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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소설] 진정 난 몰랐네

시론 [소설] 진정 난 몰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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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5.03.19 2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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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현(필명/부산 정원태 산부인과의원)

김선혜가 폭탄주를 몇 순배 돌린 뒤였다. 소설가들의 떠들썩한 목소리에 방안의 열기가 달아오르자 장방형 노래방 모니터에서 왈츠 조의 노랫소리가 흐느적거렸다.

"그럼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한 이순례 씨의 히트곡 순서입니다."

김선혜의 사회였다. 검정 투피스에 늘씬한 몸매의 주인공이 마이크를 잡았다.

"그토록 사랑하던 그 사람 잃어버리고 타오르는 내 마음만 흐느껴 우네."

바야흐로 카타르시스에 여념이 없던 소설가들의 눈길이 패티 김을 닮은 얼굴에 알토소프라노의 음색을 내는 그녀에게 몽땅 쏠렸다. 생 머리를 뒤로 묶은 스타일, 올드 미스 풍이다.

"누군가 불러 주는 휘파람소리 행여나 찾아올까 그 님이 아니 올까 기다리는 마음 허무해라. 그토록 믿어왔던 그 사람 돌아설 줄이야 예전에는 몰랐네. 진정 난 몰랐네."

눈을 지긋이 감고 가슴 저미는 듯한 마지막 음률에 앙코르 소리가 쏟아졌다. 휘청거리며 김선혜 옆자리에 가 앉은 그녀는 자작으로 위스키 한 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곧이어 원로작가의 능숙한 '비의 탱고' 가락에 서너 쌍의 남녀 작가들이 서로를 위무하듯 몸을 실었다.

"벌써 취했어? 정신 좀 차려."

김선혜는 벌써 녹초가 돼버린 이순례를 흔들었다.

"나가자. 집에 안 들어갈 거야."

현란한 네온사인들 사이로 무늬진 실비가 두 여인의 몸을 소리 없이 적셨다. 우연히도 둘은 3년 전 독립선언 끝에 집을 뛰쳐나와 같은 해 모 잡지사를 통해 등단, 소설 하나에 젊음을 내맡겼다. 그러나 한이 많은 이순례. 오늘만큼은 김선혜와 둘이서만 새벽을 맞이하고 싶었다. 의기투합한 둘은 번화가 골목길 모텔의 3층 방으로 찾아들었다.

"선혜야내가 쓴 단편 소설하나 들려주렴?"
"언제 썼는데?"
"8년 전쯤."

그녀는 김선혜가 모텔 옆 편의점에서 사온 소주병을 자작으로 한잔 들이켠 뒤 입을 뗐다.

"작중 남 여주인공은 같은 학교 문창과에서 밤낮없이 붙어 다니던 동급생이었어. 여자는 졸업을 일 년 앞두고 혼담이 오고갔고,남자는 불투명한 장래에 집안 사정마저 암울해 서로의 장래를 약속 못할 처지였거든. 남자는 졸업을 7개월 앞두고 종적을 감춰 버렸어. 여자는 수소문 끝에 남자가 강원도 어느 암자에 칩거 중임을 알아냈어. 구레나룻이 뒤덮인 얼굴에 학교 앞 카페에서 마지막 보았던 점퍼차림 그대로. 스님의 말을 좇아 그를 찾아 암자로 가는 산 중턱에서 낯익은 점퍼차림을 발견한 거야. 발부리엔 이미 캐낸 도라지가 수북이 쌓여 있었고. 여자는 울컥 치미는 연민으로 눈물을 쏟았어. 그까짓 소설이 뭐기에. 첩첩 산중에 몸을 감추고 있다니. 며칠을 묵고 헤어지려는 여자에게 일주문 밖에서 그가 줄 수 있는 건 파리한 두 손으로 내민 1,200여 매의 장편 소설 원고뭉치였어. 그는 구부정한 어깨를 움츠리며 뒤도 안 돌아본 채 암자 쪽으로 모습을 감춰버렸어. 남자는 중증 결핵환자였던 거야."

둘이 피어대는 담배 연기가 몽롱한 꿈길처럼 자욱해졌다.

