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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겸손하게 생명사랑의 삶을 평생 갖게 하소서
오늘도 겸손하게 생명사랑의 삶을 평생 갖게 하소서
  • 김병덕 kmatimes@kma.org
  • 승인 2005.01.26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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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상계동 은명내과의원 김경희 원장

'겸손'과 '생명 사랑' … 61년

의사로서, 사회사업가로서 60년 넘게 이어져온 김경희 원장(내과 전문의?84세)의 수많은 행적들은 의료계 뿐만 아니라 사회 각계에도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개업의로서의 진료를 비롯해서 지역 사회 빈자들을 위한 봉사 진료, 주민 계몽을 위한 간염 공개 강좌와 무료 상담, 무료 독서실 운영, 무의탁 노인과 지체 부자유자들을 위한 심부름 서비스, 불우 청소년을 위한 장학 사업…등에 이르기까지, "단지 하나님의 사명에 따랐을 뿐"이라는 그의 평생의 업은 모두 '은명'의 이름으로 행해진다(그의 의료 선교는 이미 세브란스의전 2학년 때 답십리 조선보육원 고아들의 건강을 돌봐준 데서 시작된다).

 '은명'은 어머니 고 서명신 권사가 생전에 못 다한 일을 계승하기 위해 1969년에 창립한 '명신회'를, 부친 김은식 장로가 별세한 후 부친의 함자 '은'자와 모친의 함자 '명'자를 따 개명한 것이다. 김경희 원장은 자서전 「이 사람 의사 김경희」(도서출판 에스프리, 1999년)에서 당시의 소회를 이렇게 적고 있다. "…어머니께서 못다하신 주님의 일을 불초한 이 몸이 계승하여 예수님의 사랑을 세상에서 버림받은 소자들에게 베풀겠습니다."

 

1984년, '어려운 이웃 많은' 상계동에 은명내과 개원

이미 신림동, 답십리 청계천 뚝방, 망원동 한강 뚝방 등 판자촌에 머물며 무료 진료하던 김경희 원장이 노원구 상계동에 은명내과의원을 개설한 때는 1984년 3월. 그 이유를 "이 동네가 어려운 이웃들이 많다고 해서"라고 말한다. 실제로 그는 영세민이 많은 지역을 찾아 미아동과 상계동, 중계동 등지를 돌아다닌 결과, 중계동이 최적지라 생각했지만 의원을 개설할 만한 집을 얻을 수가 없어 상계동으로 결정했다고.

이 부분의 얘기를 듣고, 나중에 자서전을 읽어보니, 은명내과 대기실에 걸려 있던 글이 생각난다.  "1종 환자는 진료비가 모두 무료이며, 2종 환자는…"이라고 의료보호 지정 의원으로서의 은명내과 이용방법을 안내하고 있는데, 그 아래에 이렇게 적혀 있다.

"의료보호대상에서 제외된 분으로 생활이 어려운 분은 접수 창구에서 미리 말씀해주십시오."

처음 읽어내려가면서 '참 세밀한 배려심을 지닌 분'이라 생각했었는데, 전후 사정을 알고보니 그로서는 매우 당연한 일이겠다 싶다.

 

1000원 진료, 장학 사업, 무료 심부름 센터…

그러나 김경희 원장에게 '의료보호대상에서 제외된' 그들은 단순히 측은한 대상이 아니다. 자존심과 자립심을 존중해줘야 할, 다만 환자일 뿐이다. 늘 무료 진료를 병행하던 그가 1985년부터 1989년까지 시행한  '1000원 진료'는 이를 잘 말해준다.

"사람들이 병이 생기면 무조건 약국에서 약을 지어 먹었지. 진찰도 제대로 못 받고 검사도 제대로 못 하고. 감기나 소화불량 같은 병은 낫기도 하는데, 안 나을 경우도 있고 더 나빠지기도 하지. 저 사람들에게 내가 진찰도 하고 검사도 해주고 약도 지어주고 해서 1000원을 받으면, 그 돈으로 약만 사 먹는 것보다 더 낫겠다 싶었지. 그냥 무료로 하는 것은 안 좋아. 환자의 자존심도 세워줘야지."

당시 직장의료보험만 시행되던 때라 '1000원 진료'는 사회적으로도 큰 반향을 일으켰다고 한다.

그는 뭔가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바로 실행에 옮겼다고 했다. '사명'을 실천하는 일에 관한 것이라면 끊임없이 생각하고 실행에 옮겨온 것 같다.

