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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 초월한 사랑과 박애 '코리안 닥터'

국경 초월한 사랑과 박애 '코리안 닥터'

  • Doctorsnews kmatimes@kma.org
  • 승인 2005.03.10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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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회 보령의료봉사상 수상자 강원희 의료선교사

· 1936년 함북 성전출생
· 1961년 연세의대 졸업

  의료선교사로서 네팔에 이어 현재 방글라데시에서 8년째 해외 의료 선교활동을 펴고 있는 강원희 씨가 그러한 결심을 하게 된데에는 바로 Dr. Allen의 행적이 남긴 그 사랑과 박애의 정신을 가슴에 새겼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 강원희 해외 의료선교사

  이땅의 현대의학사에서 Dr. Allen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캐나다 출신인 그는 의료선교사로서 1884년에 내한, 고종의 전의(典醫)를 지냈으며 세브란스의전을 창설하는 등 초창기 우리의 의학발전에 많은 공헌을 한 인물이다. 그러나 이런 객관적인 업적외에도 그의 행적은 한 사람의 가슴속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 훗날 이땅에서 최초의 의료선교사를 배출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강원희(康元熙)씨, 의료선교사로서 네팔에 이어 현재 방글라데시에서 8년째 해외 의료 선교활동을 펴고 있는 강원희 씨가 그러한 결심을 하게 된데에는 바로 Dr. Allen의 행적이 남긴 그 사랑과 박애의 정신을 가슴에 새겼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강원희 씨는 1936년 11월 4일 함경북도 성진에서 태어났다. 고향에서 국민학교와 중학교를 마친 그는 서울로 상경해 대광고등학교와 1961년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했다. 이후 전주예수병원과 군의관 생활을 거쳐 1970년 12월 평소 꿈꾸던 무의촌을 찾아 강원도 간성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여기서는 몇 개월 머물지 못한채 다시 속초로 나와 대동의원을 경영케 되는데 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의료환경이 열악하기는 간성뿐이 아니라 속초도 마찬가지여서 인술을 통한 사회봉사라는 당초의 작은 소망을 실현하기에는 오히려 속초가 더 유리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속초로 나온 강원희 씨는 대동의원을 경영하며 생활이 어려운 환자들에게 무료치료를 해주는 한편 교회들과 연락해 시골을 순회하며 무료진료를 실시하기도 하였다. 인술뿐이 아니라 가난한 이웃들에게는 식량을 나누어주고 기도로 격려를 해주는가 하면 비록 성공은 하지 못했으나 정부에서 의료보험을 실시하기 전에 개인적으로 이를 실시해 보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런 생활도 몇 년이 지나자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참 삶을 다시 한번 밝혀준 인물이 Dr. Allen이었다. 그의 생애를 반추해 보는 동안 의료선교사가 되어야 겠다는 꿈을 키울수가 있었던 것이다. 때마침 1976년 기독교계 원로인 한경직 목사가 속초를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 기회를 이용 자신의 심경을 털어놓았다. 강원희 씨의 얘기를 들은 한목사는 10여년 전부터 네팔에 있는 미국 선교사로부터 의료선교사를 보내달라는 부탁을 받고 있었다면서 그리고 갈 것을 권했다.

  그러나 바로 실행에 옮기기는 어려워 강원희 씨가 네팔로 향한 것은 그 몇 년후인 1982년에서야 이루어졌다. 가장 걱정스러웠던 일은 병원 운영이 어려워 도망을 친다는 오해를 주위로부터 받는 것이었는데 다행스럽게도 병원이 한창 문전성시를 이룰 때 떠날 수가 있었다.

  82년 4월 1일로 11년간 운영해온 대동의원에서 손을 뗀 강원희 씨는 연세의료원과 전주예수병원에서 소정의 교육을 받은 후 그해 8월 25일 한국을 떠나 네팔로 향했다. 안정된 생활을 버리고 험난한 미지의 세계로 간다는 일에 처음에는 가족의 반대도 있었지만 끝내는 종교적 열정에 감동되어 열렬한 후원자가 되었다. 사실 강원희 씨의 부인 최화순 여사는 연세대 동문으로 간호사 자격을 갖고 있어 1년후 뒤따라와 현재까지 의료선교 활동을 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네팔 도착후 9일만에 건강하시던 부친이 일본 뇌염으로 별세했다는 슬픈 소식을 들었다. 그것도 연락이 잘 안되어 2주가 지난 후에야 안 일이었다. 그러나 슬픔 가운데서도 평소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부친께서 자신의 불효를 이해해 주셨으리라 생각하면 조금은 위안이 되기도 하였다.

  그렇게 시작된 네팔에서의 의료선교활동은 86년 3월까지 계속되었다. 이 3년 6개월 동안 강원희 씨는 주로 네팔의 제2도시인 POKHA-RA에서 일을 했는데 처음에는 건강공동체 프로그램에서, 다음에는 결핵 프로그램에서, 나중에는 정부병원 응급실에서 책임자로 활약했다. 그러나 공적인 일에만 국한하지 않고 주민들의 무료진료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고아원 어린이들과 시내 걸인들의 건강을 돌봐주다보니 그들로부터 형님으로 불리기도 하였는데 ‘Korean Doctor’의 활약상은 강원희 씨를 일약 유명인사로 만들기도 하였다.

