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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2024-03-28 17:57 (목)
시론 베를린 마라톤 원정기
시론 베를린 마라톤 원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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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5.03.18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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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우 원장(서울 강북/예일산부인과)
1년 전 내가 다니는 스포츠클럽에서 만난 이비인후과 의사인 이제선 박사(이 분은 철인 3종 경기에 매년 나가는 의사이자 체육인)가 권유하기도 하고 용기를 북돋워 주어 지난 해 10월 3일 임진각에서 열린 통일 마라톤대회 하프코스 도전으로 마라톤에 입문했다.

평소에도 30~40분씩 꾸준히 한강 둔치나 스포츠클럽의 좁은 트랙을 뛰면서 달리기를 생활화하고 있었지만 21km의 하프 코스 도전은 두렵고 가슴 떨리는 일이었다. 평소에 운동을 싫어하고 비디오나 영화감상이 취미인 K선배가 같은 스포츠클럽을 다니기 시작하면서 3년만에 하프 코스 도전에 성공하고 나니 더욱 두려워졌다.

왜냐하면 K선배는 내가 뛰어보자고 권유하여 달리기를 시작했는데 선배는 완주하고 나는 중도에 포기하거나 낙오하게 된다면 다른 것은 접어두고 우선 나에게 정신적인 손상이 올까봐 걱정스러웠다. 결국 스포츠클럽내 마라톤 멤버들과 한강 사이클 도로에서 함께 하프마라톤 예행연습을 하게 됐다. 비록 꼴찌는 했지만 자신감이 생겼다.

일주일 후 1999년 10월 3일 철인 이제선 박사가 격려하면서 뛰어주는 극진한 도움으로 마지막 통일 대교 2km의 힘겨운 숨막힘을 견뎌내고 결승선을 밟을 수 있었다. 기록은 1시간 53분. 첫 하프마라톤 성공이 가져다준 자신감은 꽤 컸다.
 
3주 후 철인 이 박사의 권고와 격려에 힘입어 춘천마라톤 풀코스에 도전했다. 이날은 나와 마찬가지로 풀코스 첫 도전자인 J검사와 출발점부터 나란히 뛰면서 서로 격려해 가면서 즐겁게 30km까지는 잘 뛰었다. 그러나 급작스레 힘들어지면서 35km라는 이정표가 가도가도 안나올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다 결국 35km 이정표까지 왔는데 여기서 또 7km를 더 가야한다고 생각하니 앞이 캄캄할 정도로 절망감이 들었다. 이때 내 앞 어떤 부부가 나란히 뛰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부인도 나와 비슷하게 오금이 안 떨어져서 헉헉대고 있었는데 남편이 "발이 안 떨어지면 팔을 힘차게 앞뒤로 흔들어 보란 말야.

그러면 다리는 움직이게 돼 있어!"라며 기운을 북돋워 주는 소리를 듣게 됐다. 나도 그 부인을 따라 팔을 앞뒤로 크게 흔들어 봤는데 별 효과는 없었지만 "아하! 다들 이렇게 죽을 지경이구나!"하는 깨달음이 생기면서 더 기운을 낼 수 있었다. 천신만고 끝에 40km 이정표를 만나게 됐는데 여기서 또 2km를 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팍 주저앉아 버리고 싶었다. 두 번 다시는 풀코스 도전을 안하겠다고 속으로 맹세까지 했다.

그만 포기하고 걸어가려고 마음먹은 순간 결승선에서 집안의 기둥뿌리인 아빠를 걱정스럽게 기다리고 있을 큰 딸과 둘째 아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자녀들 앞에서 낙오한 사람들이 타는 호송차에 실려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인간적일지는 몰라도 집안의 어떤 패배감의 순간으로 작용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거의 마비된 다리로 2km를 더 뛸 수 있었다.

춘천 공설 운동장으로 뛰어 들고 보니 400m트랙을 한 바퀴 더 돌아야 결승선을 밟을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뭐하러 한 바퀴는 더 돌게 한 거야"라고 씨근벌떡거리며 간신히 결승선을 밟았다. 무의식적으로 20m쯤 걸어가다가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는 뒤로 벌러덩 누워 버렸는데 그 때 누웠던 땅이 한없이 포근했고, 하늘은 한없이 빛나고 있었다. 행복감과 성취감 때문이었을까? 그때 나는 풀밭에 누워서 혼자 쿡쿡거리며 웃고 있었다.

