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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있으나 어려운 이 아픔 소신으로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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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5.03.10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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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회 보령의료봉사상 수상자 김진경 원장

·1911년 충남 아산출생
· 1937년 평양의전 졸업
· 1996년 별세

  타향을 고향 삼아 살아온지 40여년이 넘은 지금, 김 원장은 새삼스럽게 불태워야 할 욕망같은 것이 남아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지나온 반생처럼 부여를 지키며 살 것을 다짐하고 있고 그러한 결심은 좀처럼 변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조금의 의심도 없는 일이다.

 

 

  ■ 충남 부여의원 김진경 원장

  백제의 옛 서울이었던 부여는 언제 가보아도 변함이 없다. 변화가 아주 없을 리는 없겠지만 눈에 뜨일 정도로 바뀌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그런 정체된 모습을 두고 주민들은 불만이 많은 모양이다. 신라의 서울 경주가 개발이 잘 된데 비해 그와 쌍벽을 이룰 수 있는 백제의 서울 부여는 개발과는 거리가 멀어왔다는 지적인 것이다. 그러나 개발만이 능사일까? 시멘트로 뒤덮인 경주에 대해 적잖은 실망을 맛본 사람들은 오히려 지금의 부여를 아끼고 있는 지도 모를 일이다.

  한 마디로 정체된 느낌의 부여라고는 하지만 이곳에도 개발의 삽질이 시작된 적은 있었다. 왜정말기 일제는 지금의 삼충사 터에 신궁을 건립하는 한편 시가지 구획정리에 나섰다. 폭 25m의 지금의 거리들은 이때 이루어진 것으로 대단위 관광단지를 조성한다는 계획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숨은 저의가 있었다.

  사실 일본은 백제의 영향을 많이 받은 나라였다. 문화의 전수뿐만이 아니라 백제 도래인들이 왕권을 장악, 만세일계(萬歲一系)라 자랑하는 지금의 황실도 그 후손들이라는 설이 유력할 정도다. 그런 백제의 서울 부여에 신궁을 세움으로써 저들은 이러한 사실을 말살하고 오히려 역으로 동조동본(同祖同本)임을 강조하려 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계획은 해방과 더불어 수포로 돌아갔다. 하지만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구아리 310번지의 위치한 ‘부여의원’의 김진경(金晋卿)원장도 실은 당시의 개발붐을 타고 부여를 찾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동기야 어디에 있던 40년을 넘게 부여에서만 인술을 펴오다보니 이제는 본인은 물론이거니와 주민들도 타관사람으로 여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잘 구어진 백제 와당처럼 부여의 비바람에 동화되어 어느덧 김 원장 또한 부여인이 되어버린 것이다.

  김 원장은 1911년 충청남도 아산군 영인면 아산리에서 태어났다. 이곳에서 보통학교를 마친후 공주로 나가 공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는 1년을 집에서 쉬었다. 고향으로 돌아가 한방의였던 부친을 도운 것이다 그 1년간의 휴식기간을 거쳐 평양의전을 입학했고 37년에 졸업을 했다. 졸업후에는 의전 부속병원, 해주병원, 평양도립병원 등의 순서로 근무를 하다 40년경에 부여를 찾아 개원의가 되었다.

  앞서도 얘기한 바 같이 김 원장이 부여를 찾은데는 특별한 이유나 남다른 인연 같은 것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개발이 되면 좀더 활발히 움직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와 바램 때문에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기대는 수포로 돌아갔어도 김 원장은 지금까지 부여를 지키고 있는 것을 보면 그 끈이 아무리 미약한 것 일지라도 인연이란 참으로 끈끈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도 그렇기는 하지만 부여란 곳은 김 원장이 찾을 때만해도 한적한 시골에 불과한 곳이었다. 의료기관도 일본인이 경영하던 의원하나가 고작이었다. 김 원장은 경찰서 옆에 작은 집 하나를 빌려 개원을 했다. 현재의 위치로 자리를 옮긴 것은 해방 바로 직전 해의 일이었지만 시내 중심지가 되어버린 지금과는 달리 주위에는 집 하나 없는 농경지에 헐리게 된 경찰서의 재목을 불하받아 70평 규모의 건물을 신축한 것이었다. 말하자면 이 건물이 40여년이 넘게 부여를 지키며 살아온 김 원장의 인술의 산실이자 보금자리가 되어온 셈이다.

  해방과 더불어 일본인들은 물러갔고 개발 계획도 백지로 돌아갔다. 김 원장은 기로에 처하게 되었지만 이곳에 남는 길을 택했다. 길지 않은 세월이었지만 자신에게는 비록 손해가 될지 몰라도 인술이 필요한 곳은 바로 이곳이라는 확신을 갖게 된 것이었다. 그러한 확신이 있었기에 김 원장은 한눈 팔지 않고 부여에서만 인술 40년 이상의 외길을 걸어올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시련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6·25가 바로 그것이다.

