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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병 환아 '새 삶잇기' 25년
심장병 환아 '새 삶잇기' 2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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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5.03.10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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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회 보령의료봉사상 수상자 조범구 교수

  ■ 연세의대 흉부외과 조범구 교수

  “의사로서 할 일을 했을 뿐인데 상은 무슨 상을…”

  78년부터 매월 둘째 일요일이면 어김없이 왕진 가방을 챙겨들고 부산 심장환자상담소 요양원(부산시 금정동 부곡 3동 8-10)을 찾아 심장병 어린이들에게 새 생명을 안겨준  조범구 교수(연세의대 흉부외과학·64·사진)는 제19회 보령의료봉사상 수상 소식을 듣고, 조교수의 트레이드 마크인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쑥스럽다'는 말을 되풀이 했다.

  조 교수는 76년 미국 흉부외과학회 E.A Graham 펠로우로 초청돼 텍사스 심장연구소, 알라바마 대학, 메이요 병원 및 하버드에서 심장외과를 공부하고 77년 귀국하면서 미국의 선진 심장수술을 국내에 도입하는 등 흉부외과의사로서 활짝 개화하는 시기를 맞게 되고 이 시기에 심장병 어린이들과의 질긴 인연의 끈이 이어진다.

  ■ 78년부터 이어진 부산행 

  당시 메리놀병원 간호사로 일하고 있던 미카엘라 수녀는 우연히 병원 복도에서 청색증 환아를 만난 것이 계기가 되어 부산 지역 선천성 심장병 환아들을 돌보게 되는데 당시만 해도 국내의 심장수술은 사망률이 높은 등 미국과는 큰 격차가 있었다. 미카엘라수녀는 한미재단을 통해 주로 미국 병원에서의 수술을 주선했고, 미8군 군의관이던 페즐라 박사도 한국과의 인연으로 이 일에 뛰어들게 됐던 것.

  무료 수술이라고는 하지만 환아가 미국에 건너가는 것은 결코 녹록치 않았다. 보호자가 함께 가야하고, 언론소통 문제 등 어려움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던 차에 페즐라 박사는 미국에서 돌아온 조 교수를 미카엘라 수녀에게 소개해 주었고, 매월 둘째 주 일요일 부산행이 시작됐던 것.

  “78년 처음 진료를 하러 갔는데 부산 메리놀 병원 강당에 선천성 심장병 환아에 1∼2명의 보호자까지 수백명이 모여 있었어. 놀랍고 걱정이 앞섰지. 하두 많은 환자를 진료하다 보면 청진기를 꽂은 귀가 아플 정도였지.”
 페즐라박사의 소개로 `한번 가보지' 하는 생각에서 부산에 내려간 조 교수는 하루라도 수술을 늦추면 영영 희망이 사라질 그들을 외면할 수 없게 되었고 미카엘라 수녀에게 한달에 한번 부산에 내려올 것을 약속하면서 서울, 부산 간 20년 왕진의 역사가 시작됐다.

  ■ 진료 3만여명,  수술 1400명 

  이렇게 해서 그의 손길을 거쳐간 환아만도 3만여명. 수술환아만 1,400여명에 이르며, 2차·3차 수술을 거친 환아들도 상당수 있다.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일에 남의 돈 끌어다 쓰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는 철저한 신념으로 차비는 물론 주머니 돈을 털어 자장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환아들을 돌봐왔다. 수백명의 환아들이 몰려들자 혼자의 힘으로는 안되겠다 판단한 조 교수는 당시 진동식, 김춘규 세브란스병원장을 모시고 내려가 현장을 직접 보게 함으로써 병원에서 적극적으로 후원하는 계기를 마련하면서 진료를 확대해 갈 수 있었다.

 처음엔 교통편이 큰 문제였다. 당시만 해도 비행기는 비쌌고, 매 시간마다 항공편이 있는 것이 아니라 토요일 기차를 타고 내려가 일요일 하루종일 100∼150여명의 환자들을 돌본 후 밤차로 올라와 월요일 출근해 환자진료·수술을 해야 하는 일은 심장병 어린이?대한 애정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으리라.

