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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진 건 의술뿐' 마음이 넉넉한 시골 할아버지
'가진 건 의술뿐' 마음이 넉넉한 시골 할아버지
  • Doctorsnews kmatimes@kma.org
  • 승인 2005.03.10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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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회 보령의료봉사상 수상자 강명흡 원장

· 1923년 함북 청진 출생
· 한지의

  강 원장은 의사로 살면서 욕심부리지 않고 정직하게 살아온 것만으로 다행스러워 한다. 홀로 남하해서 온갖 고생을 다해온 그이기에 누구보다 어려운 이들을 감싸줄 줄 안다고도 할 수 있다. 행상 등으로 돈을 벌어 생활하다 포천에 개업을 한 그는 졸업도 못한 공부가 아쉬워 바쁜 와중에도 다시금 학업을 계속했다. 경희대학교 한의과를 졸업하고 검정과 국가고시로 의사면허증을 얻어 한의사 면허증과 더불어 한꺼번에 두개의 면허증을 따기도 한 강 원장이다.

  ■ 경기 포천군 신북면 강명흡 원장

  눈 쌓인 시골은 더욱 평화스럽기만 하다. 화려하도록 아름다운 눈꽃이 흐드러지도록 피어있어도 화려함보다 오히려 따뜻하고 포근한 무엇을 느끼게 하는 것이 인상적이다. 마음의 고향, 시골은 늘 변함없이 그 자리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조용히 다독거린다.

  경기도 포천군 신북면 계규리, 포천에서 내려 택시로 7분쯤 가다보면 자그마하고 조용한 마을에 이른다. 이곳에서도 눈꽃은 내려 고요하고 적막한 시골의 모습을 은근하게 감싸주고 있다. 이곳은 사실 겨울풍경보다 더 아름답고 더 따뜻한 이야기가 사람들의 가슴마다 담겨져 있는 곳이기도 하다. 아무라도 붙잡고 이야기를 물으면 마치 자신의 일인양 즐겁게 신이나서 얘기하는 것만 보아도 그 이야기는 비단 하루 이틀에 만들어진 것은 아닌 듯하다.

  강명흡(67)원장. 계류리의 기둥이라고 불리우리만치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심어온 강 원장이 바로 이곳 사람들이 말하는 아름다운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평생을 자신을 위해 살아온 시간보다 남을 위해 살아온 시간이 많은 그는 그런 시간들을 행복으로 느끼며 조용히 내색하지 않은 채 살아가는 인물이기도 하다.

  밖으로 내 보여지기를 싫어하는 탓으로 반강제적으로 인터뷰를 가질 수 밖에 없었지만 그를 대변하는 많은 마을 사람들로 인해 그의 행적을 짐작하고 남음이 있었다. 의사, 그래도 사람들이 우러러 보고 존경해 마지않는 의사라는 직책을 지녔으면서도 다른 사람들과 격을 灌?것을 가장 싫어하는 강 원장은 그저 시골에 사는 시골사람으로 보아 주기를 더 원한다. 조용하고 말없는 가운데 아름다움을 토해내는 시골모습 그대로 강 원장도 그런 시골의 모습과 너무나 닮아있다. 흰 가운만 아니면 여는 시골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의 모습, 그대로이다. 인자하고 넉넉히 웃어보이는 모습은 정이 넘쳐 흐른다. “나는 강 원장이라 불리는 것보다 할아버지나 내이름, 그리고 누구 아버지라고 불리는 것이 더 기분이 좋소”. 농사를 짓는 농부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하는 것 뿐이라는 강 원장은 의사이기보다 마을의 한 구성원이기를 더 원하는 사람이다. 그런 그의 성격탓인지 오히려 사람들은 그런 그에게 부담없이 다가선다. 조금만 아파도, 아니 아프지 않아도 이야기가 하고 싶어 찾아오는 사람들도 없지 않다.