1985년에 은명장학회를 설립해서 지금까지 불우 청소년 2200여명에게 장학금을 지급해왔고, 1986년에는 심장수술후원회를 설립하여 선천성 심장병 환자 36명을 후원했다. 무료 독서실을 열어 상계동과 중계동 일대 주민들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게 했고(1990년~1997년), 무료 심부름 센터를 열어 무의탁 노인과 지체 장애인들의 병원 진료를 도왔다. 물론 무료 진료는 중계동 무료진료소를 중심으로 늘 병행(1990년~1997년)했으며, 중계사회복지관으로의 무료 왕진은 지금도 매월 둘째, 넷째주 일요일마다 계속되고 있다. 이 왕진으로 해서 김경희 원장은 점심을 굶은 게 다반사가 되어, 간호사들과 함께 떡볶이와 오뎅 같은 주점부리를 함께한다고.

그에게는 동반자가 있으니, 아내 임인규 여사(81세)와 진삼웅 목사이다.

"진삼웅 목사님은 14년 전부터 간호사로, 조수로, 조언자로 지금까지 도와주고 있지.…우리 할머니? 그 할머니 도움 없이는 (이 모든 게) 불가능했지."

 

간염 환자를 위한 캠페인 등 주민 계몽운동 계획

그리고, '바이러스'를 전공한 의사(1957년 일본 경도대학 대학원에서 미생물학 의학박사를 취득했다)로서 그는 1991년부터 꾸준히 간염 공개 강좌와 인터넷 상담 등으로 주민 계몽 운동을 하고 있다. 1998년 한국간협회를 설립(현재 명예회장)해서 격월간「간의 등불」을 발행하고, 내원하는 환자들한테 간기능 검사와 진단 방법, 검사 결과를 적는 요양기록 등으로 구성된「요양수첩」을 무료로 제공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난 후회도 없고 하고 싶은 것 다했어요. 그런데 한 가지 남은 건…이제 따뜻해지면 간염 환자를 위한 가두 캠페인을 하려고. 간염이 간경변, 간암으로 무섭게 진행되는데, 먹고 살기 바쁘니 다들 잊어버린다고. 지식과 상식을 알려서 계몽시키려는 거지. 간염 강좌, 상담을 본격적으로 해보려고 사람들에게 나눠줄 원고도 지금 쓰고 있어요."

늘 대학입시를 준비하는 재수생같이 지금도 의학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는다는 그는, 젊은 의사들을 따라가기 위해 나이 일흔의 노구로 모교에 나가 위내시경과 초음파 등을 공부했다고 한다.

 

의사의 최고 덕목, 겸손과 생명사랑

"난 술, 담배도 안하고 취미도 특별한 게 없어요. 건강을 위해 걷는 것밖에. 무미건조하다 그럴까. 단지 한 가지, 하나님이 사명을 주셔서 사명대로 살려다 보니 생활이 좀 복잡해지고 여러 가지 일을 하게 된 거지."

처음이나 지금이나 과히 달라진 게 없다는 이 '무미건조한' 노의사는 10년 전의 자서전에서나 지금이나 의사의 '겸손'과 '생명사랑'을 강조한다.

"나는 아침에 출근하면 우리 송은옥이라는 장학생이 6개월 동안 그려서 선물한, 저 성화를 보고 1분간 묵도해요. '오늘 하루도 겸손하게, 겸손한 하루를 보내게 해주십시오.' 의사들이 겸손의 덕을 배우면 최고로 좋은 의료를 할 수 있을 겁니다. 겸손하면 자동으로 양질의 의료를 베풀게 되고 환자에게 기쁨을 주게 되죠. 겸손과 생명 사랑하는 마음... 그게 최고입니다."

김경희 원장이 지금껏 손 대온 일은 너무나 방대해서 누구도 선뜻 이어갈 엄두를 못 내는 상황이다.

"내 손이 안 가면 멈추겠죠. 그러면 그 동안 도움을 받던 사람들이 영향을 받겠죠. 허나 그것은 하나님께 맡겨야죠."

김경희 원장이 자서전을 낸 지 딱 10년이 흘렀다. 그 10년 간 한 일이 더 많을 터인데, 속속들이 적지 못해 아쉽기만 하다. 대신 '판자촌을 찾아간 크리스챤 의사, 그 바보같은 삶'이라 부제를 단 그의 자서전을 권하고 싶다.

 

글 최지영 대리(보령제약 사보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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