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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맹의 도를 통해 깨우친 올바른 '정'의 올 곧은 삶

공맹의 도를 통해 깨우친 올바른 '정'의 올 곧은 삶

  • Doctorsnews kmatimes@kma.org
  • 승인 2005.03.10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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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회 보령의료봉사상 수상자 오병천 원장

· 1918년 충남 보령출생
· 검정의
·1998년 7월 29일 별세   

  보령군 웅천면 성도의원의 오병천 원장은 1913년 3월생이다. 그러니까 우리나이로 일흔 다섯인 셈이다. 전라북도 시행 한지의사 시험을 거쳐 한국의사 자격시험에 합격한 후 40여년 동안 지역사회를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해 온 오 원장의 외모는 전혀 70이 넘었다 할 수 없을만큼 정정하다.


 

  ■ 성도의원 오병천 원장

  물감으로 그린 듯 파란 가을하늘 밑에 누런 곡식이 영글어 있다. 맑은 가을날 넓은 평야를 가로지르는 열차는 그야말로 꿈으로 달리는 기차다. 본래 충남선이란 이름으로 1931년 8월 1일 개통된 이래 충청남도 남서부 지방의 교통 중심이 되고 있는 장항선 기차를 타면 예당평야의 넓은 들을 달리게 된다.

  서울을 출발한 장항선 기차가 철컥 소리를 내며 간이역을 지날 때마다 어김없이 펼쳐지는 높고 맑은 하늘과 드넓은 평야 산자락에서 흘려내려 마을을 감싸도는 이름 모르는 냇물들과 그 사이에서 추수를 하는 농부들의 바쁜 움직임 속에 어느새 기차는 온양과 대천을 지나 웅천에 도착했다.

  충남 보령군 웅천은 일찍이 비석돌로 그 이름을 날리던 곳이다. 전국의 내로라하는 비석돌 생산지 중에 웅천 것이 첫 손가락에 꼽힌다고 한다.

  보령군 웅천면 성도의원의 오병천 원장은 1913년 3월생이다. 그러니까 우리나이로 일흔 다섯인 셈이다. 전라북도 시행 한지의사 시험을 거쳐 한국의사 자격시험에 합격한 후 40여년 동안 지역사회를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해 온 오 원장의 외모는 전혀 70이 넘었다 할 수 없을만큼 정정하다.

  오 원장은 충남 보령군 웅천에서 7남매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농부인 부모님 밑에서 평범하게 자랐다. 여러 가지가 어려웠던 시기인지라 오 원장이 자라는 동안 형님과 누이가 세상을 떠났고 위로 형이 두 명 남게 되었다.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면 오 원장도 별 수 없이 농사를 배웠을 것이다. 그러나 어렸을때부터 총기가 뛰어나 남다른 면이 있었던 오 원장은 당시 검정의사에 대한 눈을 떴고 의사가 되겠다는 결심을 했다.

  검정의사에 대한 개념조차 없었던 가족들에게는 구체적인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를 위해 스무 살 때 집을 떠난 오 원장은 웅천읍내에 있는 조그마한 한약방에 사환으로 취직을 했다.

  이곳에서 오 원장은 약재를 썰으며 심부름을 했다. 무엇이든지 꼼꼼히 하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성격인지라 한약방 주인은 그를 유심히 보고 있었다. 그러나 젊은이의 일하는 솜씨가 제법이라고 생각할 즈음 오 원장은 한약방 일을 중단했다. 이때 오 원장의 나이가 21세. 무작정 뒷치닥꺼리만 하다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한 오 원장은 인근 서산의원으로 일터를 옮겼다. 이 무렵 결혼을 하였고 부인과의 사이에서 3남 3녀를 얻었다.

  의사가 되겠다는 소망을 간직해 오던터에 마침 한의사 시험이 있었다. 스물 세 살 무렵 한의사 시험을 치렀고 우수한 성적을 거두웠다. 그러나 25세가 제한 연령이라는 이유로 합격 점수를 받았음에도 불합격 판정을 받았다. 오 원장의 부친이 사망한 것도 이무렵이다. 엎친데 덮친 격이었다.

