 나왔다. 건배하는 법부터 자세히 배워가며 어렵게 한잔을 마실 수 있었다. 피자 한조각을 입에 물며 슬슬 질문을 던져보기로 했다. 먼저 "일주일에 몇 번 정도 드세요?"라는 질문으로 시작했다.

"오늘이 목요일인가? 월요일에 일식집에서 한병 마셨고, 화요일엔 와인동호회에서 한병반, 수요일엔 집에서 한병, 오늘? 오늘도 한병은 마시겠네…."

김 원장의 집에는 200여병의 와인을 비축돼 있다고 한다. 그 중엔 가장 좋은 해(년도)를 기다리기 위해 대기중인 것부터 일용할 양식으로서 준비된 비교적 싼 와인들까지 박스채로 구비돼 있다고 한다. "약속장소를 bar가 아닌 집으로 할걸…"하는 후회가 들었다.

■ 누구나 물어보는 질문

와인 애호가와의 인터뷰에는 이런 질문이 절대 빠지지 않는다. '초보자를 위한 추천 와인', '음식에 맞는 와인', 혹은 '내가 좋아하는 와인들'.

물론 기자 역시 이런 질문을 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쓸데없는 소리…"라는 핀잔 뿐이었다.

"사랑하는 연인과는 서양식도 좋겠지만, 격한 운동 뒤에는 오히려 싸구려 음식이 맛있다. 술도 소주가 어울리는 자리가 있듯이 와인도 마찬가지다.

어떤 와인이 좋다고 꼽는 건 무의미하다. 그날의 음식·멤버·경제적 상황 등을 고려해 가장 맞는 와인이 최고의 와인이다.

그래도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와인 몇 개만 알려 달라고 떼써봤다. 대답은 간단했다. "책읽고 와"

■ 와인에서 무엇을 얻는가?

괜한 질문으로 김 원장에게 유치하단 인상을 심어준 것 같아 조금은 형이상학적 질문을 던지기로 마음을 고쳐 먹었다. 그러는 사이 와인 1병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것으로 끝인가 했더니 1시간전부터 개봉해서 대기중이던 와인이 곧바로 서빙됐다. 김 원장은 와인을 잔에 1/5가량 따르고는 코로 깊이, 아주 깊이 냄새를 들이마셨다. 기자는 와인 한잔을 홀짝 마시고는, 질문을 이어갔다. "와인은 무엇입니까?".

김 원장은 잠시 생각한 후, 공식 명함이 아닌 또 다른 명함 하나를 꺼냈다. 와인동호회 명함이었다. 거기에 쓰인 문구 하나를 손으로 가리켰다. 'IN VINO, VERITAS'. '와인 속에, 진리'란 라틴어다.

"그렇다면 그 진리란 무엇입니까?"

김 원장은 "와인으로 사람을 알고, 진실을 알게 된다. 여기에 모든 인생의 진리가 있다"고 대답했다. 사실 더 길게 설명했지만, 언뜻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기자가 몽롱한 눈으로 이해 못하는 듯 쳐다보자 이내 화제는 다른 곳으로 옮겨가 버렸다.

김 원장이 추천 와인 질문에 끝내 대답하지 않았던 것처럼, '진리란 무엇인가를 자세히 설명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라는 뜻이 아닐까 했다. '산의 정상, 아니 중간에라도 도달해 있는 사람에게 한 걸음의 도움은 유용할테지만, 산자락에 머물러 있는 사람에게 정상의 의미을 알려준다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그런 의미일 것이라고 느껴졌다.  

■ 그래도 힌트는 있다

김원장과 결국 와인 2병을 비웠다. 각각 1병씩 마셨더니 13도의 알콜에도 꽤 취기가 돌았다. 자리에서 일어서자 아까 그 종업원이 이번엔 화사한 웃음을 띄며 잘가라고 말해준다.

뒤를 돌아보니 빈테이블에 빈 와인병 두개가 놓여 있었다. 결국 김 원장은 기자에게 두개의 와인 리스트를 남긴 셈이 됐다. 둘다 김 원장이 고른 것이니 어느 정도 그의 취향을 엿볼 수 있는 근거가 되지 않을까 싶다. 물론 김 원장의 스타일을 대변할 순 없을 것이다. 그 날 그 시간 그 장소에 어울렸던 와인일 뿐이니까.

그래도 기자는 참조해볼 생각이다. '초가을, 석양이 지는 시간, 처음 만나는 사람과 자신의 취미에 대해 토론하고, 그 의미를 되짚어보며 과거를 회상할 때, 그럴 때 가장 적당한 와인'이라고 적어 놓으면 되니까 말이다.

기자는 이 글을 집에서 와인 한잔하면서 썼다. 기자는 와인산(山) 산자락을 조금 지난 사람이다. 오랫만에 맛있는 와인을 마시니 기분이 좋다. 이 와인은 프랑스 보르도지역의 무통까데(mouton cadet) 2001년산이다.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