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 토박이' 인술통한 고향사랑 34년 세월
'강진 토박이' 인술통한 고향사랑 34년 세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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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5.03.10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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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회 보령의료봉사상 수상자 김영배 원장

· 1931년 전남 강진 출생
· 1957년 전남의대 졸업

  김영배 원장이 인술의 사도로서 오늘까지 고향을 지키며 살아오는 동안에는 많은 시련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김 원장은 그 모든 어려움을 근검과 성실, 그리고 사랑이라는 믿음을 실천하며 극복할 수가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삶이 주님의 뜻임을 믿고 의지하고 따르므로써 가능했던 삶의 진실된 모습이었다.

 

 

  ■ 전남 강진읍 중앙의원 김영배 원장

  전라남도 강진은 다산 정약용 선생의 유배지라는 선입감 때문인지 멀고도 외진 느낌이 든다. 그러나 강진처럼 특이한 지역도 없다. 지도를 놓고 보면 이내 알 수 있듯이 강진만은 내륙 깊숙이 바다를 끌고 들어와 탐진강과 이어놓고 있다. 이런 천혜의 조건은 일찍이 서남해안의 바닷길과 한반도의 서남부를 연결하는 해로상의 요지로서, 그리고 전남의 서남북 지역을 동서남북으로 연결시켜 주는 육로교통의 중심지로서 그 역할이 클 수 밖에 없었다. 탐라(제주)와의 오랜 인연을 말해주는 탐진(耽津)이라는 명칭이나, 청자문화의 꽃을 피웠던 도요지가 이 지역에 밀집해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지리적 특성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다산의 유배문학과 영랑의 서정시가 어울려지면 강진은 그야말로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문화의 텃밭으로서 손색이 없어진다.

  중앙의원 김영배(金永培) 원장은 바로 이와 같이 유서 깊은 강진에서 태어나 강진을 지켜오고 있는 토박이 의료인이다. 중앙의원이 위치한 남성리는 군청과 경찰서 등이 인접해 있는 읍내 중심가로서 병원 맞은 편에는 또 군단위로서는 전국에서 제일 큰 규모와 시설을 자랑하는 도서관이 자리하고 있다. 도서관 정원에는 이 고장 출신인 영랑과 현구의 시비가 세워져 있는데 김영배 원장은 이따금 이곳을 찾아 마음의 여유를 가져보고는 한다. 하긴 김 원장 자신 이 지역 모란촌문학동인회 동인으로서 동인지인 ‘모란촌’에 이따금 시 등을 발표하는 맑고 고운 시심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김영배 원장이 인술의 사도로서 오늘까지 고향을 지키며 살아오는 동안에는 많은 시련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김 원장은 그 모든 어려움을 근검과 성실, 그리고 사랑이라는 믿음을 실천하며 극복할 수가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삶이 주님의 뜻임을 믿고 의지하고 따름으로서 가능했던 삶의 진실된 모습이었다.

  김영배 원장은 1931년 강진읍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를 이곳에서 마친 김 원장은 현재의 광주일고 전신인 광주서중을 졸업후 전남의대를 지원케 되는데 여기에는 그럴만한 사연이 있었다.

  김 원장의 원래 꿈은 공대를 지원해 과학자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졸업반이었던 6학년때 6·25가 발발해 피난을 다니는등 1년간의 세월을 허송한 뒤 의대 학장의 권유로 전남의대에 입학을 한 것은 1952년의 일이었다. 김 원장은 광주서중 시절 이름을 날리던 정구 선수였다. 졸업반이던 6학년때는 서울약대 주최 남녀중학교 전국대회에서 단체전 우승을, 전국체육대회에서는 도 대표로 개인전 우승을 차지할 정도로 눈부신 활약을 보였다. 따라서 호남인 치고 정구선수 김영배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평소 호감을 갖고 있던 의대 학장도 진로에 혼선을 겪고 있던 그에게 의사가 될 것을 권유함으로써 전남 의대 진학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김 원장은 의대 진학후 별다른 어려움을 겪지는 않았다. 요즘에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지만 당시만해도 운동선수라고 해서 공부를 게을리 할 수 없던 시절이었다. 따라서 생각에도 없던 의대를 진학했지만 학업에 별다른 어려움은 없었고 세월이 흐를수록 인술에 대한 매력이랄까 사명감 비슷한 느낌도 들기 시작했다.

  1957년 전남의대를 졸업한 김 원장은 군의관 생활을 거쳐 63년 강원도 원주시에서 성심의원을 개원한 후 1년 정도를 머물렀다. 그가 제대후 곧바로 고향인 강진으로 가지 않고 군시절 인연을 맺은 원주에서 세를 얻어 개원을 한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김 원장의 집안은 김해 김씨로서 11대조부터 강진을 지켜온 뿌리깊은 가문이었다. 그러나 근세에 와 가세가 기울며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고 김 원장의 직계 또한 가솔만 많은 채 집안이 어렵기는 매일반이었다.

