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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겸손, 청렴 '아름다운 사람'

사랑, 겸손, 청렴 '아름다운 사람'

  • Doctorsnews kmatimes@kma.org
  • 승인 2005.03.10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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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회 보령의료봉사상 수상자 차윤근 박사

· 1918년 평남 평원군 출생
· 1942년 세브란스 의전 졸업

  그의 꼼꼼하고 빈틈없는 치료와 뜨거운 열정 덕분에 소록도는 하나하나 결실을 맺어갔고 새로운 모습으로 변도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는 우리 나라 나병 관리 사업에 참여하고 있다. 두 번에 걸친 소록도병원장, 국립 칠곡병원장 겸 경상북도 나 이동진료 반장, 보건복지부 만성병 과장, 보건국장, 대한나관리협회 회장 등 모두가 나병에 관한 일을 하는 곳이다. 이후 그는 한국어린이재단 회장으로 자리를 옮기며 또 다른 구상에 잠겼다.

  ■ 한사랑마을 차윤근 박사

  인간의 마지막 귀착지는 다 같지만 그곳에 도달하기까지의 길은 여러 갈래가 있다. 나는 의사로서, 또 사회복지사로서 평생을 어두운 인생의 뒷길에서 고생하고 소외당한 사람들과 같이 살아오면서 불우한 사회의 이면상을 많이 경험했다. 이에 따라서 나의 성품과 삶의 태도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차윤근박사「아쉽지만 후회 없이 달려온 길」중에서

  경기도 광주 한사랑 마을에서 차윤근 박사(83세·예방의학전문의, 노인병인정의)님을 만났다. 6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분이셨다. 자신보다는 남을 더 많이 생각하느라 흘러가는 세월과 동떨어져 버린 것은 아닌지.

  그의 본격적인 얘기는 1958년쯤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예방의로서 국립 소록도병원에 부임했을 때, 그의 나이 불혹에 접어 들었다.

  “지금이야 나병 환자들이 많이 줄었고… 있어봤자 나이든 사람들이지만 그때만 해도 우리 나라가 못살았잖아. 6,100여 명이 그곳에 있었지. 그러다 보니 정부 보조로는 늘 생활이 삐듯했어.”

  그랬다. 당시 소록도의 중앙공원은 아름다웠지만 환자들은 매우 가난했고 주거지도 깨끗하지 않았다. 일단 그는 이들의 소일거리이며 개인 수입원이 되는 돈사와 계사를 숙소에서 좀 떨어진 곳으로 일제히 옮기는 데 동의를 얻었다. 그리고 연료도 장작에서 석탄으로 바꾸는 데 힘썼다. 차츰 차츰 나아지는 생활과 건강에 늘 관심을 가져다주는 차 박사님이 이들에게는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그러나 4.19 혁명은 소록도에서 변화를 불러왔다. ‘자부(慈父)’라 부르며 따랐던 차 박사님이 국립 보건연구원 교수로 발령난 것. 소록도 환자들은 너나할 것 없이 대대적인 그의 유임 운동에 나섰다. 보이지 않는 눈을 번득이며 침 흐르는 입술을 주먹으로 닦아가며 열렬히 웅변하던 노인, 불구가 심하고 양손에 손가락이 없는 이들의 절규가 소록도 하늘에 울려 퍼졌다. 결국 보사부 당국에서는 복귀를 약속했다.

  그의 꼼꼼하고 빈틈없는 치료와 뜨거운 열정 덕분에 소록도는 하나하나 결실을 맺어갔고 새로운 모습으로 변모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는 우리 나라 나병 관리 사업에 참여하고 있다. 두 번에 걸친 소록도병원장, 국립 칠곡병원장 겸 경상북도 나 이동진료 반장, 보건복지부 만성병 과장, 보건국장, 대한나관리협회 회장 등 모두가 나병에 관한 일을 하는 곳이다.

  이후 그는 한국어린이재단 회장으로 자리를 옮기며 또 다른 구상에 잠겼다. 소외당하고 그늘에 숨어사는 그리고 더러는 가정의 화목까지도 방해하는 장애아들을 보듬는 일이었다.

  1985년 5월 20일, 한사랑 마을이 드디어 개원을 맞았다. 경기도 광주군 초월면 신월리 소재 6만 평 위에 총 2,213평의 현대적 시설을 갖춘 한사랑 마을. 단순히 0세~18세까지의 장애아를 보살피는 곳과는 차원이 다르다.

  알록달록 예쁜 벽지하며 아주 말끔한 아이들, 잘 정리되어있는 장난감과 아이들의 옷가지, 또박또박은 아니지만, ‘안녕하세요’라며 환히 웃는 아이들이 너무나 밝아서 기분이 좋다. 오기 전 아니 일상에서 장애아를 생각하며 가졌던 무거운 마음이 일순 가벼워진다. 영아원도 있고 학교도 있고 덴탈 클리닉, 체력단련실, 물리치료실, 노래방 등등 없는 게 없다. 장애아들을 위한 ‘천국’이지 싶다.

  시설도 시설이지만 오늘의 한사랑 마을이 있기까지 거름을 만든 차 박사님, 이곳을 거쳐간 원장님들, 현재의 강병권 원장님, 이효숙 사무국장님, 김계자 요육과장님, 아이들의 방에서 애써주는 선생님들, 그 외 자원봉사들이 있기에 한사랑 마을은 그야말로 사랑으로 넘쳐간다.