  논밭을 가로질러 위치하고 있는 병원은 때론 사람들의 휴식공간이나 상담공간이 되기도 한다. 도심의 병원들에 비한다면 정말 볼품없는 병원이지만 많은 이야기가 산재되어 있는 곳이기에 따뜻함으로 넘쳐나는 병원이다. 때문에 차가운 시멘트 벽에 장식조차 없지만 깨끗이 정돈된 모습이 오히려 편안함을 전해준다. 비록 규모는 적어도 이 병원은 벌써 46년이라는 발자취를 담고 있다. 강명흡 원장의 땀과 사랑과 마음, 그리고 꿈이 숨쉬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초창기 자신이 치료했던 사람의 자식들, 또 그 자식들의 자식들까지 자신의 손으로 받아오고 치료해 오고 있는 강 원장은 포천의 변화를 지켜 보아온 포천역사의 산 증인이기도 하다.

  지금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포천도 많이 변했고 크고 작은 병원들도 많이 들어섰지만 강 원장이 병원을 개업할 때만 해도 병원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그러니까 강 원장이 최초로 병원을 개원한 셈이다.

  강 원장이 이곳에 뿌리를 내린 것은 1954년, 평소 알고 지내던 간호사의 소개로 처음 이곳을 알게 된 것이다.

  “처음 이곳을 알았을 때는 정말이지 형편없었지요, 난리가 끝난 후고 후미진 곳이라 빈곤하기 짝이 없었으니까요, 지금은 길도 잘 닦이고 사람들도 웬만큼들 살고 있지만 그때는 먹고사는 문제가 가장 큰 문제였으니까요, 그런데도 내 고향도 아닌 이곳에 끌렸던 것은 무엇때문이었는지 모르겠어요.”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탓으로 힘든 생활을 많이 해 본 까닭에 더욱 이곳이 마음에 들었다는 강 원장은 그동안 떠날 생각을 안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지낼수록 이곳 사람들의 인정에 반해 지금껏 눌러앉게 되었노라고 토로한다.

  개원 초 총각선생님으로 불리우던 강 원장은 그곳에서 교사로 있던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하고는 아저씨 선생님으로, 지금은 할아버지 선생님으로 불려지고 있다며 웃어보인다.

  초창기에는 의사라곤 강 원장 뿐이라 강 원장의 생활은 하루 해가 다 모자랄 정도였다. 그런데다 하루에도 수 없이 청해오는 왕진 때문에 발이 부르틀 지경이었다. 그런데도 그 생활이 힘들다거나 고통스럽게 생각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고 강 원장은 말한다.

  빈곤한 산골짜기 마을에 터전을 잡고 이것저것 궂은 일까지 도맡았던 강 원장은 왕진을 가거나 치료를 해 주고도 빈손이 되는 경우가 빈번했어도 거기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없는 돈을 억지로 마련해 주는 것이 부담스러웠다는 그이다.

  험한 산길을 걸어걸어 왕진을 다니면서 떠나고자 하는 마음보다 더욱 남아있어야 한다는 것을 굳게 다짐하게 됐다는 강 원장 그는 애초부터 의술로 돈벌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고 토로한다. 가난한 사람이였기에 가난한 그들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했던 것이다. 그래도 자신에게 의술이라는 가진 것이 있었기에 다른 이들을 위해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냐며 오히려 자신이 한 일을 대수롭지 않게 말한다.

  강 원장은 병원을 개원하면서부터 하나의 목표를 두고 시작했다. 그것은 다름아닌 무료진료, 그것도 하루 2명씩은 무료 진료를 하자는 목표였다. 하지만 그 목표는 깨지기 마련이었다. 2명의 목표는 4?5명이 되고 더 이상이 되기도 했다. 이 목표는 의료보험이 실시된 87년까지 행해졌다. 지금도 그 목표는 없어도 무료진료는 계속되고 있다. 1년에 1천명의 환자가 그에게서 무료진료를 받았고 계속해서 받고있는 셈이다. 강원장은 외상장부도 아예 두지 않는다. 시골에서는 으레히 있을 법한 일이지만 강 원장은 무료진료를 해 주는 셈친다고 한다.

  “그동안 도회지로 나가자는 유혹을 주위로부터 수 없이 받아왔어요. 때론 나쁜 방법으로 면허증만 빌려주어도 돈이 나오는데 무어 그리 고생이냐는 말도 들었구요. 그 때마다 지금까지도 이렇듯 잘 버터왔는데 지금에 와서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냐고 말합니다. 욕심부리고 싶지 않습니다. 지금 이대로가 가장 행복합니다.”