"4시간 14분 동안 계속 뛸 수 있는 다리와 심장을 허락해 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부모님 저를 건강하게 낳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날 저녁 할아버지 할머니 영정을 꺼내놓고 절한 뒤 완주 메달을 바쳤다. 당시의 한없이 행복했다는 느낌은 아직도 생생히 남아 있다.
 
그리고 1년도 되지 않아 고등학교 동창이며 서울 마라톤클럽 부회장인 마라톤 마니아 P박사의 권유로 베를린 마라톤에 참가신청을 했다. 의약분업으로 촉발된 의료사태로 심신과 병원이 만신창이가 되어가던 시기에 참으로 많은 망설임 끝에 추석 연휴를 끼고 밀라노 성형학회와 부다페스트 불임학회와 연계하기로 마음먹고 떠나게 되었다.

처음엔 20명 가까이 신청했으나 결국 나와 P박사 단 둘만이 가게 되어 전세계 참가자 3만3,00명 중 한국 사람은 단 둘이 되었다. P박사는 고교 동창이면서도 막연히 알고 지내던 사이었으나 이번에 더욱 가까이 알게 되어 감사하게 생각한다.

9월 8일 밤에 도착하여 푹 자고 9월 9일 아침 베를린 올림픽 경기장까지 5~6km 구간을 간단히 뛰고 몸을 푸는 fun run 행사가 열렸다. 아침을 일찍 먹고 행사장을 찾아 나섰지만 지하철을 잘못타 헤매다가 베를린 올림픽 경기장으로 곧장 가야 했다.

세계에서(특히 유럽) 모여든 남녀노소 마라토너들과 섞여 음식(사과, 바나나, 빵, 커피, 우유, 과자, 초콜릿)을 배급받고, 베를린 마라톤 엑스포가 열리는 곳으로 찾아가 배번표와 스피드 칩을 받았다. 세계적인 스포츠 용품 회사들이 모두 참여해서 한바탕 각축을 벌이는 장소답게 스포츠와 관련된 음료수, 뛰면서 먹는 음식, 뛰면서 심박동을 측정하는 시계 등등 스포츠 산업의 발달과 상업성을 실감할 수 있었다.

엑스포장 한 구석에서는 글루코겐을 공급하기 위해 열린 파스타 파티장이 있어 P박사 부부와 함께 스파게티와 마카로니를 조금씩 먹어 두었다. 버스를 타고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베를린 시내를 잠깐 둘러 보았다. 베를린 쿠담 스트라세에서 뜻 밖에 미국의 조각가 키츠 해링의 조각을 여섯 점이나 만나서 감상할 기회가 있었다.

어린아이의 감성을 갖고 어린아이처럼 살다가 32살의 나이에 AIDS인가 뭔가 하는 병으로 죽어버린 작가(자신의 작품에서 나오는 모든 이익금을 병든 아이들을 위해 써달라고 유언했다고 한다). 키츠 해링 외에도 에두아르도 칠리다의 꾸불텅 거리며 하늘로 치솟아 있는 거대한 환경조각을 처음으로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는데 폭격맞아 부서진 빌헬름 황제의 교회와 멀리서 조화를 이루면서 서 있는 눈맛이 시원한 스테인리스 구조물이었다.

중세와 현대가 공존하는 도시의 모습에 칠리다의 추상 표현주의 조각이 어우러져 멋진 도시의 모습을 연출하고 있었다. 높이 5m 정도씩 되는 키츠 해링의 조각을 여섯 점이나 한꺼번에 찬찬히 감상한 것만 해도 여행 경비를 모두 뺀 듯한 흐뭇함이 들었다. 시간이 있으면 며칠동안 매일와서 한 번 씩 보고 또 보고했으면 싶었다.
 
호텔로 돌아와서 저녁을 하고 일찍 잤다. 말이 잔 것이지 룸 동료의 코고는 소리에 거의 밤새 잠이 안와서 몸부림쳐야 했다. 역사적인 9월 10일 베를린 마라톤의 새벽이 밝기 시작했다. 5시 30분에 P박사와 호텔 주변의 주택가를 30분간 조깅하며 몸을 풀고 뜨거운 물에 샤워를 하고 길을 떠났다.
 
