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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캠퍼스에 아쉬움을 남기고 조범구
[인터뷰]캠퍼스에 아쉬움을 남기고 조범구
  • 김영숙 기자 kimys@kma.org
  • 승인 2004.08.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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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심장기술 한국 토착화 앞장

"젊은이들의 실업문제가 심각하다는데 늙은이가 또 자리를 차지했으니 미안할 뿐이지."
8월말 정년퇴직을 앞두고 8월3일부터 심사평가원 진료심사평가위원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조범구 교수(연세의대 흉부외과학)은 퇴임에 앞서 자리를 옮긴 탓인지 퇴임 소감에 대해 말을 아꼈다.

조 교수의 지난 35년은 한국 심장혈관외과학의 터전 다지기와 중흥, 그리고 소아심장병 환아들의 대부로서의 삶이었다.
67년 세브란스병원 외과전공의 수련을 시작하면서 심장혈관 질환자들에 대한 진료의 질을 향상시키고, 심장혈관외과학의 발전을 위해 많는 연구업적을 축적함으로써 국내 심장혈관학 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해왔으며, 이를 토대로 심장병 어린이들에게 새로운 삶을 찾아주었기 때문이다.

조범구 교수의 부친 조동수 박사는 세브란스의전 소아과학교실 4대 주임교수, 7대 의대 학장, 2대 의무부총장 겸 의료원장(의사협회장도 역임)을 역임한 의료계의 거물이셨다. 조 교수는 그래서 세브란스 사택(서울역)에서 태어나 성장기를 보냈고, 의과대학 학생으로서, 그리고 전공의로서, 교수로서 65년 성상을 세브란스의 울타리에서 지내온 터러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세브란스는 역사에 비해 비교적 늦게 흉부외과학교실이 생긴 편이다.그래서 조 교수는 일반외과에서 수련을 받았으며, 교수부임도 일반외과로 시작했다.

세브란스병원 전공의 시절의 에피소드 하나."71년 미국으로 건너가기 전 6개월을 병원 문 밖을 못나갈 정도로 엄청 힘들게 일했어. 당시 레지던트 4년차 였는데 윗 선배들이 파견병원에서 죽도록 일하느라 줄줄이 전문의 시험에서 떨어졌지.당시 레지던트가 연세의대 2명, 타교 출신 6명이었는데 선배들의 전문의시험 탈락에 충격을 받아 모두 사표를 제출하겠다며 스트라이크를 벌이기도 했지."
조 교수는 76년 미국 흉부외과학회 초청으로 텍사스 심장연구소, 알라바마 대학, 메이요병원 및 하버드 대학에서 심장외과학을 연수하게 된다.그러나 미국에 가기전 이미 그는 승모판이식수술을 국내에서 처음으로 시행해 환자를 살릴 만큼 외과의사로서 실력과 두둑한 배짱을 갖추었다.

미국에서 그는 에버트 A.그라함 펠로쉽을 받아 매달 월급까지 받아가며 선진 심장수술 기법을 익혔다.
"당시만 해도 미국과 한국은 정말 엄청난 차이가 났어.휴스턴 병원 만해도 하루에 30명씩 심장수술를 했더군. 미국에 체류하던 중 한국에도 의료보험이 생겨나고 조금씩 달라졌지."

미국에서의 연수경험을 바탕으로 조 교수는 귀국후 대한민국 개심술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갔다. 각종 성인 심장병과 소아심장병에 개심술을 처음으로 시도·성공함으로써 한국 심장외과학의 수준을 도약시켰다.78년엔 국내 처음으로 심장수술에 심마비액을 도입해 당시 매우 높았던 심장수술 후 합병증 및 사망률을 현격히 줄였는가 하면 심마비액을 도입함에 따라 여러개의 심장판막대치 수술에서 매우 우수한 수술결과를 보고할 수 있었다.

미국에서 돌아온 그는 흉부외과의사로서 활짝 개화하는 시기를 맞게 되고 이 시기에 심장병 어린이들과의 질긴 인연의 끈이 이어진다.
심장 수술분야가 취약하던 때 부산 메리놀 병원의 미카엘라 수녀는 선천성 심장병 환아들을 미국으로 보내 치료하는 일을 맡아했는데 미 8군 군의관 페즐라박사는 조 교수의 흉부외과의사로서의 뛰어난 실력을 확인하고, 미카엘라 수녀에게 소개함으로써 심장병 어린이들과의 질긴 인연의 고리가 맺어진다.

"페즐라 박사의 제안을 받고 78년 처음 진료를 하러 갔는데 부산 메리놀 병원 강당에 선천성 심장병 환아와 보호자 수백명이 모여 있었어.놀랍기도 하고 걱정이 앞서더군.많은 환자를 진료하다 보면 청진기를 꽂은 귀가 아플 정도였지."
이후 조교수는 하루라도 수술을 늦추면 영영 삶의 희망이 사라질 그들을 외면할 수 없게 되었고 미카엘라 수녀에게 한달에 한번 부산을 내려올 것을 약속하면서 서울~부산 간 20년 왕진의 역사가 시작된다.

이렇게 해서 그의 손길을 거쳐간 환아만 3만여명.수술환아만 1,400여명에 이르며, 2차·3차 수술을 거친 환아들도 상당수 있다.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일에 남의 돈 끌어다 쓰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는 철저한 신념으로 차비는 물론 주머니 돈을 털어 자장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환아들을 돌봐왔다.수백명의 환아들이 몰려들자 혼자의 힘만으로는 벅차다고 판단한 조 교수는 당시 진동식, 김충규 세브란스병원장을 모시고 내려가 현장을 직접 보임으로써 병원에서 적극적으로 후원하는 계기를 마련했고, 지금은 후배들이 이 사업을 이어가고 있다.심장병 환아들에 대한 그의 애정이 세간에 알려지면서 2003년엔 본지와 보령제약이 공동으로 선정하는 보령의료봉사상 본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지금은 국내 주요 병원에 심장센터가 설치돼 심장질환 술기가 보편화됐지만 조 교수는 일찌감치 심장병 치료의 체계적인 연구와 관련 전문가의 협동체계가 중요함을 인식, 80년부터 심장혈관센터 설립을 추진, 91년 3월 국내에서 최초로 심장질환 전문치료병원인 연세심장혈관센터를 설립하는 혜안을 발휘했다.또한 심장혈관질환의 예방과 새로운 치료법을 연구하기 위해 의과대학 내에 심혈관연구소를 설립해 심장혈관병원의 심폐이식 프로그램을 이끌어 성공적으로 심장 및 폐이식수술을 주도했으며, 인체조직이식의 중요성을 인식해 96년 및 98년에 인체조직의 냉동보존에 대한 연구를 복지부로 부터 수혜받아 동종 심장판막 등 인체조직을 영구 보존할 수 있는 시스템을 수립했다.

세브란스 병원장 재직시절엔 노동조합 40주년 행사에서 감사패를 수여받아 화제가 됐기도 했다.병원장에게 노조가 감사패를 전달하는 일은 이례적으로 말단직원까지도 존중하고 이해하는 인간중심의 그의 철학과 행동이 직원들에게 전달된 것이다.
조교수는 정년을 한달여 앞두고 심평원 진료심사평가위원장에 임명됐다.84년부터 96년까지 의료보험 연합회 진료비 심사위원등을 역임한 그동안의 경험과 말을 아끼고 중도를 지켜온 지금까지의 삶을 미루어 볼 때 정년후 제2의 인생 역시 정도를 걸어가리라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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