 조 교수는 20년 이상 이 일을 할 수 있었던 숨은 공로자로 친구 2명을 꼽는다. 한 친구는 청진기만으로 역부족인 심장병 환아들을 위해 각종 검사기기를 사는 일을 도맡았고, 또 한 친구는 자신의 회사인 항공화물 이사로 보직을 주어 항공료의 30%만 내고 외국을 다닐 수 있도록 경제적 부담을 덜어주었다. 선천성 심장병 어린이들을 진료하면서 조 교수는 외국에 나가야할 절박한 필요성이 있었다. 나가서 조금이라도 진전된 심장수술의 술기를 배워 와야 절대절명의 어린 생명을 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진전된 의료기술의 습득은 필수적이었던 것.

 “지금이야 인터넷이 발달돼 각종 저널을 발간과 함께 접할 수 있지만 70년∼80년대만 해도 발간 몇달이 지나서, 심하면 2∼3년이 지나서야 국내에 소개됐지. 현장에 찾아가지 않으면 업데이트된 정보를 얻을 수 없었어.” 조 교수는 어린 생명들을 위해 부지런히 외국 학회에 쫓아나녔고, 그 결과 국내 손꼽히는 흉부외과의사로 자림매김할 수 있게 되었다.

  ■ 모두가 잊을 수 없는 사람들

  초창기엔 환자를 찾아내고 수술하는 일에 주력했으나 세월이 지나면서 수술후 추적 조사 프로그램에 주력했다. 선천성 심장병 수술 환아의 경우 사춘기가 되면 대부분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에 의학적인 것 뿐 아니라 정신적으로 이들이 정상생활을 할 수 있도록 컨설턴트 하는 일은 대단히 중요하다. 더욱이 수술 10년 후에도 갑자기 문제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환자를 추적하는 일은 특히 중요하며, 조 교수가 20년 이상 지속하면서 환자의 99%이상 추적해 왔다는 것은 외국에서도 드믄 일로 학술적으로도 큰 평가를 받고 있다. 지난해 4월 제10차 아시아심혈관외과학회 학술대회에서 환자 추적 관리에 대한 보고가 발표돼 큰 관심을 끌기도 했다.

 조 교수의 손길을 거친 환아 한 사람 한 사람, 그에게는 모두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이다. 그중에서도 85년 수술한 오명태 환아는 폐동맥 고혈압으로 수술이 불가능해 수술을 포기한 환자였으나 어머니의 끈질긴 부탁으로 죽음을 각오하고 집도한 환자. 죽은 목숨이라고 여겼던 명태는 기적적으로 살아났고, 지금은 건강하게 사회생활을 하고 있다.

 연말이면 조 교수 책상에는 새 삶의 기쁨과 감사를 전하는 환자와 보호자들의 감사의 편지와 카드가 수북히 쌓인다. 흉부외과 의사로서 예전이나 지금이나 힘들고 지친 상황속에서도 어린 생명들을 포기하지 않고 돌보게 한 원동력이다.

 이제는 국내 심장수술의 술기가 높아지면서 대부분 부산지역에서 수술을 집도하면서 예전보다는 선천성 심장수술 환아가 많이 줄었다. 98년부터는 장병철 교수와 박영환교수가 합류해 인공판막환자들의 진료에 나서 성인들도 돌보고 있다.

  ■ 노동조합에서도 감사패 수여

  교수로서 학문적 활동으로 인정받아야 하는데 이런 일로 상을 받아 `쑥스럽다'는 말을 거듭 되풀이한 조 교수는 미국 흉부외과학술원의 국내 유일한 정회원. 국내뿐 아니라 외국에서도 인정받고 있는 흉부외과학 권위자임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또 92년부터 아시아 심장혈관학회지를 발간하는 일에 천착해 인덱스 메디쿠스에 등재하면서 유럽, 미국에 이어 심장혈관학의 아시아 중흥을 주도하고 있다.

 지난 2월까지 세브란스 병원장을 역임한 조교수는 노동조합 40주년 행사에서 감사패를 수여받아 화제가 됐다. 병원장에게 노조가 감사패를 전달하는 일은 이례적으로 말단직원까지도 존중하고 이해하는 인간중심의 그의 철학과 행동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항상 밖으로 나오는 말은 자제하지만 가슴속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휴머니즘이 20년이상 한결같은 심장병 어린이에 대한 사랑으로 표현된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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