  김 원장은 7남매중 장남이었다. 이들 말고도 이복형제가 셋이 있었고 양친부모가 살아가신데다 작은 어머니까지 있었다. 이중 누님 한 분만 출가를 했을 뿐 나머지 12명은 모두 강진에 남아 있었는데 여기에 처와 슬하의 5남매를 합치면 부양가족은 16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수중의 재산이라고는 전역시 퇴직금으로 받은 7만원 밖에 없었으니 김원장이 고향행을 망설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김 원장은 64년 고향인 강진으로 돌아와 동성리에 중앙의원을 개원했다. 어차피 짊어져야할 십자가라면 회피할 것이 아니라 떳떳이 마주 서기로 한 것이었다. 이러한 결심을 하게 된데에는 장남으로서 가정을 일으켜 세워야 한다는 절실한 책임감도 있었지만 이를 뒷받침한 것은 독실한 신앙심이었다. 김 원장은 62년 이미 원주 남동본당에서 세례를 받은 바 있는 천주교 신도로서 이때 뿐이 아니라 이후의 삶에서도 신앙심을 통해 많은 힘과 용기를 얻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하튼 고향으로 돌아와 동성리에서 중앙위원을 개원했던 김 원장은 이듬해에 현재의 남성리 145번지로 병원을 이전했다. 이곳은 강진읍 중심지로서 원래부터 병원이 있던 곳인데 원장이 별세하자 건물을 임대해 중앙의원을 옮긴 것이었다. 그 후 이를 집터와 함께 인수해 85년경 2층짜리 신축건물을 완공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병원 건물 뒤로는 오래 된 한옥을 개량한 가정집과 잘 꾸며진 정원이 있다.

  이제 고향인 강진으로 돌아와 김 원장이 인술을 펼친지도 어언 30년째에 이르고 있다. 김 원장은 그동안 암담하기만 했던 그 많은 부양가족을 건사해 기울어졌던 가정을 다시 일으켜 세웠고, 슬하의 5남매 중에는 둘째 아들이 연세의대를 졸업후 군의관으로 재직중이어서 가업을 계승할 터전도 마련해 놓고 있다. 그러나 김 원장은 가정의 안위만 돌본 것은 아니었다. 본업인 인술을 통해서는 물론이거니와 강진의 발전과 주민을 위한 일이라면 언제 어디서나 발벗고 나서는 적극성을 보여 왔는데 그것은 그동안의 활동들이 잘 말해 주고 있다.

  김 원장은 강진 로타리클럽 창립멤버로서 5·10대 회장을 지냈으며, 군정자문위원회 부회장·광주지방검찰청 장흥지청 자문위원·광주지방법원 장흥지원 자문위원·강진군정화위원회 부회장·영랑동상건립추진위원회 부회장·애향운동추진협의회 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또한 모교인 중앙초등학교 육성회장과 총동창회 부회장을 비롯해 강진교육청 교육행정자문위원 등을 맡아보았다. 그런가 하면 회무에도 앞장 서 강진군 의사회장을 20년이 넘게 지냈으며 전라남도 의사회 부회장 및 의원총회 부의장을 맡아 활약한 적도 있다. 이밖에 활쏘기 모임인 사우회 회장도 맡고 있는데 김 원장은 이런 활동들을 통한 공적이 인정되어 내무부장관 감사장을 비롯해 보훈처장 감사패 등 각종 기관이나 단체로부터 많은 표창을 받은 바 있다.

  그러나 이러한 대외적인 활동들은 부수적인 일일 뿐 김 원장의 본업은 어디까지나 인술이다. 따라서 김 원장은 의료계에 대한 애정도 깊고 할 말도 많다. 김 원장이 가장 우려하는 것은 인술에 대한 사회적 불신. 사실 인술에 대한 국민들의 존경심이랄까 신뢰도는 과거에 비해 많이 퇴색한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하지만 그러한 변화를 사회적 책임으로만 돌릴 것이 아니라 의사들 스스로 일차적 책임을 지려는 새로운 각오와 정신무장 없이 해결을 어렵지 않겠느냐는 것이 김 원장의 진단이기도 하다.

  강진을 30여년 지켜오는 동안 무료진료나 치료 등 알게 모르게 주민들을 위해 많은 선행을 베풀어온 김 원장은 이제 본격적이고도 구체적인 사업을 구상중에 있다. 크게 이루어 놓은 것은 없지만 그래도 그동안 근검 절약을 통해 어느정도 축적된 재산을 사회환원의 차원에서 강진 주민들을 위해 희사할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여러 가지 방안들이 검토되고 있지만 현재로서 가장 유력시 되는 것은 장학사업. 인재에 대한 투자야말로 강진의 발전을 위한 가장 확실한 밑거름이 될 수 있다는 김 원장의 믿음 때문이다.

  강진은 변하고 있다. 개원 당시만해도 11만이던 주민들은 현재 7만밖에 남아 있지를 않다. 그러한 외형적인 변화속에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김 원장의 인술에 대한 사랑과 애정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강진성당 사목회장을 맡아보고 있는 김원장은 주님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은 늘 죄짓는 사람일 뿐이라고 겸손해 하며 그러나 믿음이 있기에 매일 참회하는 가운데 10가지 지을 죄를 9가지로 줄일 수는 있지 않겠느냐고 담담히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 미소속에 중앙의원이 왜 주민들로부터 많은 사랑과 신뢰를 받고 있는지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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