  하지만 어려운 일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한번은 60여세 된 시골 노인이 복막염이 생긴지 5일만에 찾아왔다. 위급한 형편이어서 수술을 했으나 부탁한 피를 구할 수가 없었다. 마침 자신의 피가 수혈이 가능한 혈액형이어서 필요한 두 병(500cc)을 뽑으라고 지시했다. 한병 반 정도 뽑았을 때였다. 병원장이 소식을 듣고 달려와 당장 멈추게 했다. 환자들이 폭주하는데 의사가 기운이 없으면 다른 환자들은 어떻게 하느냐는 얘기였다. 다행이었던 것은 이미 뽑은 것만으로 수혈을 받은 그 환자가 기적적으로 회복된 일이었다.

  그 밖에 잊을 수 없는 일로는 35세 부인을 수술한 일이었다. 장폐쇄증 경과가 3일이 된 환자였다. 수술을 거의 끝내고 복부봉합을 하는데 환자가 구토를 했다. 즉시 기계로 토사물을 제거했으나 이유를 알 수 없는 가운데 흡입성 폐렴이 염려되었다. 아침부터 증상이 이상하던 환자는 저녁이 되자 호흡곤란과 열이 심해졌다. 흉부 X-선을 촬영해 본 결과 양쪽 폐가 못쓰게 되어가고 있었다. 중환자실에도 산소가 없다보니 특별한 치료를 할 수도 없었다. 다음날 아침 회진 때보니 이미 쇼크상태에 빠져 식은 땀을 흘리며 의식이 없었다. 입술도 파리해진채 곧 숨을 거둘것만 같아 보였다.

  강원희 씨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간절히 기도를 드리는 일밖에 없었다. 그런데 약 4시간후 다시 회복실로 가보니 환자의 가슴이 조용해져 있었다. 벌써 저승의 사람이 아닌가 싶어 다가가보니 이게 웬일인가. 놀랍게도 눈에는 생기가 돌고있는가 하면 식은 땀은 없어졌고 입술은 혈색이 도는 가운데 혈압도 정상이었다. 특별한 치료도 없이 그녀는 살아난 것이었다. 강원희씨는 이 놀라운 사실 앞에 눈물로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살아계셔서 우리 가운데서 여전히 역사하고 계심에 대한 새로운 감격의 눈물이었다.

  당시 강원희 씨가 속해 있던 선교부는 정기적으로 토요일과 일요일은 휴무였다. 이를 이용해 강원희 씨는 모터싸이클을 타고 시골을 찾아다니며 무료진료를 했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어떤 마을에서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놀라운 은혜를 받아 교회가 주민들의 참여속에 세워지기도 하였다.

  네팔에서 3년 반을 일한 후 기간이 끝나 잠시 귀국했던 강원희 씨는 한국의료선교회의 요청을 받아들여 1987년 3월 27일부터는 방글라데시의 통기진료소에서 일하고 있다.

  통기진료소가 위치한 지역은 74년 대기근 때약5만여명의 이재민을 수용함으로써 시작된 이재민촌, 진료대상은 캠프안의 약 1만 6천여명과 원근 각처에서 찾아오는 환자들이다. 직원은 46명이며 강원희 씨는 현재 여기서 책임자로 일하고 있다.

  진료소 일 외에도 강원희 씨가 꾸준히 무료진료를 해온 카말지역에는 그의 노력으로 현지인 전도자도 투입되고 교회를 세우기 위한 대지도 구입했다. 신기한 것은 이곳의 전도자가 왼쪽 무릎에 이상이 생겨 X-선 촬영후 수술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으나 기도후 그냥 나아버린 일도 있다.

  이러한 일 외에 강원희 씨는 현지 대학생에게 학비를 지원하고 있기도 하다.

  87년 7월부터는 몇사람의 선교사들이 모여 한국인들만의 활동을 위한 일에 착수 현재 의료·농업·교육 분야에 계획을 세워놓고 정부의 최종 승인을 기다리고 있다. 천재로 인한 피해, 정치적인 혼란, 이슬람국교화의 장애 등으로 계속 승인이 지연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내용면에서는 이미 많은 진척이 있어 시골이지만 약 40병상 규모의 정부 병원을 인수했고, 농지도 약 2만여평을 기증받았으며, 코란도 9인승 2대와 쾌속보트 1척, 사무실·복사기·FAX등을 준비해 놓은 가운데 GUEST HOUSE도 운영하고 있다. 정식허가가 나면 46명의 한국인 선교사가 모여 일할 수 있게 되는데 이는 한국의 좋은 이미지를 심는데 크게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강원희 씨는 방글라데시에서의 임기가 만료되는 내년에는 스리랑카로 갈 예정이다. 그러나 아직 후임자가 결정되지 않아 방글라데시로 계획대로 떠날 수 있을지는 아직은 미지수다. 네팔에서 방글라데시로, 방글라데시에서 다시 또 스리랑카로 이처럼 활동무대를 옮기는 것은 어렵고 험난한 곳에 항시 자신을 세워두려는 강원희 씨의 개척자적 열정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아직은 열악한 환경속의 후진국들을 찾아다니며 인술을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 강원희 씨. 생활과 풍습이 다른 먼나라에서 그가 겪고 있을 많은 어려움은 능히 짐작될 수 있는 일이다. 일찍이 이땅을 찾아왔던 의료 선교사 Dr. Allen처럼 그가 그 나라 국민들 마음속에 오래 기억될 수 있기만을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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