전날 전철을 탔다가 길을 잃은 전력이 있어 이번만큼은 택시를 타고 출발지점인 Schallottenburg Tor로 갔다. 출발지점 훨씬 전부터 경찰이 엄격히 통제하고 있었다. 택시에서 내려 한참을 걸어가니 Schallottenburg Gate가 나타났다. 이미 수 만명의 사람들이 운집해서 각각 뛰기도 하고 산보도 하면서 준비하고 있었다.

방광처리를 하려고 화장실 앞에서 줄서서 기다리고 있는데 조그만 일본 사람이 우리 두 사람도 일본 사람인 줄 알고 인사를 건네 왔다. 일본에서는 130명이 왔다고 하며, 자기기록은 3시간 15분이라고 했다. 외국 나가서 일본 사람들을 만나보면 대부분 겸손하고 예의바르고 글씨를 예쁘게 잘 쓰고 또 실력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는데 내가 본태적으로 가지고 있는 반일 감정과 그들의 좋은 점을 객관적으로 인정하는 마음이 뒤섞여 항상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일본이 마라톤 강국이라고 하더니 역시 이런 스포츠도 국력과 많이 비례하는구나 싶었지만 그 일본 사람의 대단히 빠른 기록이나 우리보다 65배나 더 왔다는 것 등이 하나도 부럽거나 주눅들지는 않았다. 나 같은 4시간 이상의 아마추어 런너도 두 다리 튼튼하고 병 없이 오랫동안 달리기를 즐길 수만 있으면 그 자체가 행복한 것이지 빠른 기록이나 국력에 비례한 수많은 참가자 같은 것들은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조용히 이슬비가 내리는 가운데 롤러 스케이트 선수들이 출발하고 그 다음에 장애인들이 휠체어를 타고 출발했다. 장애인 선수들이 다 출발할 때까지 풀코스 마라톤을 기다리던 사람들이 양쪽 길에 둘러서서 계속 박수를 쳐주던 모습은 지금도 가슴 뭉클하다.

장애인이기에 그들의 도전은 비장애인의 도전보다 더 훌륭하다고 생각하고 진심에서 존경과 격려를 보내는 것 같았다. 이슬비가 내리는 가운데 조용조용 진행되어 5만명 이상의 대 군중이 모여있다는 실감이 나지 않았다.

드디어 8시 55분 풀코스 도전자들의 출발을 알리는 총성이 울리고 환호성과 함께 보온을 위해 런닝복을 껴입고 있던 옷들을 게이트 돌기둥에 벗어 던지면서 3만3,000명의 인간 강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나이아가라 폭포의 물보라와 굉음 앞에서 대자연의 위용에 감동한 이래 인간들이 모여서 이루는 다이내미즘에 감동한 것은 이것이 첫 번째였다.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수많은 잘 생긴 남녀 젊은이들과 배에 군살하나 없는 늘씬한 노인들, 형형색색의 컬러풀한 유니폼, 간간히 눈에 띄는 2m가 넘는 사람들, 초미니 운동복을 입은 모델같은 여자들, 기본적으로 엉덩이가 내 옆구리 정도에 오는 유럽의 건각들.

그 인간의 물결이 꿈틀거리며, 약동하며, 환호하며, 조용히 내리는 빗속에서 한꺼번에 용암처럼 흐르기 시작했다. 연도에 인간 띠를 이루며 격려의 환호성을 지르는 베를린 시민들과 300년이 넘은 Schallottenburg 성문의 위용은 감동적이었다.

산부인과를 하나 운영하면서 항상 가슴 조이고 애태우고 전전긍긍하면서도 그날그날 감사하게 생각하면서 여리디 여린 소시민의 새가슴을 안고 약간은 nervous하게 살아가는 나에게는 가슴벅찬 감동이었다. 그 인간 강물의 흐름에 취하여 뛰어가다 보니 유서깊은 Brandenburg 문이 멀리서 보이기 시작한다. 그 밑을 지나가면서 모든 런너들이 박수와 환호성을 함께 보냈다.

