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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2024-03-28 17:57 (목)
특별기고주수호 전 의협회장-현장을 떠나는 의사들, 의사를 고용하지 않는 병원들
특별기고주수호 전 의협회장-현장을 떠나는 의사들, 의사를 고용하지 않는 병원들
  • 주수호 제35대 대한의사협회장 admin@doctorsnews.co.kr
  • 승인 2023.04.15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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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거 없는 의사 수 증원·단편적인 수가 인상 등으로 해결 못해
악 결과 발생했다고 민형사 책임 물으면 '필수의료' 사라질 것
진료현장 목소리 귀 열어야 대한민국 의료 몰락 막을 수 있어
진료 행위 자체에 위험도가 높은 중증-응급 의료를 비롯한 필수의료 의사들이 민사-형사-행정 책임을 묻고 있는 법조계와 행정부의 처벌 경향과 사회적 불신과 인식을 견디다 못해 위험한 진료를 포기하고 있다. 필수의료를 포기하는 의사들이 늘어갈수록 적기에 수술을 받지 못해 전전하다 길 위에서 생명을 잃는 '수술 난민'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그래픽=윤세호 기자] ⓒ의협신문
진료 행위 자체에 위험도가 높은 중증-응급 의료를 비롯한 필수의료 의사들이 민사-형사-행정 책임을 묻고 있는 법조계와 행정부의 처벌 경향과 사회적 불신과 인식을 견디다 못해 위험한 진료를 포기하고 있다. 필수의료를 포기하는 의사들이 늘어갈수록 적기에 수술을 받지 못해 길 위에서 전전하는 '수술 난민'이 늘어나고 있다. [그래픽=윤세호 기자] ⓒ의협신문

우리나라는 국토는 좁고 인구는 밀집되어 있어서 각종 편의시설에 접근성이 아주 뛰어난 나라이다. 도로망도 촘촘히 발달하여 벽오지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전국 어느 곳에서나 대학병원까지 1시간 이내에 갈 수 있다. 더구나 요즘은 KTX까지 등장해서 남도 끝자락에서 서울의 대학병원까지 당일치기 진료가 일상인 나라이다. 그러한 대한민국과 호주나 캐나다처럼 넓은 국토에 인구밀도가 낮은 국가의 인구당 의사 수를 단순 비교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인구 10만 명이 반경 10km 이내에 거주하는 곳의 의사 수를 반경 100km 이내에 거주하는 곳의 의사수와 같이 맞춰야 한다고 하면 과잉공급 가능성이 농후하다.

2022년 OECD 통계에 의하면 한국의 국민 1인당 의사 외래진료 횟수는 연간 14.7회로 OECD 평균 5.9회에 비할 바 없이 탁월한 1위를 기록하고 있다. 

혹자는 의사가 환자를 많이 보는 것이 진료의 질을 떨어뜨리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평균 수명·영유아 사망률·회피가능사망률 등 각국의 보건의료 수준을 비교하는 가장 중요한 통계에서 대한민국이 전 세계 최상이라는 것은 한국의 의사들은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자랑스러운 훌륭한 전문가들이라는 평가가 무리가 아니다.

눈앞에서 죽어가는 환자를 보고 최선을 다하지 않을 의사는 없다. 요지는 사망률 60∼70%를 넘는 위중한 환자의 치료결과만 놓고 의사의 과실을 따지기 시작하면 어느 의사라도 중환자를 회피할 수밖에 없다는 거다. 

최선의 진료를 다했음에도 결과가 나쁠 수 있으며 불가항력적인 악 결과도 적지 않다는 의료의 속성을 무시하고 숨이 붙어 병원에 들어온 사람이 죽어나갔으니 책임지라는 사회풍조 속에서 응급 중환자 진료에 선뜻 몸을 던질 의사는 극히 소수라는 건 지극히 당연하다.

의사는 어느 순간이든 최선을 다해 한 사람의 환자라도 살리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악 결과는 언제나 초래될 수 있다는 것을 사회가 폭넓게 인정하지 않고 민형사상의 책임을 물으면 중환자 진료를 회피할 수밖에 없다.

불가항력적인 악 결과까지 의료진에게 책임을 묻는 의료사고피해구제 및 의료분쟁 조정 등에 관한 법률은 응급 중환자 진료에 사명감으로 매진했던 많은 의사들을 떠나게 했다. 결과적으로 무죄 판결이 난 대학병원 신생아 사망사건에서 의료진을 구속수사하자 소아청소년과를 필두로 의료계엔 응급 중환자 진료 기피현상이 만연되었다.

