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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그래도 보람 있는 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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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5.03.18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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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봉옥(전주예수병원장)
진눈깨비가 시리디 시린 강풍에 휘말려 어설프게 흩어지던 겨울날 아침. 냉기 어린 양손을 감싸 쥐고 들어선 출근길은 웬지 무겁고 얹짢았다.

코트깃에 뿌려진 눈가루를 털고 들어선 병원로비에 희디힌 소복을 입은 전혀 안면이 없는 두 아낙네와 80세 넘은 고령의 조씨 할머니를 대동하고 진찰받게 하시던 인상좋은 얼굴 넙적한 아저씨가 나를 맞았다.

선뜻 스치는 불길한 예감과 일치하여 할머니는 M읍에 사는 큰딸집에 다니러 갔다가 졸지에 사망하였다고 전하였다.
가녀린 양어깨를 연신 들썩거리며 화장기 없는 처연한 얼굴에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수건으로 주체 못하며 두 딸은 번갈아가며 할머니의 마지막 운명 순간의 몸부림을 그려 내었다.

조그마한 병원 응급실에서 꺼져가는 숨결이 희미해져 가던 순간에도 허리에 동여맨 복주머니를 더듬거리며 "유원장, 유원장"을 중얼 거렸으나 그 당시에는 가족들은 무슨 뜻인지 알 수없었다.

맏상주도 없이 쓸쓸하게 장사를 지낸후 할머니가 안간힘을 다해 잡으려 했던 복주머니를 열어 보았더니 두배로 확대복사된 나의 명함과 전화번호를 발견하고 원장님을 찾던 마지막 소원을 풀어드리지 못한 안타까움에 방문하게 되었다면서 더욱 서럽게 흐느꼈다.

한 순간 가슴에 요동치는 서글픔에 숨이 막히고 몰려드는 알수없는 분노와 아울러 무상함과 공허감을 나의 깊숙한 내면에 연출해 주었다.

할머니와의 첫 만남은 2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천식으로 쌕쌕거리며 병원계단을 오르던 그분을 부축하며 내과 진찰실까지 안내 했던 작은 친절로써 시작되었다.

심한 당뇨까지 겹쳐 있던 할머니는 일주일에 두세번 내과에 들르셨다가 꼭꼭 나를 찾아와 괜히 진찰대에 올라가 수술할 곳은 없는지, 옆구리를 만져 달라는 둥 어리광을 피우셨다.

병원문을 나서기전 내가 좋아하는 바나나우유 한병을 들고 오셔 권하면서 나의 오른손을 두손으로 붙잡고 볼에 부비시면서 "나 죽을때 유원장이 꼭 돌봐줘야 한다. 믿을 사람은 원장뿐이니, 원장곁에서 편안하게 가고 싶다"고 되 뇌이셨다.

늦은 가을 저녁 한 날, 퇴근시간까지 기다리시던 할머니의 권유에 못이겨 승용차로 15분거리에 있는 시외곽지역에 자리잡은 할머니집에 저녁초대를 받았다.

몇 채 안되는 초가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고 노오란 탱자가시로 둘러쌓인 울타리에 싸리문이 곁들어진 할머니 집에서 중풍으로 겨우 몸을 가누시던 할아버지와 함께 저녁상을 받았다.

마당 한쪽 곁에 수백개의 홍시가 달린 감나무 가지들이 힘에 겨워하고 있었고 떨어진 낙엽 잎새 사이로 풀벌레들이 애상스러운 노래를 부르던 그곳에서 파김치와 어우러진 김치찌게와 정성스럽게 구어진 굴비를 맛보면서 도시의 추악한 때를 벗고 향수가 어린 고향의 순수함과 정직함을 세어보는 시간을 가졌다.

두 달전인가 초췌하고 당황한 모습으로 방문하신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잃고 두어밤을 엉엉울었으나 이제 겨우 안정이 되어 원장을 찾아 왔는데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원장명함과 집전화번호를 달라고 말씀하셨다. 나의 명함을 받아선 소중하게 복주머니에 담으시면서 겨우 억지 웃음을 웃으시던 모습이 지금 생생하게 보이는둣 하다.

결국 나의 수발을 받지 못하시고 영원속에 묻혀버리신 조씨 할머니. 어떻게 할머니의 요량으로 확대복사까지 하여 나의 명함을 소중히 간직 하셨을까? 마지막 순간까지 애타게 나에 대한 믿음으로 애절하게 외치시고 더듬으셨던 몸부림은 무엇을 의미 하는가?

그렇다.
우린 어렵고 짜증난 의료환경 속에서 이러한 나약한 자들의 믿음과 소망의 귀중한 구슬들을 가졌기에 맑은샘을 흐르게 할 수있고 매화향기를 풍기게하여 영혼을 일깨우는 피리를 불 수 있을것 같다.

오늘 또 다른 조씨 할머니를 만나기 위해 땀흘려 인내하며 용기를 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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