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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나의 유년시절

시론 나의 유년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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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5.03.19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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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건영(재일의사)

고향에서 소년시대의 나는 할머니를 따라 새벽부터 밭에 나가 보리밟기를 하는 일이 종종있었다. 초등학교 1학년쯤 때부터이다. 나의 고향은 제주도 북쪽 중앙에 위치한 조천(朝天)으로 겨울 아침은 매우 추웠다.

싸락눈이 날리고 소년들의 손발이나 얼굴은 얼어붙어 통증을 느낄 정도였다. 돌멩이 투성이인 밭 한 구석에 서서 5cm 정도 자란, 파란 싹을 밟아 나갔다. 잔설이 얼어붙어 바삭바삭 소리를 내었지만 푸른 보리 싹은 아주 신선하며 생명력이 넘치고 있었다.

이 일을 센다이(仙台)의 연구실 시절에 어떤 잡지에 썼더니, 나의 교수가 읽으시고 "자네! 이것이 인간의 철학일세"라고 칭찬 받았었다. 생명의 씨앗을 키워주는 마음을 부지불식간에 심어준 것은 고향의 산하이며, 보리밭도 그 하나였다고 생각된다.

여름이 되면 가방 같은 건 어디엔가 팽개치고 2년 후배인 A 군을 이끌고 우선 바다로 달려갔다. 나의 집에서 조금가면 계낭개(桂南浦) 해변에 도착한다. 깊은 바다에 면하여 검은 현무암의 암반이 있었는데 언제나 그곳을 거점으로 작은 낚시대로 어렝이 등 작은 고기를 낚으곤 했다.

그 암반 동쪽에 움푹 들어간 좁은 수로가 있다. 만조 때는 마을을 향해 바닷물이 울러들며 썰물 때는 외해(外海)를 향해 바닷물이 훌러 나가는데 하얀 비말(飛沫)과 더불어 요란한 소리를 내는 격류(激流)가 된다.

그 격류를 넘어선 대안(對岸)에 얕은 모래판이 있다. 나는 이곳에서 모래무지와 장난치면서 따뜻하고 얕은 바닷물 속에서 하루 종일을 보냈다. 물이 나가면 소년의 두 손이 바닥에 닿을 정도가 되지만 물이 들면 서 있을 수 없을 만큼 깊어진다.

그런면서도 결코 하얀 모래판을 드러내는 일은 없었다. 이장소는 격류가 무서워 어른들조차 가까이 가려 안 했다. 나에게는 알맞은 은신처이며 '포인트 혈장(穴場:남이 아직 모르는 좋은 낚시터)' 이기도 했다. 나의 아호 '백사(白沙)'는 이 모래판에서 유래하고 있다.

나의 집은 해변의 약간 높은 언덕에 서 있는 고가였다. 마당에 서면 아름다운 한라산이 솟아있는 게 보인다. 문 앞에는 '저녁물'이라는 샘터가 있어 저녁 간조때는 이웃 소녀들이 물허벅을 지고 물을 길러 왔다. 겨울의 새벽, 귀를 기울이면 파도소리가 방안에 가득차고 냉기를 품은, 바닷바람의 시큼한 냄새가 풍겼다. 소년인 나는 이불 속에서 심한 해명(海鳴)에 가만히 숨을 죽이고 있었다.

나의 오래된 이미지 속에 떠오르는 것은 '계낭개' 해변의 외톨이 초가집이다. 이 외톨이 집은 육지에서 떨어진 작은 섬에 세워져 있기 때문에 물이 들면 걸어서 건너지는 못한다. 테우(뗏목의 방언)를 타든지 헤엄칠 수밖에 없다. 그 초가에는 늙은 부부가 살고있는 것 같았다. 가재도구라고 해봐야 앞뜰에 놓여있는 두 셋의 돌항아리 뿐이었고 고양이 뺨만한 뜰에는 해초가 아무렇게나 널려있었다.

언제나 마당에도 사람 그림자는 없고 꽃이나 화분같은 것도 없다. 겨울이 되면 이 작은 집에 차거운 하늬바람이 사정없이 불어닥치고 더구나 거친 물결이 비말과 우박이 섞인 폭풍설이 맹위를 떨쳤다. 초가집은 둥근 지붕을 더욱 꼬부리고 폭풍설이 지나가는 것을 가만히 기다리는 듯했다. 납빛의 겨울하늘 아래 때때로 파도의 굉음과 갈매기와 까마귀의 울음소리가 들려오곤 했다.

소년시대에 바라보았던 외로운 광경이야말로 극빈(極貧)시대를 상징하는 원풍경(原風景)으로 나의 뇌리에 각인되어 있다. 그 후 40여 년이 흘러 그들 노부부도 이 세상에 없으며 해변의 외톨이집도 이미 없다. 시간은 흐르고 세상이 크게 변하고 있는 것이다.

그 위에 생각나는 것은 겨울 까마귀가 우는 고개(오맹이모르:烏鳴旨)이다. 고개마루는 고향의 산쪽에 있어, 주변에 돌멩이 투성이의 계단식 밭과 가시넝쿨의 풀숲에 덮인 돌담이 있었다. 동쪽 한녘에 새까만 낙엽송이 솟아있고 강풍이 언제나 소나무 숲을 흔들었다. 무리를 지어 사는 까마귀의 보금자리는 하늘에 닿을 정도의 높은 소나무가지에 만들어져 눈에 노출되고 찬바람에도 무방비였다.

미쳐 날뛰는 동장군이 다가서면 검은 까마귀 군단은 찬바람을 가로막고 소나무 밭 주변을 배회하면서 높은 소리로 시끄럽게 울어댔다. 당시 소년에게 있어 소나무 숲이 있는 고개마루는 도깨비의 소굴과도 같아 가까이 할 수가 없었다.

그로부터 30여년 후, 그 그리운 까마귀 우는 고개를 찾았지만 중턱에 있던 샘터는 말라버렸고 그 때 하늘이 어두어질 때 까지 메웠던 까마귀들도 그 수가 두드러지게 줄어 있었다. 이제 고개마루의 소나무 숲은 송백이 되어 대지에 깊이 뿌리를 뻗치고 있다.

이상이 나의 소년시대로 거슬러 올라간 추억의 한 토막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엄혹하고도 풍요로운 자연환경 속에서 살았다는 사실에 감사의 염(念)을 품지 않을 수가 없다.
 

*강건영 원장은 제주에서 나서 어릴 때 홀어머니를 따라 일본에서 고학을 했다. 일본 센다이의 동북대학 의학부를 졸업하고 대학원을 수료, 의학박사와 내과전문의를 취득했다. 미국 츄렌대학 내과조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일본 오사카 다이도-클리닉을 개원하고 있다.일본 한인의사회 간사이 지부장과 일본 오사카 개호(介護)인정심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최신 내과학'(공저), '내과학체계'(공저), '의료, 介護보험, NPO연구' 등 50편이 있으며, 시집 6편과 수필집 5편을 냈다. 한국문화를 일본에 소개하기 위해 자비를 들여 '梵鍾을 찾아서'(1999년), '李朝의 美-佛畵와 梵鐘'(2001년), '高麗佛畵'(2002년) 등 일어판 저서를 출간한 바 있다. 최근에는 국내에서 '일본의 介護보험'(2002년)을 출간하기도 했다. 본지에 '김일훈 칼럼'을 연재하고 있는 재미의사 김일훈 박사의 추천을 받아 이 수필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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