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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 난바
오사카 난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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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5.02.16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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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의학사의 시작

지난 여름방학에 가족들과 일본 여행을 다녀왔다. 전에 학회가 있어 다녀간 적은 있지만 순수하게 여행을 목적으로 간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여행지를 일본으로 정한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딸아이가 일본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필자 자신 조금 여유를 갖고 고도인 교토와 나라가 있는 관서 지방을 여행하고 싶어서이기도 했다. 필자는 애초에 자유여행을 생각했으나 집사람은 아이들도 있는데 힘들게 따로 다니지 말고 편하게 여행사의 패키지로 다녀오는 것이 어떻겠냐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잠시 마음이 흔들렸으나 대개 여행사가 방문하는 곳이 천편일률적으로 정해져 있어 그렇게 가서는 정작 가고 싶었던 곳을 갈 수가 없어 원래의 계획대로 하기로 했다. 우선 서점에 가서 일본여행책자를 세 권이나 사서 저녁마다 탐독을 하는 한편, 예전에 공부하다 구석에 처박아 둔 일본어 회화 테이프를 다시 꺼내 듣는 등 저녁마다 부산을 떨었다. 또 인터넷에서 싼 호텔을 열심히 뒤지며 다녔다. 그러다가 좋은 호텔들도 한정된 수량의 방을 아주 싼 값에 판매하는 경우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 오사카 시내 중심가인 난바에 있는 한 호텔을 예약해 거기에서 일주일 동안 묵게 되었다.

사실 오사카는 고도인 교토나 나라와는 달리 옛 모습이 별로 없고 높은 건물들이 많은 전형적인 현대적 대도시이다. 이곳에 숙소를 정한 것은 주변 도시를 다니기에 교통이 좋고 편리하다는 실용적인 이유가 컸다. 특별히 난바 지역에 숙소를 정한 것은 마침 싼 가격에 괜찮은 호텔을 거기서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여행안내책자에 나와 있는 것처럼 근처에 국철과 사철의 주요 역들이 있어 주변 도시들로 다니기에 편리하고, 오사카에서 가장 유명한 먹자골목이 있어 식사를 해결하기에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우리 가족은 저녁마다 이 골목을 헤매고 다니며 수많은 음식점 중에 오늘 저녁은 어디에서 먹을까를 결정하기 위해 행복한 고민을 해야 했다.그런데 도무지 옛날 모습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이 번화하고 화려한 지역이 한국 고대사에서, 특히 한국 고대의학사에서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장소였다. 지금도 오사카는 일본에서 우리 교포들이 가장 많이 사는 도시로 유명하다. 우리 교포들이 이 도시에 많이 살게 된 것은 20세기 초 굴곡의 역사 때문이었지만, 사실은 그보다 1500여 년 전에 한반도에서 건너온 우리 조상들이 모여 살던 곳이 바로 이 지역 난바(難波)였다. 지금 오사카의 중심 지역이 되어있는 난바는 4세기 후반에는 오사카 앞바다에 면한 작은 나루터였다. 이 옛날의 나루터 지역은 모두 간척이 되어 매립된 후에 현재와 같이 고층빌딩이 들어선 도시의 중심부가 되었다. 사실 난바((難波 , '나니와'라고도 읽는다)라는 지명은 이 지역이 중심이 된 오사카 전체를 지칭하는 말이며, 이 지명은 백제에서 건너간 오경박사 왕인이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 역사서인 續日本記에 따르면 서기 470년 경 일본에서 백제에 학식 있고 재주가 있는 사람을 보내달라고 요청해 백제에서는 덕래(德來)를 보내주었다. 덕래는 고구려에서 백제로 귀화한 사람이었는데 광개토대왕의 후손이라고도 한다. 아마도 어떤 정치적인 이유에서 백제로 귀화했을 덕래는 다시 일본으로 가서 여러 가지 선진 지식을 일본에 전해주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의술이었다. 덕래와 그의 자손은 대대로 난바에 거주하며 의술을 베풀었기 때문에 그들을 '難波藥師'라고 불렀다. 이 난바는 당시 아스카 조정이 한반도로부터 선진 문화를 받아들이는 기지도시로서 나라 시대에는 궁궐까지 조성되어 외국문화를 받아들이는 중심지와 같은 역할을 했다. 덕래 이후에도 일본의 요청에 의해 서기 553년에  백제에서 의박사 왕유릉타(王有陵陀)와  채약사 반양풍(潘量豊) 등을 일본에 보냈다. 이렇게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나 고구려의 의인들이 주로 거주한 곳이 바로 난바였던 것이다.