베를린의 역사와 마찬가지인 그 문이 동서냉전의 상징이었고, 또한 독일 통일의 상징이니까 그러는 것이 당연하리라. 성당, 도서관, 박물관 등을 구경하면서 천천히 뛰다보니 구경에 신경을 쓴 탓인지 약간 현기증이 나면서 나만 너무 처지는 것 같아서 이제는 앞 사람 뒷통수만 보기로 했다. 베를린 시내에 차가 한 대도 보이지 않았다. 주차해 놓은 차도 거의 몇 대밖에 보지 못했다.

참으로 철저한 교통통제였다. 100~200년 묵은 Cobble stone 길이라 뛰기에 좋았다. 이 길의 일부를 과거 손기정 선수도 뛰었을 것이다. 새로 아스팔트 깔은 길은 없었기 때문에 틀림없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앞사람 뒷통수나 다리만 보면서 뛰기 시작한 후로는 베를린 시내를 잘 보지 못 했다. 상점가를 지나가기도 하고, 주택가를 지나가기도 하고, 아파트 사이를 지나가기도 했다. 어디를 가도 끝없이 양쪽 길에 서서 응원하는 수많은 사람들과 아이들.

베를린 시민들은 그날 하루 차량 운행을 중지하고 거리로 나와 마라톤 하는 사람들을 구경하면서 차 없는 거리에서 산책도 하고, 응원도 했다. 나팔도 불고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이면 바이올린도 켜고, 드럼도 치고, 일광욕도 하면서 즐기고 있었다. 시민들의 축제라는 것은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끊임없이 들었던 'Go, Go' 소리가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20km 지점부터 비가 그치고 햇볕이 빛나기 시작하자 금방 더워지기 시작하여 급수대 마다에서 물을 한 컵은 마시고 한 컵은 모자를 벗고 머리에 쏟아 부으면서 뛰었다. 거의 30km 지점까지 나보다 늦게 뛰는 사람을 보지 못한 느낌이다.

연도에서 환호하는 소리, 북소리, 나팔소리, 밴드연주, 모델같은 여자들이 나를 모두 추월해 가는 것에 흥분되어 내 페이스를 잃으면 안되기 때문에 질주하고 싶은 것을 참고 참으면서 30km 지점쯤에 이르니까 비로소 가뭄에 콩 나듯 걷는 사람도 보이고 나와 비슷한 속도로 뛰는 사람이 제법 보이기 시작했다.

35km 지점에 이르니 양쪽 숲속에 쳐 놓은 텐트에 다리에 쥐난 사람들이 누워서 자원 봉사자들에게 마사지요법을 받고 있었다. 그때부터 힘이 조금씩 나기 시작하고 자신감이 생기면서 속도가 붙기 시작하자 많은 사람들을 추월할 수 있었다.

36km 지점부터 1km마다 이정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죽어라고 한참을 뛰었다고 생각했는데도 겨우 1km 밖에 안 온 것이 확인되니까 심리적으로는 더 힘든 것 같았다. 40km 지점부터는 양쪽 길가에서 응원하는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어서 길 너머의 모습은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어떤 시민 한사람이 입에 호루라기를 물고서 마치 교통경찰 같은 수신호를 하면서 마지막 힘을 내라고 열정적인 응원을 하고 있었는데 그 절도 있는 동작과 힘찬 호루라기 소리에 정말 마지막 힘이 나는 것 같았다. 그때부터 마지막 젖 먹던 힘까지 짜내면서 뛰고 또 뛰었다. 내 딴에는 질주에 가깝게 뛰었다.

숨이 목에 차 오르면서 뛰고 있자니 2차대전 때 폭격을 맞아 첨탑지붕이 날아가 버린 빌헬름 황제의 교회가 신비스러운 아름다운 위용을 나타내면서 갑자기 눈 앞에 전개되었다. 그 이상한 아름다움에 어린 듯 취하여 마지막 숨을 헉헉거리면서 결국 결승선을 밟았다.