  주는대로 받고 못받으면 그만이라는 것이 그의 마음이다. 그런 강 원장이라 그런지 부인 임정순(59)여사도 강 원장과 너무도 닮아있다. 지금까지도 강 원장이 하는 일에 군소리 한번 안하고 묵묵이 도와온 부인이다. 지금은 아예 강 원장 곁에서 간호사 역까지 맡고있다. 시골이라 간호사들이 오래 있을려고 하지않아 부인이 발벗고 나선 것이다. 큰 딸이 의사인 덕에 웬만한 것은 배워서 이젠 능숙한 간호사가 됐다. 주위에서는 ‘면허없는 간호사’라 부르면서도 그런 두 부부에 감사함을 전한다. 더러 친구들은 돈 나갈데 없이 부자되겠다고 농담도 건네오기도 한다.

  지금은 사람들의 생활도 나아지고 교통도 편해져 일도 많이 나아졌다. 시도 때도 없이 다니던 왕진도 예전만큼 많지는 않다. 그래도 왕진이 제법 있다. 작년에는 너무 무리를 해 폐렴으로 고생하기도 한 강 원장은 그래도 지금껏 별 사고 없이 지내온 것을 감사해 한다.

  “지금까지 환자들과 충돌같은 것은 없었어요. 모두가 착하고 말 한마디면 그만인 사람들이 많았어요. 정말 법없이 살 사람들이지요. 지금 생각하면 아찔한 기억도 많은데 그 사람들 때문에 용기를 얻는 경우가 많았어요. 아이가 거꾸로 나오고, 그런 때도 넘기도 했으니 모두가 그들의 믿음때문이었지요. 1년 50?60명의 아이를 내 손으로 받았으니 그동안 줄잡아 1,500명정도를 받은 셈이지만 단 한명도 나쁜 일을 당하지 않았어요.”

  이 지역에 와 봉사하는 것으로 일평생을 다 보내고 있다고 걱정하는 이곳 이장 이윤의 씨의 말대로 강 원장은 지금껏 자신보다 남을 위해 살아온 시간이 많다. 83년부터 시작한 장학회에는 그가 그동안 마련해 온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4천여평의 땅을 내놓았다. 그 땅을 농사지어 나오는 수익을 그 해의 장학금으로 쓴다. 농사가 잘 될 때는 300?350만원 정도가 나오고, 잘 안될때는 250만원 정도가 나온다. 농사가 잘 안돼 수익이 적을 때는 사비를 또 보태 장학금을 조금이라도 늘린다. 생기면 생긴대로 여기저기에 도움을 주는 그인지라 오랫동안 병원을 운영해 온 그에게 남은 것은 지금 살고 있는 병원 딸린 집뿐이다. 이 집도 마을에서 고마움의 표시로 지어준 것이다. 정식으로 장학회가 마련되기 전에도 병원 개원때부터 장학금을 여러 학생들에게 주어온 강 원장은 지난 8년 동안만 250여명 가까운 학생들에게 학비를 주어온 것이다.

  강 원장은 또 하나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2,000주 가량의 잣나무를 가지고 있는데 잘 되기만 하면 10년 이내에 수확을 해 장학혜택을 더 줄 수 있겠다는 기대로 부풀어 있는 것이다. 우루과이 라운드로 행여나 손실이 생길까 우려하는 강 원장의 모습에서 아름다움이 흐른다. 죽어서 가진 재산 가져가는 것 못 봤다며 굶지 않으면 그만이지 더 이상 이 나이에 무슨 욕심이냐고 오히려 반문한다. 이곳은 모두가 내 가족이고 내 자식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아까울게 뭐있느냐는 것이다.

  사회에서 받은만큼 환원해야 하는데 아직도 거기에 못 미치고 있다고 서운해 하는 강 원장은 무료진료, 장학회 일말고도 자잔한 일도 서슴없이 나서고 있다. 그러면서도 아직 자신에게 도움을 준 사회의 이웃에 1만분의 1도 보답못하고 있다며 한숨쉰다. 해마다 이웃에 조금씩 도움도 주고 초등학교 4군데와 중학교 1군데에 교의도 맡아오고 있다. 학생들은 아예 무료진료다. 학생들에 관심도 많이 두는 그는 남들에게 전해지지 않은 선행도 부지기수일 것이라고 동네 사람들은 입을 모은다. 경로당에도 1년에 한번씩은 꼭 찾아가는 그는 자신의 회갑잔치를 하지않고 그 돈 전부를 경로당에 내 놓았다. 가난한 이웃에게는 사람을 시켜 식량을 나눠주기도 하는 그이지만 그들에게 인사치례 받기를 거부한다. 그런 인사치레를 받고자 시작한 일이 아니기에 궂이 그런 인사는 받고 싶지 않다는 것.