덕래와 그의 후손들이 의사로서 많은 활동을 한 것은 일본의 역사서에도 기록되어 있다. 덕래의 오대손인 혜일(惠日)은 서기 608년 일본의 사절단과 함께 당나라에 건너가 15년 동안 머물며 의학을 배웠고, 당에서 돌아온 후에는 당의 문물제도를 채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혜일이 당시 수당의 최신 의학을 일본에 소개하면서 이전까지 백제와 고구려 의학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일본의 의학이 직접 대륙의학의 영향권 내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처럼 당대 일본에서 의사로서 혜일의 명성이 높았기 때문에 그를 '약사(藥師)'라고 불렀고 (당시에는 약사가 오늘날의 의사와 같은 의미였다), 이것이 결국 그의 성이 되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며 그의 자손이 많아졌고, 그 가운데는 의술을 잘 모르는 자손들도 있었다. 그렇지만 이들도 모두 약사(藥師)라는 칭호를 가지게 되어 이름과 내용이 일치하지 못하는 상황이 생겨났다. 이에 難波藥師奈良와 같은 덕래의 후손들은 '약사'라는 성 대신 '難波連'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했고 그 청이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난바 지역의 가운데를 도톤보리 강이라는 작은 강이 흐르고 있다. 폭으로 보아서는 강이라고 하기엔 뭣할 정도로 좁아 그냥 수로라고 하는 편이 적당하겠지만 바닥을 깊이 파서 배가 지나다니니까 그래도 강이라고 해두자. 필자의 가족이 오사카에 도착하던 날은 마침 일본의 삼대 마쯔리(축제) 중 하나인 오사카의 텐진 마쯔리가 열리는 날이었다. 해안에서는 밤에 등을 밝힌 많은 배가 물위에 떠있는 장관을 볼 수 있다는데 도톤보리 강이 좁다 보니 이 곳에서는 배가 한대씩 줄을 지어 징 같은 것을 치면서 지나가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이 강의 양안을 따라 남쪽에는 먹자골목이, 북쪽에는 유흥가가 발달하였다<사진>. 하루는 멋모르고 아이들과 함께 북쪽 거리로 들어갔다가 호객꾼들이며 야한 사진들을 붙여놓은 입간판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는 것을 보고 얼른 발길을 돌린 적도 있다. 여기서 이 강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이 강도 일본의 고대 의학사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서기 585년 일본에 큰 역병(두창이라고 한다)이 유행했다. 그런데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당시 일본에도 막 들어온 외래종교인 불교에 대해 적대적인 사람이 적지 않았다. 백제계 이주민으로 당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소가(蘇我) 씨 집안은 불교 수용에 적극적이었던 반면, 그들과 경쟁 관계에 있던 모노노베(物部) 집안은 불교에 반대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역병이 유행하자 모노노베 집안은 역병의 유행이 외부에서 들어온 불교로 인한 것이니 이를 금지시켜야한다고 주장하며 사찰로 달려가 가람에 불을 지르고 불상을 들고 나와 난바의 도톤보리 강에 던졌다고 기록에 전한다. 아마도 일본의 불교가 고구려와 백제를 통해 들어왔기 때문에 한반도 도래인들이 모여 살던 이곳을 역병의 진원지로 여겨 이 강에 불상을 던진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나라에서는 흔적조차 찾아보기 어려운 1500여 년 전 한국 고대의학의 자취가 오사카 시내 한가운데, 불빛 화려한 번화가의 이름으로나마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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