  한사랑 마을이 있는 산자락 끝에는 차 박사님이 기거하는 집이 있다. 그 집 앞 베란다 쪽에는 ‘행림(杏林)살구나무집’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옛날 중국의 한 의사가 어려운 사람들을 무료로 치료해 주곤 했는데, 돈이 없는 환자가 미안해하면 ‘살구나무나 심고 가라’고 했다는 데서 유래했다는 것이다. 그 의원 주위에는 살구나무가 가득했다고 한다.

  “내가 혹시 더 이상 못 오게 돼도 여기 살구나무집에는 의사가 계속 살았으면 좋겠어. 우리 얘들을 가까운 데서 꾸준히 봐줘야 할 의사는 꼭 있어야 하거든.”

  차 박사님은 한사랑 마을 말고도 적을 둔 곳이 있다. 서울시립 구로노인종합복지관이다. 일주일에 세 번 이곳을 찾고 나머지는 한사랑 마을의 아이들과 시간이다.

  “왜 나이 들면 여기저기 다 아프잖아. 여기서 오가는 할아버지, 할머니들 여기 아프고 저기 아프다는 얘기 들어주고, 약 지어주고 그런 일을 하지. 같이 나이 들어가는 처지라 잘 통해.”

  여름동안 이곳은 보수 중이어서 문을 닫았다. 하지만 그는 쉬지 않고 독거 노인들을 찾아 다녔다. 당신만을 찾아오는 노인들만을 접하다가 이렇게 다녀보니 그 형편이 말이 아니더라고, 좁디좁은 방에 청결은 먼 나라에 얘기안양 살고 있는 노인들의 생활이란.

  차 박사님에게는 또 하나의 소망이 있다. 의지할 데 없는 노인들의 여생을 즐겁게 보낼 수 있는 곳을 만드는 일이다. 아마도 내년 9월에는 부산엔 그런 실버타운을 만들 수 있을 거란다.

  차 박사님은 ‘Good docter can’t be rich’를 늘 마음에 되뇌인다. 그래서 육남매를 기르면서 당신과 가족보다는 소외되고 불우한 이웃들을 위해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아주 의욕적인 분이다. 매일매일 영자 신문을 꼭 읽으시고 무슨 일이든 솔선수범을 하신다.

  “저희 원장님은요. 젊은 우리들의 우상이에요. 미래의 모범상이죠.”

  구로노인종합복지관의 김 간호사의 말이다.

  차 박사님은 당신 스스로 이렇게 살 수 있었던 것이 모두 아내 덕이란다. 돈 없다고 단 한 번의 불평도 없었고 늘 옆에서 힘이 되어 줬다고, 지금 이 순간도 그는 누군가에 힘이 되기 위해 열심히 달려가고 있다.

  차 박사는 1975년 한국복지재단의 모태인 기독교아동복리회 회장을 맡은 이래 해외 원조에 의존하던 조직을 규모, 재정, 사업내용, 대외인식도 등 질적인 면이나 양적인 면에서 국내 최고의 민간복지기관으로 성장시키고 1995년 퇴임을 결정했다. 그 때 주위에서는 차 박사의 퇴임 만류가 끊이지 않았으나 그를 되돌릴 수는 없었다. “20년간 사회복지사업에 종사하면서 저 자신의 성격과 행동이 많이 달라진 것을 느낍니다. 덜 교만해지고 더 겸손해진 것 같습니다. 제가 이 사업에 함께한 것은 저에게 참으로 보배로운 기회였으며 앞으로 여생에 좋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퇴임 자리에서 차 박사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또한 공직생활 중의 강직함과 청렴함은 여러사람의 입을 통해 전해진다. 차 박사는 공직생활중 한 번도 `윗 분’을 찾아볼 줄 몰랐고, 이 때문인지 하마평이 무성했던 자리까지 다른 이에게 넘어간 적도 있었다. “자동차가 거의 없던 시절 아버지는 관용차로 출퇴근을 하셨지만 아무리 집안에 급한 일이 있더라도 절대로 차를 내주시지 않았다.”는 큰 딸 희애씨의 말 속에서도 그의 성품이 엿보인다.

  노인복지가 현재 우리에게는 무엇보다 가장 우선한다고 생각하는 차 박사는 노인문제에 인색한 사회여론에 안타까움을 드러낸다. “80된 부모를 60된 자식이 모셔야 되는 시대가 벌써 왔는데 왜 관심이 없는지…” 아름다운 사람 차윤근은 그 삶 그대로 우리에게 살아간다는 의미를 되새기게 해주고 있다. 다시 의사로서 환자를 진료할 수 있다면 친절한 의사로 남고 싶다는 작은 소망도 감추지 않는다. 결코 꾸미지 않고 꾸밀 수도 없는 삶의 편린. 항상 `누군가’가 아닌 `내가’가 먼저였던 사람… 평생의 미덕이었던 베품과 나눔, 그리고 누구도 범접할 수 없었던 강직함…. 우리는 이 가운데 얼마나 갖고 살아갈까. 그렇지만 이 보다 더 소중한 것은 그의 가슴속에 남아 있는 생명에 대한 고귀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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