  이런 그에게 동료중에는 더러 판잔을 한다. 심지어 ‘거지의사’라고 부른다. 그래도 강 원장은 개의치 않는다. 실제로 가진게 없으니 거지는 거지 아니냐고 자조하기도 한다. 그래도 마음은 그들보다 부자라며 호탕하게 웃는다.

  둘밖에 없는 딸들에게 조차 강 원장은 풍족히 투자하지 않았다. 모두들 공부를 잘해 장학금으로 학교를 다닌 탓이다. 큰딸은 아버지 뒤를 이어 의사가 됐고, 둘째는 아직 학생이다. 식구들에게 조차 넉넉하지 못한 그는 그렇게 가진 것 모두를 나보다 못한 이들을 위해 주는 것을 즐거워한다. 집안만 봐도 초라하기 그지없다. 작은 공간에 가구라고는 25년전에 산 낡은 농뿐이다. 몇해 전 그를 취재하러 왔던 방송국 기자들도 그의 사는 모습에 혀를 찼다고 한다. 술 한잔 안마시면 누군가를 더 도울 수 있다는 계산부터 한다는 강 원장은 지금 자신이 있기까지는 자신의 공은 아니라고 말한다. 모두가 주위의 도움이라고 몇 번이고 읊조린다. 그동안 군수 도지사 내무부장관, 문교부장관상과 문화시민상 등 무수한 상을 받아온 그이지만 그는 그런 상들마저 부끄러워한다.

  21살에 이곳에 들어와 46년을 지내 오고있는 강 원장은 생전에 고향에 가보기를 원한다. 강 원장의 고향은 함북 청진, 이제는 포천이 제2의 고향이긴 하지만 지금은 제1의 고향이 되어 버렸건만 그래도 형제들이 숨쉬고 있을 고향을 그리워한다. 그러면서 한가지 바램이 있다. 자신이 죽어 후에라도 후손들이 할아버지 행적을 찾았을 때 남들에게 못된 짓 안하고 정직하게 살다 갔노라고 전해진다면 여한이 없을 뿐이란다.

  “처음에는 의사될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오히려 꺼려하던 일이었어요. 나는 선생이 되고 싶었어요. 학교에서도 내가 선생이 되어 돌아올것이라고 믿고 있었구요. 하지만 어머님 유언 때문에 의학을 택했지요.”

  심장병으로 고생하던 어머니가 동생을 출산하고 돌아가시면서 강 원장에게 의학 공부를 할 것을 권유한 것. 이로써 의학의 길을 택한 그는 가난했지만 경제적인 면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어머니 생각에서라도 나로 인해 아픈 사람들이 혜택을 받는다면 그것이 바로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효도라고 생각해온 그였다. 그런 연유로 인해 강 원장은 남을 돕는데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강 원장은 이 업을 하면서 욕심부리지 않고 정직하게 살아온 것만으로 다행스러워한다. 홀로 남하해서 온갖 고생을 다해온 그이기에 누구보다 어려운 이들을 감싸줄줄 안다고도 할 수 있다.

  행상 등으로 돈을 벌어 생활하다 포천에 개원을 한 그는 졸업도 못한 공부가 아쉬워 바쁜 와중에도 다시금 학업을 계속했다. 경희대학교 한의과를 졸업하고 검정과 국가고시로 의사면허증을 얻어 한의사 면허증과 더불어 한꺼번에 두 개의 면허증을 따기도 한 강 원장이다.

  만나는 사람마다 강 원장 이야기라면 물고기가 물만난 듯 신이나는 것을 보면 강 원장의 손길이 왠만히 미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함박눈이 다시금 온 세상을 덮고 있다. 뒤돌아 걸어가는 강 원장의 머리에도 어느덧 눈이 쌓이고 있다. 따뜻함으로 가득찬 정같은 눈이 그의 곁을 따라 다니며 세상을 아름답게 안아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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