안전한 교통통제, 차분히 비가 오다가 맑아진 좋은 날씨, 연도에서 무한정 들리던 북소리, 환호, Go Go, 나팔소리, 한없이 펼쳐진 반들반들한 cobble stone 길, 출발지점의 고풍스런 고성의 분위기, 사과와 바나나까지 전부 껍질을 벗기고 잘라서 준비해둔 세심한 배려, 마지막 결승선의 폭격 맞은 웅장한 성당의 야릇한 감동, 장애인들의 출발 때 보여준 이 사람들의 예의, 나를 추월해서 뛰어가던 수 많은 멋진 건각들의 용암 같은 흐름, 키츠 해링의 어린아이 낙서같은 조각, 에두아르도 칠리다의 성당과 마주보며 우러러지게 대결하는 꾸불텅거리는 거대한 금속 조각작품.

이런 이미지들이 뒤섞여 나에게 힘을 주었고, 생애 최고 기록인 4시간 11분 30초를 만들어 주었다고 믿는다. 나같이 느릿느릿 기분 내키는 대로 천천히 뛰는 사람에게 이 기록이 깨어질 날도 있을까?

결승선에서 "윽!" "아!" "으~윽!"하는 비명을 지르며 사방에서 시민들과의 격리용 철망을 움켜잡으며 숨을 몰아쉬거나 주저앉던 사람들의 그 환희와 괴로움이 함께 섞인 비명소리들이 아직 귀에 생생하다.

결승선을 밟자마자 체온 보온용으로 커다란 비닐 퍼대기를 주어서 몸에 두르고 조금 걸어가니 올림픽 시상식 옷차림의 미니 스커트를 입은 아가씨들이 완주 메달을 목에 걸어준다(일일이 congratulation! 하면서). 메달을 목에 걸고 터벅터벅 걸으면서 길 양쪽에서 나눠주는 커피, 뜨거운 차, 사과, 빵, 바나나를 먹었다.

스피드 칩을 반납하니 40마르크를 돌려줬다. 옷 보관하는 트럭에서 보관했던 옷도 돌려 받았다. 옷을 찾아 나오니 길 양쪽에 수많은 텐트가 쳐져 있는데 샤워장이다. 이 사람들은 텐트 안에서 샤워를 하고 몸을 닦고 말리는 것은 텐트 밖에서 하는데 순식간에 거대한 누드 촌이 형성됐다. 그런데도 누구하나 망칙하다고 얼굴을 돌리거나 손으로 눈을 가리는 사람은 없었다.

철망 밖의 시민들도 편안하게 쳐다보고 자연스럽게 걸어서 지나갈 뿐이었다. 그 자연스러움이 나에게는 이기하게 생각됐다. 여기서 샤워하고 몸을 말리고 처음 입고 왔던 옷으로 갈아비고 약 3km정도 쳐진 철망 밖으로 걸어 나왔다. 목에 메달을 걸고 비닐 퍼대기를 몸에 두른 채 다리를 절뚝절뚝하며 전철을 타기 위해 계단을 내려가는데 내려가기가 올라가기보다 훨씬 다리가 아프다.

전철을 타려고 계단을 내려가는 비닐 퍼대기를 두른 사람들이 모두 다 "으윽~으윽"하면서 한 계단씩 걸어 내려가는 꼴을 보고 있으니 집단으로 미친년놈들을 모아 놨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뻣정다리로 절룩거리면서도 싱긍벙글 웃음이 터졌다.

전철에서 나와 택시를 타고 호텔로 돌아왔는데 택시기사가 나를 보더니 엄지 손가락을 내 보이며 "Oh, my marathon man! Did you finish your race"라며 축하해 주었다. 택시에서 내리면서 택시비를 계산하는데 허리 색에 들어있던 돈이 완전히 젖어서 흐물흐물 해진 것을 꺼내주며 미안하다고 했더니 "Oh, don't worry"하면서 트렁크에다가 신문지를 깔고 그 위에 젖은 돈 2장을 펴고 신문지를 덮은 뒤 "미안해 할 것 없다. 금방 마른다. 축하한다"며 인사를 하고 가는 것이었다. 그 사람 참!

호텔에서 뜨거운 물에 샤워하고 나와서 옷을 갈아 입는데 갑자기 온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와들와들 걷잡을 수 없이 떨리는 것이었다. 이제부터 곧장 밀라노 학회며, 부다페스트 학회에 가야 하는데 여기서 무슨 병이 나고야 마는구나 하는 아찔한 생각이 들었다. 다시 뜨거운 물로 샤워하고 후다닥 닦은 다음 이불을 두 장 포개어 덮고 20분 쯤 있으니까 와들거림이 사라졌다.