"집에 기어들어 죽치고 달포가 지난 뒤였어. 여자는 맞선을 보았고, 결혼식을 보름 앞둔 날, 산에서 만들어온 애를 감쪽같이 지워버렸던 거야. 허물어져 가는 그에게 임신한 사실을 알릴 순 없었어. 그리고 신혼여행을 겸해 남편의 근무지, 종합상사 지점이 있는 미국 시애틀로 떠났는데, 여자는 비행기 안에서부터 계속 토사물을 쏟아내는 거야. 신랑은 멀미 때문이겠거니 생각하고 승무원에게서 진정제를 얻어 먹였지만, 시애틀 아파트에 도착 후엔 오히려 노란 쓸개 물마저 토해내는 거야. 결국 병원에 갔는데."

"수술이 잘못된 거야?"
"아냐. 깨끗이 애를 뗐어."
"그럼 뭐야?"
"신부는 미국 여의사에게 허니문 중이라고 말했지만 웃으면서 모니터에 비친 태아의 심박동 파장을 가리키며, '컨그레츄레이션! 컨그레츄레이션!'을 연발하지 않겠어! 내 기가 차서 원."

드디어 화자의 벽이 무너져 작가의 목소리만 분노로 바뀌었다. 그런 그녀를 김선혜는 빤히 바라보았다.

"미국 여의사는 생글거리며 신랑을 만나겠다는 거야. 여자는 그만 아연실색, 베드에서 벌떡 일어나면서, '노. 노. 노 땡큐.'를 연발하며 몸짓 손짓을 다해 뭔가를 애원했어. 여의사는 어리둥절 머리를 도리질하다가 '유 시크릿? 와이 유 시크릿?'하며 눈이 휘둥그레지는 거야."

김선혜는 조급하게 소주 한 잔을 한 입에 비우곤 재빠르게 이순례의 눈길을 붙잡았다.

"신랑이 알았어?"

"신부는 다음날 귀국했어. 신혼은 절단 나버렸고. 물론 그 산부인과에 들렀지."

"왜 그랬대?"
"자궁도 더러 양심이 있다는 거야."
"뭐야?"
"의사는 초음파검사를 다시 하고 내진까지 마치더니, 임신됐던 오른쪽 자궁이 수술 할 때 뒤바뀌었대. 허방짚었던 거래."
"뭐?"
"임신 안 된 쪽 자궁만을 훑어냈대. 여자의 자궁은 둘로 갈라진 '쌍각 자궁'이었대."
"우라질!"
"여의사나 재수술을 받은 여자나 자궁이 진정 그럴 줄 몰랐다는 거야."
"그래서 자궁도 더러 양심이 있다는 거야?"
"여자가 작가로서 가능성을 인정받은 것은 전적으로 여자 스스로의 상상력에서 일군 작품이었지만. 짓밟힌 반쪽 자궁에게 사죄하는 뜻으로 그 남자가 넘겨준 1,200여매 원고지가 그녀 작품의 모티브가 됐음을 부인 못 할 거야."

김선혜는 이순례를 뜨악하게 바라보다 느닷없이 외쳤다.

"바로 너였지!"
"그랬어. 내 양심의 자궁."
"그렇지만 내 자궁은 정열의 노예가 안 되길 바랄 뿐이야. 어쨌든 실습은 해봐야지 않겠어?"
"그런 것 훨훨 털어 버려. 우린 소설 속에서 나 같은 속물들을 녹여내면 되잖아. 어서 이곳을 나가자! 그리고 소설을 위해 다시 축배를 들자."

두 여자는 미명이 찾아드는 골목길을 말없이 빠져나갔다.
 
*작가 약력 : 2001년 68세의 나이에 중편 '티레시아스의 칼'로 '한국소설'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 문단에 반향을 일으켰다. 단편 '지하 분수대 부근', '비석을 위하여'를 발표했으며, 장편 '키메라'로 올해 제 1회 의사문학상을 수상했다. 1959년 부산의대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산진구 부전 1동에 정원태산부인과를 열고 있다. 한국소설작가회장을 맡아 문단에서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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