  6·25가 나자 김 원장은 늦게 출발하는 바람에 논산군과의 경계 지역에서 야간에 길을 잘못잡아 미군들의 사격을 받는 등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

  그러나 고생 끝에 전주를 거쳐 남원까지는 당도했으나 마지막 떠나는 열차를 타지 못해 더 이상 피난을 가지못했다. 할 수 없이 부여로 돌아왔으나 반동의사라고 지목해 여간 못살게 구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다행이었던 것은 인민군 후퇴직전 잠시 몸을 피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저들은 후퇴를 하며 반동으로 지목한 사람들을 경찰서 뒷마당에 가득 모아 놓고 사살했는데 그 위험한 고비를 무사히 넘긴 것이었다.

  6·25를 무사히 넘긴 후에는 별다른 어려움은 겪지 않았다. 그러나 대도시와 달리 부여만해도 지금과는 달리 한촌이어서 그에 따른 괴로움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주민들은 시도 때도 없이 문을 두드려 밤에도 일어나야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고, 왕진을 위해 시골길을 누비고 다녀야 했다. 한번은 캄캄한 밤에 먼 마을로 초행길의 왕진을 가다 발을 잘 못 디뎌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져 죽을 뻔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괴로움을 김 원장은 천직으로 여기며 묵묵히 인술을 베풀어 왔다. 돌아보면 뚜렷한 행적으로 인각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는 소신껏 인술을 펴며 주민들과 더불어 살아온 지난 세월인 것이다.

  변화의 속도가 더디다고는 하지만 아득한 옛날과 비교해 보면 부여도 그동안 많이 변한 것만은 사실이다. 일본의사가 해방후 귀국한 후에는 김 원장이 군내 유일한 의사였으나 현재는 읍에만도 대여섯명의 의사가 있고 면으로 나가도 일반의가 3명이나 된다. 거기에 공중보건의들이 활약하고 있어 무의면은 없는 형편이니 의료환경도 많은 발전을 해온 것이다. 그뿐 아니라 교통도 좋아져 옛날처럼 왕진을 다닐 일도 없어진지 오래다.

  그러나 김 원장에게는 요즘 들어 아쉽게 생각되는 점이 한가지 있다. 그것은 의사에 대한 환자의 신뢰가 예전과 같지 않다는 사실이다. 의사와 환자는 상호간에 믿음이 선행되어야 올바른 진료나 치료가 가능하다고 생각해온 김 원장으로서는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된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물질 만능의 사회풍조에 영향 받은 바가 많을 것이다. 그러나 인명을 다루는 의상의 입장에서 어떠한 조건하에서든 사람을 소홀히 대할 수 없다는 것은 김 원장 자신이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기에 아쉽고 답답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인술만을 제일의 삶으로 여기며 살아온 김 원장이지만 그동안 대외적인 활동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부여군 의사회장을 초창기부터 맡아 지금까지 회무에 앞장 서오고 있으며 로타리크럽을 창설해 1·2대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도정자문위원을 6?7년 맡아 도정에도 관여를 했고 부여군 선거관리위원장을 지냈으며 공화당시절에는 지역구 부위원장을 맡았던 것은 정치에 뜻이 있었다기보다는 이러한 일들을 통해 부여 발전에 기여해보자는 뜻이 작용한 것이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또 87년 수해로 부여지방이 물바다가 되었을 때는 수해복구와 대민진료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이런 일들로 김 원장은 77년 대한의학협회, 78년 충남지사, 79년 부여군 교육장으로부터 감사패를 받기도 했다.

  금년 78세인 김 원장은 고등보통학교 시절 결혼한 부인과의 사이에 4남 3녀를 두고 있다. 이제는 모두 장성한 자녀들 중 둘째 아들이 의사가 되어 개원의로 활약중이다. 그러나 모두 출가를 하거나 외지로 나가 있어 병원 건물에 달린 살림집에는 노부부만이 금슬 좋게 살고 있다. 더구나 간호사가 디스크로 휴가중이어서 요즘은 부인이 직접 김 원장의 병원일까지 돕고 있는 중이다.

  이를 안쓰러워한 아들들은 이제는 은퇴를 해 함께 모여 살자고 성화가 빗발같지만 김 원장은 대답을 않고 있다. 나이도 들만치 들어 옛날같은 열정은 없지만 그래도 반생을 함께 살아온 주민들과 부여를 떠난다는 사실자체가 아쉽고 미련이 남는 것이다.

  움직일 수 있는 날까지는 인술을 펴며 이대로 사는 것이 자신의 책무인것만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타향을 고향 삼아 살아온지 40년이 넘은 지금, 김 원장은 새삼스럽게 불태워야할 욕망같은 것이 남아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지나온 반생처럼 부여를 지키며 살 것을 다짐하고 있고 그러한 결심은 좀처럼 변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조금의 의심도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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