  부친의 장례를 치른 오 원장은 바로 만주로의 유학을 시도했다. 당시는 적지 않은 수의 젊은이들이 만주와 일본을 유학지로 생각하고 있을 시기였다. 오 원장은 만주로의 유학 길을 준비하면서 서울에 있는 모씨와 수 차례 서신교환을 했다. 만주로 가는 장도의 전초기지 역할을 해준 서울에 있는 모씨는 공주가 고향인 사람이다. 서울에는 아무 연고도 없으며 공주사람의 말만듣고 상경했을 때가 그러니까 1941년인지 그 이듬해인지 아득하다.

  오 원장은 2년여동안 의사로서의 일을 배우고 익혔다. 밤마다 공부를 하던 곳인 동부의원(원장 최만용)에서의 생활을 그 후 정리하고 전라북도 시행 한지의사시험에 응시한 것은 일제의 억압이 극도에 달했던 1943년 5월이었다. 시험합격은 비록 한정된 지역이기는 해도 오 원장에게는 새로운 길을 열어 주기에 충분했다.

  1943년부터 1945년까지 전북 순창군 복흥면의 공의(公醫)로서 활동하던 오 원장은 그러나 한지의사가 또다른 울타리라고 생각했다.

  1943년 있었던 한지의사 시험때도 28명 중 2명 합격이라는 어려운 관문을 뚫었지만 한국의사 자격시험에서도 오 원장은 약 17 : 1이라는 높은 경쟁률에서 개가를 올렸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부터 6.25사변이 끝나던 해까지 보령군 미산면에서 의원을 운영하던 오 원장은 그후 고향(웅천)으로 잠시 의원을 옮긴뒤 바로 보건소장이 되었다. 이전까지만 해도 대천보건진료소였던 것이 오 원장의 부임을 계기로 보령군보건소로 승격하였던 것이다. 약 10년동안 보건소 소장직을 맡으면서 크고 작은 일들을 헤아릴 수 없으리만치 많았다.

  보건소 소장이라고는 하지만 공무원 봉급이야 뻔한 것이다. 웅천에서 의원을 조금 더 운영했어도 경제적으로 충분한 여유를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오 원장은 애초부터 재물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이렇게 경제적인 무리를 감수하면서 보냈던 시간이 흘러 10년이 지났다.

  솔직하게 얘기하자면 대학을 다니는 네 명 자녀의 학비를 대기가 벅찼다. 물론 두 아이가 장학금을 타기는 했지만 그렇더라도 공무원 월급에 생활비며 대학교 학비가 수월 할 리 만무하였다. 오랫동안 보건소 소장으로 일해왔던 오 원장은 그래서 보건소 일을 그만두고 1966년 대천읍에서 조그마한 의원을 다시 개원했다.

  그러니까 대천의 개원은 오 원장에게는 세 번째 개원이 된다. 이미 이야기 됐다시피 1946년 미산면 개원이 처음, 1953년 웅천에서의 개원이 둘째요, 그 다음이 대천인 것이다.

  “애들 학비며 생활비 등을 위해 다시 개원했습니다.”  오 원장은 솔직한 사람이다. 또한 그의 얼굴 어는 구석에서도 악의를 찾아볼 수 없었다. 덕스런 얼굴에서 그대로 선한 빛이 배어나왔다. 연실 허허 웃는 오 원장은 자신의 말대로 낙천주의자요, 욕심없는 어린아이처럼 보였다.

  이제껏 의사노릇하면서 남을 속인 적이 없다고 말하는 오원장. 잘못 들으면 의사가 사람을 속인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 의술을 빌미로 돈벌려는 욕심을 앞세우지 않았다는 말을 오 원장은 그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15년간 대천읍에서 개원시절을 끝내고 고향인 웅천으로 자리를 옮긴 것은 1982년이다. 그후 지금까지 계속해서 웅천에서 성도의원을 개원하고 있는 오 원장은 건강한 사람이다.

