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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산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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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5.02.16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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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는 사과의 고장, 의료 선교가 씨앗

동산병원을 다시 찾은 것은 12월답지 않게 햇볕이 따뜻한 어느 오후였다. 그동안 대구에 왔을 때 몇 차례 지나친 적은 있었지만 병원 안으로 걸어가 본 것은 거의 30년만이었다. 필자에게 동산병원은 많은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곳이다. 어린 시절 감기라도 걸리면 어머니 손을 잡고 주로 찾던 곳이기도 했고, 초등학교 입학 직후에 일주일간 입원한 적도 있어 무척 친근한 병원이다.기독교적인 배경 때문이기도 했지만 필자나 필자의 가족들은 몸이 아프면 모두 동산병원에 다녔다. 대구에 사는 동안 대학병원에 간 적은 한 번도 없었고 주위의 사람들도 대개 동산병원에 입원했다. 동산병원이 있는 동산(東山)은 그야말로 나지막한 동산이다. 지금은 병원과 약령시 안에 있던 제일교회가 옮겨왔지만 그전에는 병원뿐 아니라 선교사들이 운영하던 학교며 신학교가 모두 이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동산병원에는 백 년이 넘는 역사에 걸맞게 의료선교박물관이 있어 거기에 먼저 들렀다. 과거 선교사들이 살던 고풍스런 양옥을 박물관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집은 모두 세 채였는데 각각 테마를 달리해 의료박물관·선교박물관·역사박물관으로 꾸며놓았다. 그 집들은 모두 지방의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고 한다. 박물관은 동산병원이 개원 백 주년을 맞아 기념사업으로 만든 것이다. 조경이 잘 된 박물관 앞뜰에서는 성장을 한 예비신랑신부의 사진 촬영이 한창이었다. 필자가 박물관에 도착한 것은 다소 늦은 오후여서 개관시간이 지났지만 담당직원의 배려로 박물관을 둘러볼 수 있었다. 의료박물관은 주로 과거 동산병원에서 사용하던 여러 가지 의료기구들을 모아놓았는데 그 가운데는 다른 곳에서 보기 힘든 흥미로운 의료기구들도 적지 않았다.

박물관 한쪽에는 전통의학에 대한 유물들도 전시해놓고 있었다. 박물관 2층은 선교사들이 생활하던 공간을 그대로 보존해놓고 있었다. 동산병원에서 일했던 마팻 선교사의 침실이며 거실, 서재 등이 잘 보존되어 있었다. 심지어는 옷장을 열어보니 낡았지만 깨끗해 보이는 옷가지들도 그대로 보관되어 있었다.선교박물관은 일종의 기독교 박물관으로 의료에 관한 내용이 아니라 주로 초창기 한국과 이 지역의 기독교 역사와 관련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병원의 초창기 역사와 관련된 문서자료들이 별로 없어 다소 아쉽기는 했으나 동산병원의 전도회에 대한 자료는 잘 보관되어 있었다. 동산병원은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존슨(Dr.Woodbridge Odlin Johnson)에 의해 시작되었다. 존슨은 1897년 12월에 내한하여 그 해 성탄절에 처음 대구에 왔다. 존슨이 한국에 온 것은 1897년이지만 진료소를 개설한 것은 약 2년이나 지난 1899년 성탄절 무렵이었다.  

이처럼 진료소의 개원이 늦어진 이유에 대해서는 몇 가지 추측이 있다. 먼저 존슨이 내한하며 대구와 가까운 부산항으로 자신의 짐을 부쳤는데 착오가 발생하여 짐이 제물포로 운반되었다. 그래서 그의 짐을 찾는 데만 약 반 년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이와 함께 주문한 의약품의 도착도 상당히 지연되었고, 또 존슨이 한국말을 제대로 배운 후에 진료를 시작하겠다고 생각하여 한국말 공부에 몰두한 것도 진료소의 개원을 연기시킨 한 원인이 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대구에 처음 진료소를 개설한 위치는 현재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약령시 안에 있던 대구 스테이션 혹은 제일교회 안이었다고 추측된다. 진료소의 이름은 제중원이었는데 후에 세브란스 병원이 된 서울 제중원을 시작으로 북장로교에서 개설한 진료소에는 모두 제중원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병원은 한옥을 개조하여 만든 것으로 진찰실, 병실, 약제실, 수술실 등이 고루 갖추어져 있었다.

개원 후 첫 해에는 약 1700여 명의 환자를 치료했다. 제중원이 원래 자리를 잡았던 곳은 위치가 그다지 좋지 않아 선교부에서는 인근에 있는 동산을 매입하여 그리로 옮겨갔고 제중원도 이곳에 새로 짓기로 하였다. 설계는 세브란스 병원을 설계한 캐나다인 고든이 맡았으며 1903년부터 공사에 착수했으나 1905년 태풍에 무너지고 말았다. 이듬해에 다시 병원을 지었는데 그 다음부터 환자들이 폭주해 내원 환자가 5000 명에 이르렀다. 이와 함께 존슨은 병원 근처의 초가집을 매입해 나환자를 돌보기 시작했다. 이것이 애락보건병원의 시작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나환자 사업은 존슨이 떠나고 플레처가 부임한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특히 1913년 영국 나환자 선교회의 창설자인 베일리 부부가 대구 제중원을 방문한 것이 계기가 되어 나환자 사업에 필요한 돈을 기부 받았고 이것으로 1916년에 시내에서 떨어진 곳에 토지를 매입하여 새로 건물을 짓고 1917년에 정식으로 개원하였다. 존슨은 이외에도 의학생들을 뽑아 의학교육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의학교육은 서울의 제중원에서 에비슨에 의해 이미 이루어지고 있었고, 평양의 제중원에서도 이루어졌다. 후에 세브란스 병원으로 연합되면서 각 지역에서 개별적으로 이루어지던 의학 교육은 서울의 제중원으로 집중되었다.

이처럼 다양한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던 존슨은 뜻하지 않게 발진티푸스에 걸렸다. 다행히 목숨을 잃지는 않았으나 회복된 후 건강이 많이 악화되어 어려움을 겪었다. 의료 활동을 계속하기에는 건강이 허락하지 않아 결국 의료선교 활동을 그만두고 일반 선교활동을 하다가 그나마도 힘에 부쳐 1912년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돌아갔다. 동산병원은 영남 지역 의료선교 활동의 거점으로 앞서 말한 나병원도 그런 배경으로 설립될 수 있었다. 또 존슨은 안동에도 잠시 가서 진료활동을 했는데 이것이 계기가 되어 후에 안동 성소병원이 세워질 수 있었다.

한편 대구는 사과의 산지로 유명한데 여기에도 존슨의 공이 크다. 존슨은 처음으로 대구 지역에 새로운 품종의 사과를 들여와 자기 집 뜰에서 재배하다가 이를 보급시켜 오늘날 대구를 사과의 고장으로 만들었다. 지금도 의료선교 박물관의 뜰에는 사과나무가 한 그루 서있는데 존슨이 들여온 사과나무의 자손목이라고 한다. 역사는 그렇게 이어지는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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