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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장된 길 접고 비포장 길에서 '사랑' 밀알심기
포장된 길 접고 비포장 길에서 '사랑' 밀알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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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5.03.10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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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회 보령의료봉사상 수상자 최해관 원장

· 1940년 평남 평양출생
· 1967년 연세의대 졸업  
· 일반외과 전문의

  최 원장이 결심한 것이 바로 의대를 졸업한 후 시골로 내려가 이런 어려운 이웃들을 도와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막상 시골로 내려가자니 갈등도 많았던 것이 사실이었다. 모교로 돌아가거나 미국으로 유학의 길을 떠나거나 모두가 장밋빛 내일이 보장된 안정된 길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스스로의 갈등을 이겨내고 최 원장이 시골을 택할 수 있었던 것은 신부들에게서 영향이 컸던 것이 사실이었다.

  ■ 무주대우병원 최해관 원장

  사람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인술도 예외는 아니다. 아무리 높은 이상과 고귀한 꿈을 간직하고 있더라도 때론 일손이 부족해, 때론 경제적 문제를 해결 할 수 없어 이를 실현시키지 못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따라서 개인적인 꿈이나 이상이 어떤 조직이나 단체가 추구하는 목적과 부합돼 이를 상호 연계시킬 수만 있다면 그보다 바람직한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무주대우병원 최해관(崔海官)원장의 삶은 바로 그러한 바람직한 케이스의 본보기라 할만하다.

  최해관 원장은 1940년 생으로 평양이 고향. 46년 월남 서울에서 국민학교를 다니다 부친의 직장을 따라 대구로 전학후 중고등학교를 마쳤다. 그리고는 60년 연세의대에 진학케 되는데 이처럼 인술을 택하기로 결심한 것은 집안 어른들이 건강이 안좋은데다 그 자신 잔병 치레를 많이 한 까닭이었다. 어려서부터 질병이 인간의 큰 불행임을 몸소 체험한 최 원장은 의사가 되어 질병퇴치에 앞장 서 보겠다는 마음을 굳히게 되었고 그러한 결심은 결국 의대 진학으로 방향으로 설정케 된 것이었다.

  67년 연세의대를 졸업한 최 원장은 70년까지 군의관 생활을 거친후 71년 3월부터 76년 2월까지 원주기독병원에서 근무를 했다. 그리고는 그 직후 강원도 북평으로 내려갔다가 곧 양양으로 옮겨 약 2년간 최외과의원을 개업했다. 모교대학병원인 신촌 세브란스병원으로 오라는 은사들의 간곡한 권유에도 불구하고 최 원장이 이처럼 시골을 찾아 청춘을 불사르기로 결심한데는 나름대로 뜻이 있어서였다. 최 원장이 인술을 택하게 된 동기는 앞에서도 살펴본 바와 같이 질병 퇴치에 앞장서 보겠다는 나름대로의 뜻이 있어서였다. 그러나 최 원장이 인술의 필요성을 절감한 것은 대학시절 강원도 춘성군으로 무의촌 진료를 나가서였다. 하루는 이장으로부터 진료를 받으로 나올 수 없는 환자가 있으니 왕진을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방문해 보니 결핵 환자였다. 가족은 모두 도망치고 혼자 남은 환자는 끼니도 없이 보건소에서 주는 결핵약인 알약을 한 주먹씩 삼키고는 물만 먹고 연명하고 있었다. 이러한 인간 이하의 삶을 보고 충격을 받은 무료진료반 일행은 주머니를 털어 양식을 사주었다.

 그때 최 원장이 결심한 것이 바로 의대를 졸업한 후 시골로 내려가 이런 어려운 이웃들을 도와야 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막상 시골로 내려가자니 갈등도 많았던 것이 사실이엇다. 모교로 돌아가거나 미국으로 유학의 길을 떠나거나 모두가 장밋빛 내일이 보장된 안정된 길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스스로의 갈등을 이겨내고 최 원장이 시골을 택할 수 있었던 것은 신부들에게서 받은 영향이 컸던 것이 사실이었다.

  최 원장은 원주기독병원 근무시 신부님 소개로 가톨릭 신자와 결혼해 이후 신앙인이 되었지만 그런 것을 떠나서라도 신부님들의 삶은 많은 것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들은 몇푼 안되는 봉급마저도 쪼개어 어려운 이웃들을 돕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내일을 생각지 않고 오늘에만 충실하려는 사람들이었다. 이사할 때 보면 이삿짐이라고는 책 몇권에 불과한데도 그들의 삶은 행복에 차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최 원장은 자신의 삶이 부끄러웠다. 그러한 부끄러움은 최원장이 결국 갈등을 이겨내고 강원도 시골로 내려가 최외과의원을 개원케 되는 동기가 된 셈이었다.