  오 원장은 어린 시절부터 한문을 많이 공부했다. ‘맹자’, ‘논어’를 선친과 서당을 통해서 배웠던 오 원장은 인터뷰 중에 청을 하자 곧 ‘맹자’ 제선왕편을 줄줄 암송해냈다. 공맹(孔孟)의 도를 깨우쳐서 였는지는 몰라도 오 원장의 좌우명이요, 모토는 정(正)이다.

  “세상을 살려면 바르게 살아야 해요, 그것이 제일입니다. 허위란 것은 1백년이 지나 간들 진실이 될 수 없잖아요. 양심을 속여서는 안되는 법입니다. 세상의 것은 다 속일 수 있어도 제 양심은 못 속이는 법입니다. 이것이 내 모토요 철학입니다.”

  지금부터 약 20년전부터 오 원장은 붓글씨를 시작했다. 지금은 상당한 수준에 올라있어 86년 12월에는 한국문화예술협회가 주관하는 대회에 특선 입상, 87년 3월 동남아문화예술협회 특선입상, 92년 6월 예문회(藝文會) 전국 창작미술 대전 수상 등 각종 대회에서 화려한 수상경력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이같은 글씨를 누구로부터 따로 배운 바 없이 혼자서 익혔다는 것이다.

  시간이 날 때마다 수양하듯 글씨를 쓰고있는 오 원장. 50여년을 해로한 부인과 사별 할 때나, 3년 전 교통사고로 장남이 사망했을 때도 그 아픈 마음을 글씨로 달랬다.

  성도의원내 진찰실에는 말할 것도 없이 지필묵이 갖춰져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붓을 들었던 것을 알 수 있으리만치 벼루엔 먹물이 마르지 않은 채 그대로였다.

  반 백년 가까운 동안 의사생활을 하면서 가장 활발히 그리고 정열적으로 일하던 때는 대천 읍에서의 15년이다. 물론 그 외 지역에서도 거의 혼자다시피 한 의사 생활이었다. 예컨대 미산, 웅천, 대천 시절에는 군내 주변 면소재지며 산간 오지 할 것 없이 안 가본 지역이 없다. 맹장수술, 소파수술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치 많은 수술을 했으며 그때 받아냈던 아이가 이제는 성장해 40줄에 다다른다.

  오 원장은 그때의 일을 모두 기억해내지 못한다. 그저 자신이 돌보지 않았더라면 죽을 뻔한 사람이 많았고 시간과 계절을 가리지 않고 연락을 받은 즉시 환자를 돌봤던 생각밖의 자세한 기억들은 잊었다. 오 원장의 입언저리에는 주름이 잡혀갔고 살짝 웃는 미소속에서 의사로서의 인술을 펼쳤던 그의 과거를 엿볼 수 있었다.

  다시 직업을 택한다해도 의사를 하고 싶다는 오 원장. “돈을 벌만큼 벌었으니 영감님은 그냥 오셔서 진찰 받으세요.”라고 말하며 고령의 노인에게 무료진료를 시작한지 이미 여러해, 극빈환자를 아무도 모르게 돌보고 있으며 개최되는 서예전들을 통해 얻어지는 수익금으로 어린이 가장을 돕는다는 사실, 이러한 일련의 일들은 오 원장에겐 이제 자연스러울 뿐이다.

  “현재의 삶이 무척 행복하다”고 이야기하는 오 원장의 두 아들과 딸 역시도 현직 의사이다.

  오 원장은 평소 ‘단사호장 재누항 낙재기중(簞食葫奬 在陋巷 樂在基中)’이라는 말씀을 좋아한다. 도시락 밥 하나, 비루한 거리에도 즐거움이 있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는 이말 속에 오 원장이 살아온 세월이 묻어있다.

  고향마을에서 40여년간 오늘도 주민들의 건강을 위해 인술의 손길을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는 오 원장을 모르는 이웃은 읍내에 거의 없다. 인터뷰를 마치며 나오자 한 아낙네가 오 원장에게 사투리 섞인 말투로 넙죽 인사를 하며 웃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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