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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예수병원
전주 예수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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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5.02.16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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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추억과 한국 의료의 역사가 깃든 곳

아침에 조간신문을 보다가 설대위(미국명 데이비드 존 실) 전 예수병원 원장의 부음을 접하게 되었다. 이번 연재 언제쯤엔가 전주예수병원에 대해 쓸 생각이었지만 그의 부음을 접하고 보니 예수병원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이 떠올라 예정보다 먼저 글을 쓰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웬만한 도시에는 그 도시의 대표적인 선교병원이 하나씩 있다. 대구에서 자라난 필자에게는 지금은 계명대학의 부속병원이 된 동산병원이 그런 병원이었다. 그렇지만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 전라도에 가 본 적이 없는 필자에게 전주예수병원이란 아주 낯선 이름이었다. 전주예수병원의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고등학교 때인가 본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였다. 뉴스 시간이었는지 다큐멘터리였는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지역사회 주민들의 신뢰를 받는 의료기관일 뿐 아니라 인근의 농촌지역까지도 나가서 농민들의 건강을 보살펴주는 사업도 전개하는 모범적인 병원으로 전주예수병원을 소개되었다. 그것을 보며 예수병원은 필자에게 무척 좋은 인상으로 각인되었다.

필자가 전주예수병원에 처음 간 것은 의과대학 본과 4학년 때였다. 일반외과 실습 중의 일부로 예수병원 외과에서 2주 동안 임상실습을 하러 간 것이었다. 일반외과 전공의들이 생활하는 의국에서 같이 숙식을 하며 수술실에 들어가 수술도 도우며 그렇게 지냈다. 설대위 원장을 처음 만난 것도 수술실에서였다. 키가 무척이나 큰 서양인이어서 그는 금방 눈에 띄었다. 특별히 말을 주고받은 기억도, 또 당시 했던 수술이 무슨 수술이었는지도 기억은 없지만 수술을 시작하기 전에 기도를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사실 설대위 원장뿐 아니라 당시 일반외과에 있던 다른 선생님들도 수술을 시작하기 전에는 환자를 위해 기도를 했다. 환자가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집도의를 보며 수술을 앞둔 환자의 불안한 마음도 많이 편해졌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김일성도 그를 수술하기 전에 장기려 박사가 기도해도 되냐고 묻자 그렇게 하라고 했다지 않는가.

병원과 관련된 몇 가지 기억이 더 난다. 필자를 포함해 실습학생들이 처음 도착한 날 저녁에 전공의 선생님들이 우리를 데리고 나가 저녁을 사주었다. 중국집에 갔는데 면과 탕수육 정도였던 것 같다. 당시 4년차 선생님이 말하길 우리 의국은 다른 병원의 의국과는 달리 제약회사로부터 의국비 보조를 받지 않는다. 그래서 회식을 하더라도 각자가 돈을 내서 식사를 하니 맛있는 것 많이 못 사주는 것을 이해하라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으며 뭔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먹는 것과 관련해 병원의 구내식당도 기억난다. 병원구내식당에는 의사들이 식사하는 방이 따로 있었는데 거기에는 일반직원들이 식사하는 곳과는 달리 맛있는 반찬이며 음식들이 그득 쌓여있었다. 재료는 다 좋은 것이었는데 구내식당의 한계랄까, 그다지 정성스레 조리가 되지 않았던 점이 아쉬웠던 생각이 난다.

이제 그만 개인적인 추억은 접어두고 전주예수병원의 역사를 잠시 살펴보자. 전주지역을 비롯한 전라도 지역은 미국 남장로회의 선교지역이었다. 특히 전주지역은 일찍이 해리스 목사가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는데 그는 1896년 목회 활동을 하는 한편 서문 밖에 진료소를 설치하여 환자를 돌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목회 활동과 진료 활동을 동시에 하기는 힘들어 얼마 후 진료소는 그만 두었고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을 졸업한 여의사 마티 잉골드가 1897년 전주에 도착해 성문 밖에서 어린이와 부녀자를 위한 치료를 시작했는데 이것을 전주예수병원의 기원으로 삼는다. 잉골드는 여자의사였던 관계로 그동안 상대적으로 의료혜택을 받지 못했던 부인들의 질병을 주로 치료했고 더불어 선교활동도 병행했다. 1902년에 현재의 위치인 중화산동 언덕 위에 첫 병원 건물을 지었다. 잉골드가 1904년 안식년을 떠난 후에는 포사이드가 병원을 맡았는데 포사이드는 왕진을 다녀오다가 강도를 만나 귀를 잘리는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이후에도 버드맨, 다니엘 등의 여러 선교사가 이어서 병원에서 진료를 했다. 그런데 불행히도 1935년 1월 화재가 일어나 병원이 전소되는 어려움을 겪었으나 다행히도 각처에서 답지한 성금으로 그 해 9월에는 다시 초석을 놓고 이듬해 1월에 완공할 수 있었다. 일제 말기에는 신사참배 거부 문제로 병원문을 닫기도 했으나 해방 이후에는 다시 병원문을 열고 활발히 진료를 재개했다.  

전주예수병원의 활동 중 특기할 사항은 의과대학이 없는 병원으로는 드물게 독자적으로 지역사회 보건사업을 열심히 전개하고 성공적으로 수행한 사실이다.  1968년부터 전주 인근 지역에서 예방 접종, 기생충 박멸, 식수 소독, 화장실 개량 사업 등 농촌위생사업을 활발히 전개해 농촌 지역의 위생과 주민들의 건강을 증진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작고한 설대위 원장이 부임한 후에는 병원을 증축하며 호남 지역을 대표하는 최대의 병원으로 성장했다. 설대위 원장 이후에는 한국인이 원장을 맡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몇 해 전 예수병원을 다시 찾았을 때는 100주년 기념행사로 분주했고 병원 역사에 대한 작은 전시실도 준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다시 학생 시절의 이야기로 돌아 가보자. 사실 이제야 고백하건데 필자를 비롯한 우리 실습생들은 그다지 충실한 학생이 아니었다. 원래 실습은 2주 예정이었는데 우리가 간 것은 4학년 2학기의 9월말쯤이었다. 우리는 첫 주 실습을 마친 후 그곳 선생님들께 곧 졸업시험도 봐야하고 국가고시도 가까워오니 2주 실습 중 1주 동안만 실습을 하고 나머지 1주는 서울에 가서 시험공부를 하게 허락해달라고 부탁을 드렸다. 그때 실습생을 담당하던 선생님께서는 다소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시긴 했지만 허락해주셨다. 그래서 우리는 1주 만에 실습을 마칠 수 있었다. 나머지 1주 동안 무얼 했냐고? 필자는 그 길로 여행을 떠나 1주일간 전국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나머지 친구들이 무얼 했는지 알 수 없지만 공부를 하지 않은 것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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