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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페트리에 병원
살페트리에 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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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5.03.08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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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정신병 치료법 확립의 시작

그동안은 우리나라의 의학유적지들을 소개했지만 앞으로는 몇 차례에 걸쳐 프랑스의 의학유적지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물론 필자가 유학한 곳이어서 이기도 하지만 서양의학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또 유적 관리면에서도 배울 점이 많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나라의 경우 대부분은 사라졌거나 정확한 위치가 어디였는지도 알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제중원은 위치는 대개 알지만 건물은 이미 사라졌고, 의학교나 광제원은 정확한 위치는 커녕 사진 한 장 남아있지 않다. 그에 비해 프랑스의 의학 유적들은 잘 보존되어 있는 점이 부럽다.

파리 지역만 하더라도 파리지역 공립병원 협회에는 역사담당 부서가 따로 있어 관련 유적과 자료를 보존하고 정리하는 일을 담당하고 있다. 우리도 이젠 우리 의학의 유적과 자료들을 보존하는데 더욱 많은 노력을 쏟아야 할 것이다.

파리 지하철 10호선 종점 '아우스테릴리츠' 역에서 내려 식물원과 자연사박물관 건너편으로 나와 조금 올라가다 보면 살페트리에 병원이 나온다. 병원 입구 앞에 작은 공터가 있고 거기에 동상이 하나 서 있는데 그것이 유명한 피넬의 동상이다. 정신의학의 선구자 피넬의 동상이 정문 앞에 서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병원은 정신의학 혹은 신경학의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병원이다.

물론 처음부터 이 병원이 정신의학 발전을 염두에 두고 설립된 것은 아니다. 1656년 4월 27일 루이 14세는 파리 시내의 빈민들을 수용할 병원 설립에 관한 칙령을 반포한다. 철학자 푸코가 '광기의 역사'에서 말하는 "대감금(Renferment)"이 일어난 것이다. 여기서 병원(Hopital)이라고 하지만 그것이 오늘날의 의료기관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구빈원'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욱 적당할지 모르겠다. 파리 시내의 빈민, 부랑자, 정신병자 등이 살페트리에 병원을 비롯하여 오텔 디유, 비세트르 병원 등지에 수용되었다. 처음에는 남녀의 구별 없이 수용되었는데 후에 살페트리에에는 여자가, 비세트르에는 남자가 주로 수용되었다.

19세기까지 파리에는 길거리에 버려지는 아기들이 많았다. 그 가운데 여자아이들은 살페트리에로 데려와 키웠다. 병원에서 자라며 적당한 초등교육을 받은 후 이들은 병원에서 일하기도 했고 파리시의 허드렛일을 하기도 했다.

18세기 초 프랑스가 미 대륙에 식민지를 경영하고 있을 때, 당시 재상이던 콜베르는 살페트리에 출신의 아가씨와 비세트르 출신의 청년을 결혼시켜 미 대륙으로 이주시키기도 했다. 살페트리에 병원에는 길거리에 버려진 여자아이들만이 아니라 풍속을 문란케하는 거리의 여인들도 수용되었다. 병원 안으로 들어가 보면 건물들 사이의 작은 뜰에 우물이 하나 있다. 이름 하여 '마농의 우물'이다. 마농은 프랑스의 작가 프레보의 소설 '마농 레스코'에 등장하는 여자 주인공의 이름이다.

이 소설에는 거리의 여인 마농이 살페트리에에 수용되어 있으며 이 우물에서 물을 길어 빨래를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래서 붙은 이름이다. 이 우물에서 수많은 마농이 그렇게 물을 길어 빨래를 했을 것이다. 마농의 우물이 있는 곳에서 조금만 더 가면 '학살의 뜰'이란 무시무시한 이름이 붙은 작은 뜰이 나온다.

1792년 9월 3일, 프랑스 혁명의 와중에 이성을 잃은 수백 명의 군중이 살페트리에 병원에 침입해 들어왔다. 그들은 수용된 육백여명 이상의 여인들을 집단으로 강간했고 그 광경을 구경하기 위해 수천 명의 파리 시민들이 몰려왔다. 그리고 병원에 침입한 군중들 중 비세트르를 탈출한 폭도들이 35명의 여인을 바로 이 뜰에서 살해했다. 지금은 더 없이 평온하고 조용한 이 병원의 한 구석이 그토록 끔찍한 역사의 현장이었던 것이다.

살페트리에 병원이 정신의학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피넬이 일하기 시작하는 18세기 말부터이다. 피넬은 1801년 근대정신의학의 탄생을 알리는 책 '정신이상에 관한 의학-철학적 고찰'을 펴낸다. 또 정신병자들을 쇠사슬로부터 해방시킨 업적으로도 이름이 높다. 피넬의 제자로 에스퀴롤이 피넬의 뒤를 이어 살페트리에 병원에서 일하며 정신의학을 발달시켰다.

19세기 중반 경 살페트리에 병원에는 약 1천여명의 정신병자들이 수용되어 있었다. 이와 함께 갈 곳 없는 할머니들도 이곳에서 보살핌을 받았다. 살페트리에의 명성은 19세기 후반 샤르코에 의해 다시 한번 빛을 발한다. 젊은 프로이트는 샤르코에게 배우기 위해 이곳으로 왔다<사진>.

병원 정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넓은 정원이 나오고 정면에 큰 교회가 눈에 들어온다. 생 루이 교회이다. 교회 안으로 들어가 보면 텅 비어있다. 가끔 이곳에서 미술 전시회 같은 것을 열기도 한다. 교회를 통과해 뒤로 나가면 넓은 뜰이 펼쳐져 있다. 군데군데 벤치도 놓여있다. 정교하게 가꾸어지지는 않았지만 꽃이며 나무, 잔디가 자연스럽게 깔려있다. 순간적으로 공원에 들어온 것이 아닌가하고 착각할 정도이다.

넓은 뜰 이쪽저쪽에 자그마한 병원 건물들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을 보니 병원 안임은 분명하다. 몇년 전 프랑스 의사들을 대상으로 가족들이 병에 걸렸을 때 가장 입원시키고 싶은 병원이 어디냐는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다.

조사 결과 1위를 한 곳이 살페트리에 병원이었다. 물론 의료진이 좋아서이기도 하겠지만 이처럼 좋은 병원환경 때문이었을 것이다. 건물과 주차장만 숨 막히게 들어선 우리나라의 종합병원들이 떠올랐다.

공원 같은 넓은 뜰을 지나 위로 좀 더 올라가면 바빈스키의 이름이 붙은 현대식 건물이 나온다. 바빈스키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신생아의 이상 여부를 판단하는 발바닥 반사 검사를 고안한 사람이다. 그도 살페트리에 병원에서 샤르코의 제자로 일한 신경학자였다.

샤르코가 히스테리 환자를 앞에 두고 설명을 하는 유명한 그림이 있다. 원 그림은 파리의과대학에 있는 의학박물관 올라가는 벽에 걸려 있는데 설명을 하는 샤르코 맞은 편에서 히스테리 발작을 일으키고 있는 젊은 여성을 잡고 있는 남성이 있다. 그가 바빈스키이다.

이처럼 살페트리에 병원의 구석구석에는 이 병원의 오랜 역사와 명성을 말해주는 장소들이 많다. 파리에는 유서 깊은 병원들이 많이 있지만 살페트리에 병원은 그 가운데서도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병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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