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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2024-04-25 18:04 (목)
[2000창립]의료계 휴·폐업 투쟁/대란의 발단

[2000창립]의료계 휴·폐업 투쟁/대란의 발단

  • 장준화 기자 chang500@kma.org
  • 승인 2000.11.15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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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뒷짐에 졸속시행 예견

국민위한 바른제도

믿었던 정책이 '졸속' 희생양 응어리 '봇물'

'이대론 안된다' 목청

 

 

‘휴진, 폐업, 재폐업, 총파업….’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의료대란’이 이 땅에서 1년 가까이 계속되고 있다. 잘못된 의료정책 때문이다.
정부는 지난 1984년 한약분쟁 이후 약사회의 요구에 의해 약사법을 개정하면서 1999년 7월 1일부터 의약분업을 시행하도록 명문화 했다.

의약분업이 시행되면 약의 오남용이 줄어들어 약화사고로부터 국민건강을 보호할 수 있고, 또 의약인의 역할을 명확히 구분함으로써 국민보건향상에 기여하고 선진 의료체계를 확립하는 의료분야의 개혁조치로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부는 그 후 이 제도의 정착을 위한 노력을 게을리한 채 무사 태평하게 안일한 자세로 대처해왔다. 급기야는 시행시기가 다가오면서 의약분업 문제는 이해 당사자인 의·약계가 첨예하게 대립하면서 급류를 타기 시작했다.


의·약 반발 시행 1년 연기


의료계는 약사들의 임의조제와 무면허의료행위를 원천적으로 봉쇄할 수 있는 법적장치를 촉구하면서 이같은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의약분업에 참여할 수 없음을 분명히 밝혔다. 약계도 지금까지의 우리 나라 관행을 들먹이면서 임의조제와 대체조제권 확보에 안간힘을 썼다.

그렇지 않아도 분업 준비에 소홀해 왔던 정부는 시행 4개월 남짓 남은 3월에 못이기는 척 의·약계의 합의를 도출하여 시행한다는 명문을 걸어 시행시기를 1년간 연기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 후 시민단체의 주도적 역할로 `5·10 의약분업 합의안'이 마련되고, 이를 추진하기 위해 소비자단체, 언론계, 학계, 그리고 의약단체 대표들로 의약분업실행위원회가 구성되었으며, 의약분업 정착을 위한 본격적인 논의 작업에 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의료계는 숫적 열세로 의견을 반영시킬 수 없었으며, 한계를 느낀 의료계 대표가 회의도중에 퇴장하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결국 의료계 대표가 없는 회의에서 의약분업 시행을 위한 약사법 개정안이 마련되고 9월 정기국회에서 통과됐다.

의료계없이 약사법 국회통과

여기다가 11월 15일 의약품 실거래가 상환제가 도입되면서 30.7%의 약가 인하조치가 이루어졌다. 그동안 저수가체계에서 약가마진으로 근근이 의료기관의 경영을 지탱해 왔던 의료계로서는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 왔다.

더욱이 언론이나 국민이 의사들의 절망감을 이해하기 보다는 약사와의 밥그릇 싸움으로 치부하고 약값으로 그동안 얼마나 배를 불려왔나하는 시선에 의사들의 현실적 절박함과 분노는 터져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의사들은 자연스럽게 거리로 뛰쳐 나왔고, 그동안 가슴속으로만 울분을 새겨야했던 목소리를 정부를 향해 외치게 됐다.

장충체육관 집회와 의쟁투

1999년 11월 30일, 장충체육관. 전국에서 3만여 개원의사가 모여 들었다. 우리 의료역사상 처음있는 일로 이들은 완전의약분업을 위한 `선 보완, 후 시행'과 함께 의료보험시행 이후 23년간 가슴속에 찌들었던 의료보험수가 현실화를 목이 터져라 외쳤다.

약사들의 임의조제 근절과 진료권을 보장받겠다는 의사들의 투쟁은 이렇게 시작됐다. 시작의 저항은 주로 개원의사들이었으며, 경영상의 어려움이 그 이유였다. 정부의 안대로 의약분업이 시행될 경우에는 대다수, 특히 내과계열의 의원들이 자의건, 타의건 폐업상태로 갈 수 밖에 없었기에 생존권 차원에서 멀고 먼 투쟁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대로는 안된다'는 개원가를 중심으로 한 젊은 회원들의 위기의식은 점차 확산되고, 바닥에 떨어진 의권수호를 위해 드디어 12월 21일 의권쟁취투쟁위원회(의쟁투)가 탄생했다. 완전의약분업의 실현과 의료보험수가가 현실화될 수 있도록 보다 강력하고 지속적인 투쟁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의쟁투의 탄생은 의약분업의 투쟁에 탄력을 주게 되었으며, 개원의에 국한했던 투쟁을 전공의, 학생, 봉직의, 나아가 교수들까지 그 지평을 넓혀가는 계기가 되었다.

‘2·17 여의도대회’투쟁선포


그런 의미에서 `2·17 여의도대회'는 대정부 투쟁의 선전포고로 의권수호가 이뤄질때까지 강력한 투쟁이 계속 이어질 것임을 예고했다.

전국 7만여 의사들은 이 대회에서 대체조제 및 임의조제에 대한 법적 보장등이 관철되지 않을 경우 정부의 의약분업을 거부한다는 입장을 천명하는 동시에 면허증을 반납하고 3월 2일부터 전국 휴진에 들어가기로 결의했다.

이같은 저항은 대통령으로 하여금 의사들에게 불이익을 가지 않도록 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러나 휴진을 접고 기다린 결과는 “또 속았구나”하는 배신감 뿐이었다.

정부 약속 불이행 휴진 원인

격분한 의료계는 6월 20일 폐업투쟁을 선포했다. 이번에는 전공의, 봉직의, 의대생, 나아가 교수들까지 가세했다. 전국 의료기관들이 일제히 문을 닫았으며, 전공의들은 사직서를 제출하고 병원문을 나와 투쟁대열에 합류했다. 또 의과대학생들은 동맹휴업에 들어갔다. 그리고 교수들은 전공의들이 떠난 자리에서 환자진료를 담당했으나 사직서를 제출하고 올바른 의약분업이 되지 않을때 진료를 포기할 수 있음을 천명했다.

투쟁강도가 높아지자 또다시 여당총재인 대통령과 야당총재가 회동하여 의료계에 불이익이 가는 일이 없도록 약사법을 개정하겠다고 국민앞에 약속했다. 의료계는 정부의 약속을 믿고 또 폐업투쟁을 접었다. 그 결과로 나타난 약사법 개정은 이전 보다 못한 악법으로 개악되었으며, 의약분업은 의료계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8월 1일 전면 시행에 들어갔다.

전공의 참여 투쟁 새 힘

끝이 보이지 않는 투쟁과정에서 개원의들은 나약해지고 투쟁대열에서 분열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때 전공의들이 들고 일어났다. 이들의 투쟁이념은 약사법 재개정에 대한 불신과 정부, 언론, 시민단체에 의한 일방적인 매도에 대한 반발, 그리고 의료계 전반에 걸친 의료환경개선(교과서적 진료)을 목적으로 2차폐업을 주도했다. 전국 의과대학교수들도 전공의들의 투쟁에 동참을 선언, 종합병원의 진료마비사태가 빚어졌다.

지금까지 4차례의 휴·폐업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해결의지는 미진하기만 하다. 정부는 의약분업은 반드시 국민을 위한 제도가 되어야한다는 원칙아래 이 사태를 원만하게 해결할 수 있는 지혜를 보여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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