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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창립]의협 태동 배경과 역사적 의미
[2001창립]의협 태동 배경과 역사적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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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1.11.15 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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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익(서울의대교수 의사학)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적 의사단체이자 대한의사협회의 모체인 의사연구회(醫事硏究會)는 1908년 11월 15일 탄생하였다. 잘 아다시피, 그 즈음 민족과 나라의 운명은 풍전등화 상태였다. 바로 전 해인 1907년, 고종이 일제에 의해 황제의 자리에서 쫓겨났고 국권의 최후 보루인 군대마저 강제 해산되었다. 의학 분야라고 예외일 수는 없었다. 즉 대한제국의 상대적 흥성기에 탄생했던 우리나라 최초의 의사 양성기관(의과대학)인 의학교(醫學校) 역시 마찬가지 역정을 걸을 수밖에 없었으니, 1907년 3월 '대한의원 관제(大韓醫院 官制)'가 반포되면서 운명을 다하게 되었다.

 

의학교, 광제원, 대한적십자병원 등 대한제국기 대표적인 세 의료기관을 통폐합하면서 생겨난 새 병원의 이름은 시니컬하게도 `대한'의원이었지만 그것은 명목상일 뿐 병원은 이미 일제의 것이었다.

'항일결사조직체' 성격

이러한 역경의 시기에 김익남 등 의학교 교관을 지낸 인사들과 유병필 등 의학교 졸업생들은 의료를 통한 구국운동에 앞장섰다. 이들이 결성한 의사연구회는 학술연구와 친목을 위한 것 이외에, 보름 앞선 10월 30일 한성(漢城)에서 활동하던 일본인 의사들이 조직한 계림의학회(鷄林醫學會)에 대항하고 일제의 침략에 맞서 싸우기 위한 항일결사조직체로서의 성격이 뚜렷하였다.

이 의사연구회의 회장에는 1899년 11월 일본의 도쿄지케이의원(東京慈惠醫院) 의학교를 졸업하고 1900년부터 1904년까지 의학교에서 교관(교수)을 하던 김익남(金益南)이, 부회장으로는 역시 도쿄지케이의원 의학교를 1902년에 졸업하고 1904년부터 1905년까지 의학교 교관이었던 안상호(安商浩)가 선임되었다.

그리고 총무는 1902년 의학교를 1회로 졸업하고 당시 대한의원 교관이던 유병필(劉秉珌)이, 간사는 최국현(崔國鉉, 제2회 졸업생)과 장기무(張基茂, 제3회 졸업생)가 맡았다. 즉 의사연구회는 미국에 귀화한 서재필(徐載弼)을 제외하고는 우리 나라 사람으로 최초로 의사가 된 김익남을 중심으로 그 후배와 제자들이 조직한 단체였다.

의사연구회는 창립 직후인 1908년 12월부터 매달 첫 번째 일요일에 월례회를 열어 의학정보를 교환하고 국내외 시국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등 비교적 활발한 활동을 벌였지만 일제 강점 직후인 1910년 10월 강제로 해산되는 비운을 맞았으며, 회장 김익남은 몇 달 뒤인 1911년 1월 만주로 망명하였다.

이렇듯 의사연구회는 불과 2년밖에 존속하지 못하였지만, 그 정신은 1915년 12월 11일 서울에 거주하는 한국인 의사 43명이 모여 만든 한성의사회(漢城醫師會)와 1930년 2월 21일 결성된, 우리 나라 의사들이 만든 최초의 전국적 의사단체인 조선의사협회(朝鮮醫師協會), 그리고 지금의 대한의사협회로 이어진다. 그리고 한성의사회와 일제시대 조선의사협회에서도 안상호와 박계양(朴啓陽) 등 의사연구회 관여 인사들이 회장과 간사장을 맡는 등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의사연구회의 멤버들은 의사단체 활동 외에도 망국 전야의 시기에 `서우(西友)', `서북학회월보(西北學會月報)', `대한흥학보(大韓興學報)' 등 학회지에 활발하게 기고를 하고, 또 대중강연을 벌임으로써 당시 들불처럼 번지던 위생계몽운동에 앞장섰다. 이때의 위생계몽운동은 대중에게 과학적인 위생관념을 심어 주는 것인 동시에 항일운동의 성격도 띠고 있었다.

초대회장 김익남 일생


여기에서 의사연구회의 회장이며, 따라서 대한의사협회의 초대 회장격인 김익남(1870∼1942)에 대해 살펴보자. 우리 나라 근대의학 초창기에 활동한 의사로서 의술, 업적, 지도력, 민족애 등을 기준으로 꼽는다면 김익남을 빼놓을 수 없을 터이지만, 이름이나마 기억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는지.

