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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2024-04-18 21:27 (목)
유럽 뇌종양학회 참관기

유럽 뇌종양학회 참관기

  • 이석영 기자 dekard@kma.org
  • 승인 2000.07.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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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용길
밤 10시가 다 되어 코펜하겐 공항에 도착하였다. 6월 초순인데 북유럽의 백야현상 때문인지 바깥은 아직도 훤하다. 전철을 이용하여 약 15분 정도 걸려 코펜하겐 중앙역에 도착하였다. 학회에서 소개해준 호텔이 역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으므로 도보로 가기 위해 역사를 빠져 나왔다.

약도를 보고 길을 건너 호텔거리에 들어서자 늦은 시간이라서 그런지 술병을 손에 들고 비틀거리는 알콜중독자들과 붉은 조명의 성인용품 가게들이 눈에 들어온다. 코펜하겐은 안전하다는 학회주최측의 홍보에도 불구하고 혼자서 낯선 거리를 통과하자니 약간의 긴장을 느낀다. 호텔에 도착하여 낯익은 참가자들을 보고서야 마음이 좀 가벼워진다.

시차 때문에 잠을 설치고 다음날 아침 일찌감치 눈을 떴다. 호텔 후론트에 물어 가까운 곳에 있는 조깅코스를 한 바퀴 뛰고 나니 찌뿌듯한 기분이 좀 나아졌다.

저녘부터 환영만찬이 시작되므로 오전에 시내관광을 하였다. 대부분의 시내관광지는 중앙역을 중심으로 도보거리에 위치하기 때문에 우선 역에서 가까운 시청앞 광장으로 나가 보았다.

도심인데도 불구하고 공기는 서울에 비해 훨씬 맑게 느껴진다. 햇빛 날씨 때문인지 벌써 많이 몰려나온 관광객들의 표정이 매우 밝다. 시청사 옆에 있는 안데르센 동상을 찾아가니 아이들을 데리고 사진을 찍는 한 젊은 부부 외에 의외로 사람이 없다.

보행자 거리인 스트로이에 거리로 발길을 옮겼다. 갖가지 먹거리와 볼거리로 모두가 즐거운 표정이다. 인디언 복장에 남미 음악을 열심히 연주하는 중년의 악사 앞에 동전이 수북히 쌓인 것을 보니 여행자들의 인심이 후한가 보다.

길 한 가운데에 끌고 나온 작은 송아지 만한 개들이 오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이런 곳에 웬 개시장? 하고 다가가서 물어보니 멸종이 되다시피 한 순하고 영리한 덴마크 토종개로서 왕실의 각별한 관심 아래 겨우 번식에 성공하여 홍보와 모금을 위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람과 친해지도록 하기 위해 가끔 복잡한 거리에 데리고 나온다고 한다.

이어 코펜하겐의 발상지라는 크리스티앙스보어 성을 둘러보고 아말리엔보어 궁전의 호위병 교체식을 구경한 다음 운하를 끼고 야외 까페, 술집, 그리고 예쁜 집들이 늘어선 뉴하븐 거리에서 점심을 간단히 해결하였다.

오후에는 코펜하겐 교외를 관광하는 "햄릿 튜어"를 하였다. 표를 사서 버스에 오르니 여행객은 약 20여명 정도로 버스의 반 정도를 채웠다. 가이더는 70세는 족히 돼 보이는 노신사인데 빨간 티셔츠에 녹색 파커를 입어서 그런지 목소리와 행동이 훨씬 젊어 보인다. 여행객들의 국적과 직업을 간단히 묻고는 여행안내가 시작된다.

덴마크는 약 300개의 섬으로 구성된 작은 나라이지만 세계에서 가장 큰 섬인 그린랜드가 덴마크에 속해 있으니 덴마크는 결코 작은 나라가 아니라고 농담을 한다. 한 때 매우 부강한 좋은 시절도 있었지만 근세에 스웨덴, 영국, 나치 등 주변 열강의 침략으로 여러 차례 고난을 겪은 역사는 지정학적 요인에 의해 비슷한 운명을 경험한 우리의 근대사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코펜하겐 북쪽으로 이동 하는 중에 창 밖을 보라고 하여 고개를 돌리니 붉은 벽돌로 지은 저층 아파트들이 보인다.

1920 년대에 지은 건물들이라는데 아직 튼튼하고 깨끗해 보인다. 20~30년 지나면 무너지거나 아니면 부수고 새로 지어야 하는 우리의 아파트와 비교가 된다. 코펜하겐 시내를 벗어나 근교로 나오니 나지막한 구릉지에 잘 정돈된 농경지와 푸른 숲이 어우러진 풍경이 매우 아름답다.

이렇게 아름다운 자연을 가꾸게 되기까지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투입되었는데 일 예로 한 그루의 나무를 베면 반드시 한 그루를 심는 것을 법으로 정하여 지켰다고한다. 약 한 시간쯤 지나자 프레데릭스보어 성에 도착하였다.

호수로 둘러싸인 이 성은 1625년 매우 부유했던 크리스티앙 4세에 의해 세워진 르네상스식 건축물이며 중간에 화재로 일부파괴가 되었는데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칼스버그 맥주회사가 나서서 복구하여 국립역사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크리스티앙 4세를 중심으로한 역사유물이 많이 전시되어 있고 덴마크는 잊어도 크리스티앙 4세를 잊어서는 안 된다고 여러 번 강조를 하는 것을 보니 덴마크 역사에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나 보다. 칼스버그 회사 덕분에 좋은 구경 많이 했으니 칼스버그 맥주를 많이 마셔 달라고 우스갯 소리를 하며 크론보어 성으로 이동하였다.