  양양으로 내려가 최외과의원을 개원한 최 원장은 평소 소망했던대로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발벗고 나섰다. 당시만해도 양양에서는 최외과의원이 유일한 병원이어서 최 원장으로서는 할 일도 많았다. 무료진료도 열심히 했고 어려운 이웃들도 틈틈이 도왔다.

  그러던중 78년에 은사인 연세대 의무부총장으로부터 뜻밖의 제안을 받았다. 당시 대우문화복지재단 설립과 관련해 의료사업 분야의 자문을 맡고 있던 의무부총장은 최 원장의 참여를 권유한 것이었다. 재벌기업이라는 선입감 때문에 당초 마음이 내키지 않은 최 원장이었지만 의무부총장으로부터 자세한 설명을 듣고 보니 꼭 그런 것만도 아니었다. 오히려 기업 이윤의 사회환원이라는 차원에서 비영리적으로 운영될 대우문화복지재단의 의료사업은 어떤 면에서 개인적인 활동보다도 더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힘을 발휘할것만 같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를 승낙후 78년 10월 1일부로 의료원장에 취임한 최 원장은 무주대우병원의 산파역을 맡아 활약했으며 병원 개원후에는 병원 운영의 활성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현재 재단법인 대우문화복지재단에서 낙지와 오지 주민들의 의료 및 보건문제를 해결하는데 기여하기 위해 건립한 병원은 전국에 걸쳐 4개가 있다. 이중 3개가 섬에 있고 무주대우병원만이 육지의 오지에 위치한 셈인데 모두가 비영리 의료기관이다.

  무주대우병원이 위치한 무주군은 관광명소하고는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도 대표적인 오지인데다 주민들의 소득 또한 전국 평균치를 훨씬 밑돈다. 무주대우병원이 이곳에 자리를 잡은 것도 바로 그런 이유들 때문인데 무주대우병원은 비영리 의료기관답게 일반병원과는 다른 몇가지 특색을 갖고 있다.

  우선 주목되는 것이 지역사회 보건사업. 이 사업은 보건교육, 모자보건, 가족계획 및 결핵관리 등을 주축으로하고 있는데 현재 8개 시범마을을 선정, 조직적인 활동을 지속적으로 펼치고 있다. 시범마을에는 마을건강요원 1명씩을 선정, 주 1회 모임과 교육을 실시하고 있으며 이들을 통해 상호 유기적인 관계속에 가족계획, 결핵관리, 모자보건, 기생충 검사, 순회진료, 신체검사 등의 보건사업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이밖에도 특기할 만한 것으로는 장학사업을 꼽을 수 있다. 병원 개원 당시부터 지역사회 개발 일꾼을 육성한다는 목표아래 시행되고 있는 이 장학사업은 그동안 중고등학교 및 대학생 5백여명에 대한 혜택을 주어온 바 있다. 그러나 장학사업은 단순히 장학금만을 지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매년 초청 간담회 및 노력봉사를 실시하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남다른 점이 있다.

  이처럼 병원의 고유 업무인 진료 및 치료 외에 지역사회 보건사업과 장학사업 등을 병행해 실시하고 있는 것은 무주대우병원이 재단법인 대우문화복지재단에서 운영하는 비영리 의료기관인 점을 감안한다면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 일이다. 최 원장이 개원의로서의 활동을 그만 두고 이곳에 몸답게 된 이유도 바로 그러한 목적과 자신의 이상이 부합될 수 있다는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무주대우병원은 무주구천동 제1경인 나제통문 맞은편 언덕 위에 위치 주변의 경고나이 매우 아름답다. 2층 건물의 이 병원은 규모에 걸맞지 않는 최첨단 의료장비를 갖추어 과투자라는 말을 듣기도 하지만 양질의 의료를 제공하려는 열의의 결과임은 재론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무주군 주민들을 위한 보건 의료 서비스를 기획 관리 및 운영하는 중심의료기관으로서 1, 2차 진료 및 보건사업을 수행하고 있는 대우무주병원은 22명의 직원들이 최 원장을 정점으로 일사불란한 팀웍을 자랑하고 있다. 이러한 병원 활동을 통해 개업의 때보다 더 많은 활동을 하고 있다는 최 원장은 그러나 공적인 일에만 자신의 역량을 국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동안 사비를 털어 장학금을 지원하는 등 어려운 이웃들을 많이 돌보고 있으며 개인적으로 성당을 세우기도 했는데 현재는 천주교 공소회장을 맡아 신앙생활도 열심히 하고 있다.

  앞서도 얘기한 바와 같이 사람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고 인술이라고 해서 예외일 수는 없는 일이다. 최 원장이 개인적인 꿈과 이상을 무주대우병원이라는 비영리 의료기관을 통해 하나 하나 실현해 나가고 있는 모습은 마음 든든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의 나이 이제 51세. 아직도 활동할 시간이 많은 최 원장이 현재의 생활에 만족하고 있다는 사실은 무주대우병원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앞으로도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더 많은 봉사를 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에서 비롯되고 있는 것만은 틀림이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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