김익남은 우리 나라 국적을 가진 사람으로는 최초로 근대식 정규 의학교육을 받고 의사가 된 사람일 뿐 만 아니라, 의학교의 교관(교수)으로 초창기의 의사들을 양성하는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대한제국 군대의 군의관으로 수많은 장병과 민간인들의 건강을 돌보았던 사람이다.

또한 김익남은 대한제국 말기 침략적인 성격이 농후한 일본인 의사단체에 맞서 우리 나라 최초의 의사단체를 조직하여 애국적 보건의료 활동을 펼쳤으며, 일제에 강점된 뒤에는 만주로 망명하여 항일독립투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1870년 8월 11일(음력) 서울에서 태어난 김익남은 한문을 수학하는 한편 의술(한의술)을 익혀 20세 무렵부터는 의사(한의사)로서 활동하였다. 당시 지석영을 중심으로 펼쳐지던 우두술, 그리고 서양인 선교의사와 일본인 의사들에 의한 근대서양의술을 접하게 된 김익남은 한의술에 만족하지 않고 근대의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김익남은 1894년 9월 정부에서 운영하는 일본어학교(官立日語學校)에 입학하였다. 그리고 갑오개혁정부의 학부(교육부)가 실시한 일본 유학시험에 합격한 김익남은 1895년 5월 도쿄의 게이오의숙 보통과(오늘날의 중학교 과정)에 입학하여 같은 해 12월 우등생으로 졸업하였다.

우리나라 최초 근대식 의사


이어서 김익남은 1896년 1월 도쿄지케이의원 의학교에 입학하여 본격적인 의학 공부를 시작하였다. 당시 일본의 의학교육 연한은 기초의학 1년반, 임상실습 2년으로 도합 3년반 가량이었던 것 같다. 대한제국 관원이력서의 김익남에 관한 기록에 의하면, 김익남은 입학 1년 반 뒤인 1897년 7월 의학전과(醫學全科)를 졸업하고 (졸업)증서를 받았으며, 같은 해 9월 12일에 의학후기(醫學後期) 과정에 진입한 것으로 되어 있다.

2년에 걸친 임상과정을 마친 김익남은 1899년 7월 30일 다시 의학전과 (졸업)증서를 받았는데, 요즈음 식으로 말해 의과대학 졸업장을 받은 것이다. 서재필이 1892년에 미국 워싱턴의 콜럼비안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의사가 되었지만 미국인으로 귀화하고 나서였고 그 뒤로도 철저히 미국인으로 자처했으므로 김익남을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식 의사라고 보는 편이 타당할 듯하다.

민족 속 참의사 모습심어


1900년 4월 2일 정부는 김익남을 의학교 교관에 임명하였고, 약 1년에 걸친 임상 수련을 마친 김익남은 7월, 5년 남짓의 유학생활을 마감하고 귀국하여 교관에 취임하였다. 김익남이 1904년 9월까지 교관으로 활동하는 동안 의사로 일본인 고다케(小竹武次, 나중에 대한의원 부속의학교장)가 있었지만 실력, 인품, 열성 등 모든 면에서 김익남에 크게 미치지 못하였다.

교장 지석영이 의학교의 정신적 지주이고 행정상의 책임자였지만, 김익남 없는 의학교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핵심적인 구실을 하였다. 그리하여 1902년 7월 4일, 우리 나라 역사상 최초로 유병필 등 근대식 의사 19명을 배출하였으며, 1903년에는 12명이, 교관을 퇴임한 뒤이지만 1905년에는 4명이 졸업하였으니, 이들이 우리 나라 의사의 효시인 셈이다.

김익남은 의학교 교관과 더불어 임시위생원 의사, 유행병 예방위원 등을 겸임하면서 학생 교육, 근대의학 발전, 국민건강 증진에 커다란 공을 세웠다. 그리고 1904년 9월 이후에는 군의장(軍醫長)으로 군인과 민간인들의 건강 증진과 질병 퇴치에 진력하였다.

1908년에는 의학교 제자 등과 함께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적 의사단체인 의사연구회를 결성하고 회장에 취임하여 의료를 통한 구국운동에 앞장섰다. 그리고 1911년 1월에는 만주로 망명하여 만년인 1930년대에 귀국할 때까지 이역 땅에서 독립운동에 온 몸을 던져 헌신하였다.

이렇듯 회장 김익남을 비롯하여 의사연구회 회원들은 도입 초기의 근대의학을 이 땅에 뿌리내리는 데 크게 공헌하였을 뿐만 아니라 민족과 사회 속에서 진정한 의사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고 실천함으로써 역사 속에 길이 살아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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