에너지 소모에다가 덥다고 찬물을 자꾸 머리 위에 쏟아부은 것이 신체적으로 이렇게 나타난 것으로 생각됐다. 그후 계속 절뚝거리며 프랑크푸르트, 밀라노, 피아첸차, 뮌헨, 부다페스트 등을 경유하며 무사히 일정을 마치고 귀국할 수 있었다.

나와 같은 날 출국하여 그 동안 독일의 낭만가도를 비롯 서유럽 여행을 마치고 부다페스트 학회에 참석한 우리나라 불임학회팀과 합류하여 호텔 주위를 매일 아침 느릿느릿 뛰면서 몸을 풀었다. Thermal호텔은 다뉴브강 한가운데 있는 섬 안에 있었는데 동유럽의 가을은 우리보다 빨라서 이미 단풍이 한창이었다.

다뉴브강변 흙 길을 뛰면 왼편에는 푸른 다뉴브가 흐르고 오른편에는 흐드러진 단풍과 바람이 불 때마다 빨갛고 노란 낙엽이 비처럼 내리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단풍이 우거진 숲속에 산책할 수 있는 공원이 있는데 이곳에는 벨라바르토크, 코다이, 프란츠리스트 같은 헝가리가 배출한 음악가와 문학가들의 흉상이 이곳저곳에 수 십 개가 배치돼 있어 그야말로 소위 사색이라는 것에 잠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엉뚱하게도 달리기의 즐거움을 부다페스트 불임학회에 참석하여 새벽에 호텔 주변에서 다뉴브와 단풍을 즐기며 흙 길을 뛰면서 만끽했다. 다뉴브의 단풍과 흙 길 위에 지천으로 떨어져 있는 밤을 주워서 허리 색에 넣고 귀국하여 아내와 아이들에게 다뉴브의 가을을 나눠주었다.

학회에서 주최한 다뉴브 야간선상 파티는 달빛이 부서지는 다뉴브 위를 흘러가면서 열렸다. 오색 찬란히 아름다운 부다페스트 야경을 바라보면서 4인조 현악 밴드에게 god father의 'speak softly love'를 신청, 학회에 참석한 한국의 불임 의사들과 같이 들은 것으로 베를린 원정 마라톤은 잊을 수 없는 추억의 한 페이지를 기록했다.

독일의 외무장관 피셔는 야간의 라인 강변을 뛰면서 많은 이야기를 썼다는데 나는 새벽 한강 사이클 도로를 혼자 조용히 달리면서 느낀 잔잔한 감동이 라인 강변의 감동에 못지 않다고 생각한다. 동이 트기 전 가로등이 켜진 사이클 도로의 어둠을 벗삼아 dirks데이트족, 소주족들도 모두 사라진 조용한 어둠 속에서 조용히 혼자 뛰고 있을 때가 가장 좋다.

그러다 보면 서서히 동이 터오면서 여명의 빛이 강물에 반사되어 특히 청담대교나 영동대교 쪽의 바다같이 강폭이 넓은 곳에서 화려하게 빛나기 시작하는 강물의 잔잔한 흐름을 바라보면서 뛸 때는 마음에 잔잔한 감동이 없을 수 없다. 살아있고 두 무릎이 아직 성한 것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순간이다. 이 순간이 자연과 인간이 일체감을 이루는 것 중 하나가 아닌가 싶다.

마라톤은 준비하고 연습하는 과정에서도 잔잔한 기쁨과 고통이 함께 하는 야릇한 매력이 있는 스포츠임에 틀림없다. 그 잘 생긴 유럽의 건각들과 함께 늠름하게 베를린 쿠담스트라세에서 결승선을 밝을 때의 감격은 오로지 '감사'일 뿐이었다. 49세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42.195km를 뛸 수 있도록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 부모님께 감사, 베를린 시민에게 감사, 각종 애환을 겪으면서 살고 있지만 살아 있음에 감사, 사회에 감사.

한 숨 자고 나면 이슬처럼 잊혀질 감사와 감격의 마음일지는 모르지만, 그 순간의 감사한 마음을 가슴에 길이 길이 간직하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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