스웨덴 쪽으로 통하는 좁은 해협의 바닷가에 위치한 이 성에서 그 곳을 지나는 배에 대해 통행세를 받았다고 하는데 그때 사용하던 대포들이 그대로 전시되어 있다. 매번 온당한 통행세였다고 강조하는 것을 보면 바이킹 후손들의 마음 한 구석에 편치 않은 데가 있기 때문일까?

바닷바람 소리가 들리는 이고풍스런 성에서 리처드 버튼과 같은 명배우들이 건너와 햄릿을 공연하였다고한다. 가이더는 그 때의 감동을 전해주기라도 하려는 듯 진지한 목소리로 "죽을 것이냐 말 것이냐" 문구를 그럴 듯하게 읊으며 여행객들의 반응을 살핀다. 해안도로를 따라서 돌아오는 길에 아름다운 해변휴양지와 전형적인 덴마크 교회의 정원을 볼 수 있었다.

이번 제 4차 유럽 뇌종양학회에는 유럽을 주축으로 다양한 분야의 뇌종양 전문가 약 600여명이 참석하여 주로 악성뇌종양의 기초 및 임상 연구결과를 발표하고 심도 높은 토의를 하였다. 포스터를 포함하여 약 300여개의 연제를 4일 간에 소화시키자니 진행이 다소 빡빡한 편이었다. 국내에서는 필자와 전남대 정 신 교수가 참가하였다.

첫 날은 종양생물학의 기초연구와 뇌종양환자의 심리·사회적 문제점에 대한 연구가 주로 발표되었다. 기초연구는 종양의 침윤 및 혈관형성과 관련된 연제가 전에 비해 많아졌다.

VEGF 수용체 중의 하나인 neuropilin-1이 뇌종양세포에 발현된다는 덴마크 Broholm의 연구 발표는 최근 필자의 연구팀이 진행하고 있는 VEGF 연구와 관련하여 갖고 있던 의문점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기 때문에 매우 기쁜 소식이었다. 악성뇌종양 환자의 치료에 따른 심리-사회적 문제점들이 환자의 삶의 질에 큰 영향을 미치므로 가족 및 도우미들에 대한 체계적 교육이 환자치료에 중요하다고 하였다.

의료환경의 차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영국의 경우에는 뇌종양환자의 치료에 있어서 간호사의 역할을 강조하였고 환자가 병원을 자주 방문하기보다는 전화를 이용하여 환자를 지지해주고 추적하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하였다.

둘째 날은 뇌종양의 진단, 수술, 그리고 화학요법이 발표되었다. 진단 및 수술 분야에서는 새로운 내용을 발견하기 어려웠고 화학요법 분야에서는 뇌종양 환자들에게 오랜만에 기쁜 소식이 발표되었다.

Temozolomide는 약 10여년 전에 개발된 경구용 항암제로서 1993년 필자가 연수 중이던 미국의 엠디앤더슨 뇌종양센터에서 악성뇌교종 환자를 대상으로 임상실험을 하고 있었는데 지난 해에 고무적인 결과가 처음으로 발표된 후, 이번에는 여러 연구자들에 의해 우수한 치료결과들이 추가로 발표되었다.

반응률, 생존률, 부작용 면에서 이 약제의 우수성을 FDA가 이미 공인하였고, 이는 악성뇌교종에 대한 단독 항암치료제로서 BCNU 이후에 근 20 여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니 여러 뇌종양 환자와 더불어 정말 기쁜일이 아닐 수 없다.

셋째 날은 화학요법, 방사선치료, 유전자요법의 발표로 이어졌다. 뇌임파종에 대한 한우물 연구로 유명한 미국 슬론케터링 암센터의 DeAngelis는 원발성 뇌임파종의 치료에 있어서 심각한 신경학적 후유증을 일으킬 수 있는 방사선치료의 위험성과 methotrexate를 포함하는 화학요법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향후 치료방향을 명확히 제시하므로서 많은 박수를 받았다.

방사선치료 분야에서는 정위적 방사선수술에 이어 최근에는 정위적 방사선요법에 대한 관심이 점차 높아지는 경향을 보였다. 아직 초기 단계이지만 스웨덴을 중심으로 유럽 여러 나라에서 보론중성자포획요법 임상시험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으며 그 동안 논란이 많던 이 치료법의 효과가 머지 않아 판명될 것으로 기대된다.

유전자요법 분야는 연제숫자는 많았지만 눈길을 끌 만한 새로운 내용을 발견하기 어려웠다. 필자는 치료방사선과 김인아 교수와 공동으로 연구한 뇌교종세포에 대한 p53 유전자요법과 방사선조사의 병용효과를 발표하였으며, 그동안 연구자에 따라 서로 견해차이를 보였던 이 치료법의 효과와 작용기전을 더욱 명료하게 정리하는 계기가 되었다.

다음 날은 면역요법에 대한 특별 심포지움이 예정되어 있었으나 이어 서울에서 개최되는 대한암학회에 연제발표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아쉬움을 머금고 서둘러 귀국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루를 빼고 학회기간 내내 햇빛을 보기가 힘들었는데 학회를 끝내고 밖으로 나오자 또 부슬부슬 비가 내린다. 빠듯한 일정을 마치고 피곤한 상태로 저녁 비행기에 몸을 실으니 어느새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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