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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5.03.04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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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식민화 일환으로 의학이용

1876년 개항 이후 일본은 개항장이었던 인천과 부산에 일본 거류민들을 위한 병원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이후 일본은 1905년 조선이 일본의 보호국이 될 때까지는 일본의학을 조선에 이식하는 일에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다.

물론 소수이지만 당시에 일본에서 의학공부를 위해 유학한 사람도 있었고, 또 일본인 의사가 정부에 초빙되어 의학교 교사가 되기도 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차원의 일로 일본이 정책적으로 일본의학의 이식을 추진한 결과는 아니었다. 적어도 1904년, 일본이 러일 전쟁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조선에서 완전한 우월적 위치를 차지하기까지 청과 러시아와 힘겨운 세력다툼을 벌여야했기 때문에 거기에서의 승리를 확신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청나라에 이어 러시아와도 싸워 이긴 일본은 마침내 조선을 장악했고, 1905년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해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정치적으로 조선을 장악한 일본은 이제 완전한 조선합병을 위해 각 분야에서 일본의 제도를 이식하기 시작했다.

한 가지, 여기서 분명히 해둘 것이 있다. 일본에 의한 조선지배는 1905년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되었지만 지배의 방식과 주체에 있어 1905년에서 1910년까지와 1910년 합방 이후와는 무시하지 못할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먼저 1905년부터 1910년까지 일본의 조선지배기구는 통감부였는데, 통감부는 민간인이 중심이 된 기구였다.

안중근 의사에게 살해된 이토 히로부미는 당시 일본에서 가장 영향력 있고 인기 있던 정치가였다. 그러나 1910년 합방 이후 조선의 총독으로 부임한 사람은 육군대장인 데라우치였고, 이후 1945년까지 소위 군인들에 의한 무단통치가 계속되었다. 다시 말해 1905년부터 1910년까지의 식민화 과정을 담당한 것은 민간인이었고 이후는 군인들이 주도하였던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이는 의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통감부 시기에 일본의료의 이식을 주도했던 것은 일본인 의사단체인 동인회(同仁會)였다. 동인회는 1902년에 일본에서 조직된 민간 의사들의 단체였다. 그런데 이 단체의 목적은 통상적인 의사단체처럼 학술활동이나 친목이 아니라 아시아 지역에 진출하여 위생사업을 보급하고 일본 거류민의 건강을 책임지며 이러한 활동을 통해 각국민과의 우호를 돈독히 하겠다는 것이었다.

즉 일찍 서양의 문화를 받아들인 일본이 의학을 통해 이웃 국가들이 문명개화하는 데 도움을 주겠다는 목표를 가진 특수한 성격의 단체였다.

이처럼 사실상 그 성격에 있어 동인회는 일본의 대외정책을 보조하는 것이었고, 그런 만큼 정부에서도 자신들의 활동을 지원해야한다고 동인회는 공공연히 밝혔다. 그리고 일본 정부 역시 그들 사업의 필요성과 명분에 동의하여 상당한 지원을 제공했다.

즉 동인회는 민간단체이지만 일본의 국가적 이익을 대변하는 성격을 지녔다는 것을 일본 정부도 인정한 셈이었다. 동인회가 조선에 진출한 것은 1904년 러일전쟁을 전후한 시점으로 당시에는 경부선과 경의선 철도부설 공사가 진행 중에 있었다.

철도부설 공사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따랐는데 과로와 전염병의 발생으로 인한 인력의 손실은 철도부설 자체를 위태롭게 만들 수 있었다. 또 실제로 공사에 참여한 조선인이나 일본인 모두 이런저런 질병으로 고생하지 않는 사람이 없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부설 현장에 의사를 파견해야할 필요성이 커지고 있었는데 이때 그러한 일을 자청하고 나선 것이 바로 동인회 소속의 의사들이었다.

그리고 1907년 4월 1일에는 통감부 철도관리국장과 동인회장 사이에 계약이 체결되어 철도와 관련된 의료와 위생 관련 사항은 동인회에서 담당하게 되었다.

이처럼 경부선 철도 부설 공사에 철도 촉탁의를 파견하면서 조선에 진출하기 시작한 동인회는 경의선의 중심역인 평양과 경부선의 중심역인 대구에 동인의원을 건립했다. 시기적으로는 평양동인의원의 개원이 빨라 1906년 12월 1일에 개원을 했고, 대구동인의원은 이듬해인 1907년 2월 10일에 개원했다. 대구동인의원의 건립을 위해 경부철도회사가 오천 원을 병원건립비로 기부했다.

애초 동인회 의사들의 활동 무대가 철도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을 생각한다면 이러한 기부는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이다. 동인회의 의료 활동은 처음에는 철도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나 점차 일본 거류민과 조선인으로 그 범위가 넓혀졌다. 동인회 설립의 목적이 의술을 통해 현지인을 회유하고 일본에 대해 좋은 인상을 심어주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동인의원은 조선인 진료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예를 들어 조선인 환자에 대해서는 진찰료를 면제해주었고, 약값과 치료비는 일본인의 절반으로 받았다. 또 조선인 환자의 편의를 위해 온돌 병실까지 두었다. 그리고 조선인 환자들을 치료한다는 명분으로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받기도 하였다. 환자 진료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동인회는 동인의원을 도시의 위생행정을 담당하는 기관으로 키우려고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목표는 상당 부분 성취되어 대구동인의원에서는 진료 이외에도 종두보급과 위생 사무를 맡기도 했다.

동인회의 사업 중 또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의학교육의 실시였다. 동인회는 일본의학을 한국에 보급시키는 일은 일본의 선진성을 널리 선전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평양동인의원에서는 1905년부터 의학교육이 시작되었고, 대구동인의원에서는 1907년부터 의학교육이 시작되었다.

이것을 평양의전과 대구의전의 기원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평양은 가보기 어려워 확인할 수 없지만 대구의전 시절의 건물은 현재 경북의대에 남아있다.동인회와 일본 식민지 당국의 우호적인 관계는 한일합방 후 막을 내린다. 민간단체가 운영하던 동인의원과는 별도로 식민당국은 1909년부터 각 지방에 자혜의원을 설치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한일합방 이후에는 평양과 대구에 있던 동인의원을 총독부가 폐쇄시키고 자혜의원으로 하여 그 설비를 인계받게 하였다. 일본의 조선진출을 측면에서 지원하던 동인회가 이제 총독부 시기에 접어들면서 총독부의 일방적인 의료정책을 펴나가는 데 불필요하거나 방해가 되는 존재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민간인 의사들이 담당하던 동인의원과는 달리 자혜의원에는 군의들이 임명되었다. 그것은 군대와 경찰이 중심이 된 무단통치 시대에 병원도 예외가 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일제 하의 의료는 그렇게 틀이 잡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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