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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암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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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5.02.16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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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준의 출생지?

한강을 따라 내려가다 가양대교를 조금 지난 강서구 가양동에는 여느 한강변과 마찬가지로 아파트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이 아파트 숲의 한가운데 자그마한 근린공원이 하나 자리 잡고 있다. 구암공원(龜巖公園)이다. 구암은 허준의 호인데 이 공원의 한쪽에는 환자를 치료하는 허준의 모습이 동상으로 세워져있다. 그렇다면 왜 이 지역에 허준의 호를 딴 공원이 들어서고 그의 동상까지 세워졌을까?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이 지역 즉, 지금의 강서구 가양동 일대는 과거 양평(陽平), 공암(孔巖), 파릉(巴陵) 등으로 불렸는데 허준이 공신책봉 때 양평군이라는 읍호(邑號)를 받았고, 허준의 아들 겸 또한 파릉군이라는 읍호를 받았다. 이처럼 허준과 그 아들이 모두 동일한 지역의 읍호를 받았으므로 이 지역을 허준의 출생지로 보아 여기에 허준을 기념하는 공원을 만든 것이다. 또 '파릉산집(巴陵散集)'이라는 문집에 따르면 허준이 이 지역 공암의 바위 아래 허름한 집에서 살면서 책을 지었다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 구절도 이 지역과 허준의 밀접한 관계를 말해주는 자료로 이용된다. 실제로 이 공원에 인접한 곳에는 허가바위라는 이름이 붙은 큰 바위가 있는데 그 안쪽으로 천연동굴이 형성되어 있다. 허준의 본관인 양천 허씨의 시조가 이 동굴 안에서 태어났다는 전설이 전해져 허가바위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허준이 이 동굴 안에서 '동의보감'을 지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이 지역을 허준의 출생지로 보고 그의 호를 딴 공원까지 세웠지만 허준의 출생지에 관해서는 이설이 많다. 경상도 산청, 전라도 담양, 경기도 파주, 그리고 서울 강서구의 가양동까지 무려 네 지역이 그의 출생지 후보로 올라있는 것이다. 그래서 해당되는 자치단체들이 저마다 허준과의 연고성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각 자치단체들이 이처럼 허준과의 연고성을 주장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최근 허준에 관한 소설과 드라마가 거둔 대성공을 볼 때 허준은 그 지역을 선전할 수 있는 더 없이 좋은 문화적 아이템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쟁에서 강서구가 가장 발 빠르게 움직였고 이 지역에 허준의 호를 딴 구암공원을 조성하기에 이른 것이다. 강서구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매년 일종의 한의학 축제인 '허준 축제'를 자치단체 행사로 개최하고 있다. 그리고 현재 구암공원 안에는 한의사협회 건물이 신축 중에 있으며 허준 기념관도 이곳에 준비 중에 있다. 허준이 이곳에서 태어났건 태어나지 않았건, 또 이 지역과 관계가 있었건 없었건 관계없이 이 지역은 21세기 허준의 명소로 새롭게 태어나고 있는 중이다.

사실 허준에 관한 기록은 많지 않다. 그나마 그가 의관이 되어 내의원에 들어간 이후에는 실록에 왕의 치료와 관련된 기사들이 여럿 나오지만, 그가 관직으로 나아가기 이전 어린 시절이 어떠했는지, 그가 어떤 과정을 거쳐 의학에 입문하게 되었는지를 알려주는 자료는 거의 없다. 소설이나 드라마에서는 그의 수학과정이 극적으로 묘사되어 있지만 이 역시 완전한 허구이다. 허준이 스승의 시신을 해부하는 장면은 말할 나위도 없다. 무협지에서도 기인을 만나 절세의 무공을 전수받는 장면이 가장 재미있고 또 필요하듯이 허준의 생애에서도 그런 계기를 설정한 작가의 상상력을 탓할 이유는 없다.  허준은 의관으로 여러 가지 기록을 세운 인물이다. 의원의 사회적 지위가 그다지 높지 않던 조선시대에, 더구나 서얼 출신의 기술관으로 그는 당상관이 되었고 후에는 종1품에 오르는 등 조선시대 의관으로는 가장 높은 품계에 이르렀다. 서얼 출신의 의관이 이처럼 높은 지위에 오른 것에 대해 문관들의 질시가 심해 사간원과 사헌부에서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허준의 탄핵을 요구했다. 그렇지만 허준에 대한 선조의 신임이 워낙 두터워 선조가 이런 탄핵에서 허준을 막아주었다. 후에 선조가 승하한 후에 그 치료를 담당했던 허준이 책임을 지고 귀양을 가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으나 광해군도 그를 두둔해주었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허준은 '동의보감'을 완성할 수 있었다.   

사실 한국인에게 허준과 '동의보감'은 거의 신화적인 존재이다. 길거리의 돌팔이 약장사도 빼놓지 않고 하는 이야기가 자기 약은 '동의보감'에도 나오는 약재이고 처방이라는 말이다. 또 당장 서점의 건강 코너에 가보면 '동의보감'이라는 이름이 붙은 책들이 서가에 줄줄이 꽂혀있는 것을 손쉽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동의보감'에 대한 이 대책 없는 맹신이 어디에서 유래하는지 추적하기는 어렵다. 백년전 이 땅에 온 선교사들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그 때도 허준과 '동의보감'은 조선을 대표하는 의서로 이름이 높았다. 물론 '동의보감'은 당대 동아시아 의학을 체계적이고 독창적인 관점에서 정리해놓은 훌륭한 의서이며 의사학적으로도 충분히 큰 가치가 있는 책이다. 그러나 그것이 몇 백 년을 지난 오늘에 이르기까지 맹신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책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그 책을 대하는 사람들의 문제라고 하겠다. 허준은 '동의보감' 이외에도 여러 권의 책을 지었다. 맥학에 관한 지식을 정리한 '찬도방론맥결집성', 출산과 임산부의 질병에 관한 '언해태산집요', 응급처치방법을 모은 '언해구급방', 두창에 대한 의서인 '언해두창집요' 등 세 권의 언해본 의서와 전염병 전문의서인 '신찬벽온방'과 '벽역신방'이 그것이다.

허준의 출생지와 관련해 여러 이설이 존재하는 것과는 달리 허준의 묘소 위치는 분명히 알려져 있다. 사실 허준 묘소의 위치가 분명하게 알려진 것은 최근의 일이다. 그의 묘소는 일반인들의 출입이 통제된 민통선 안에 위치하고 있어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은 원래의 묘비까지 발견이 되어 그의 묘소 전체가 깔끔하게 재단장되었지만 발견 당시까지는 민통선 안에서 잡목이 우거진 채로 방치되어 있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이 묘소가 민통선 안에 있어 손쉽게 가보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사전에 미리 신청을 해야 하고 개인이 아닌 단체에 대해서만 출입이 허용되는 등 까다로운 절차를 밟아야한다. 어쨌든 그의 출생지를 둘러싼 바깥세상의 소란과는 무관하게 허준은 민통선 안에서 조용히 잠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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