의사가 환자의 진료를 거부할 수 없는 법 체계하에서 불가항력적 악 결과까지 민형사상 책임을 묻는 풍조가 만연된 작금의 상황에서 의사의 선택지에 필수의료는 없다. 이제 의사들은 필수진료 현장을 떠나고 있다. 상당히 오래전부터 그런 조짐은 있었으나 최근의 추세는 의사들이 보기에도 놀랄 정도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이 발표하는 통계 중에 '전문과목 미표시 전문의'라는 항목이 있다. 전문의 자격증을 소지하고 있지만 전문과를 표방하지 않고 일반의로 개원하는 전문의를 말한다. 이 전문과목 미표시 개원의사가 2004년 3,819명에서 2020년 5,987명으로 급증했다. 

혹독하고 때로는 인간의 한계를 시험한다는 전공의 과정을 마치고 전문의 자격증을 취득한 사람들이 전문과를 포기하고 일반과로 전환하는 숫자가 급증할 때 정부 정치권 언론 모두 돈만 좇는 의사들이라는 비난 말고는 근본적인 문제해결책에는 관심이 없었다.

요즘 소청과 의사 부족사태가 연일 이슈다. 소청과 선생님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한 아이 가정이 보편화하면서 과도한 요구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어느 겨울엔 병원 주차장에 차를 대놓고는 날이 추워 아이를 데리고 병원까지 못 올라가겠으니 내려와 진료해 달라는 요구를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민원을 넘어서 의료분쟁이 급증하고 있다고 한다. 중이염을 확인하려면 귀지를 제거해야 중이가 보이는데, 발버둥치는 아이 귀지 제거하다가 외이도가 긁혀 피가 났다고 3000만 원 배상을 요구하는 세상이다. 아이가 좋아서 또는 사명감으로 소청과 진료를 시작했지만, 이제는 자기 방어차원에서라도 소아 환자를 기피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원인들이 누적되어 급기야 2023년도 1년차 소청과 전공의는 모집 정원의 20%도 채우지 못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의사숫자만 늘리면 해결될 것처럼 여기저기서 의대 신설만 주장하고 있다. 

왜 의사가 현장을 떠나는지에 대해 관심을 집중해야 할 때다. 의사가 현장을 떠나는 것은 단순히 수가만의 문제가 아니라 불가항력적인 결과조차 민형사상의 책임을 묻는 법체계에서 본인을 보호하기 위함이 더 크다. 

2023년 소아청소년과 전공의 정원 199명 가운데 33명(16.6%)만 지원했다. 전국 2, 3차 전공의 수련병원은 최악의 인력 위기로 인해 진료체계 붕괴와 소아청소년과 진료 대란에 맞닥뜨린 상황이다. [그래픽=윤세호 기자] ⓒ의협신문
2023년 소아청소년과 전공의 정원 199명 가운데 33명(16.6%)만 지원했다. 전국 2, 3차 전공의 수련병원은 최악의 인력 위기로 인해 진료체계 붕괴와 소아청소년과 진료 대란에 맞닥뜨린 상황이다. [그래픽=윤세호 기자] ⓒ의협신문

2013년부터 2018년까지 6년 동안 영국에서 의사가 업무상 과실치사상죄로 기소되어 유죄 선고된 건수가 7건이었는데 한국은 670건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피할 수 없는 악 결과와 의도적 잘못을 구분하지 않고 영국 사법부가 무죄로 인정하는 '정직한 실수'에 죄를 묻기 시작하면 생사의 갈림길에 선 중환자를 진료할 의사는 없다. 

주수호 제35대 대한의사협회장 ⓒ의협신문
주수호 제35대 대한의사협회장 ⓒ의협신문

우리의 사법체계가 사람을 살리려고 끝까지 최선을 다했음에도 의료의 속성상 나쁜 결과가 초래된 의료행위에 대해 책임을 묻는다면 그 위험을 감당할 의사들은 점점 사라질 것이다. 시스템을 운영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피치 못할 결과에 대해서는 시스템적으로 해결해 야 한다. 그래야 계속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다. 

판결을 잘못했다고 판사에게 과실을 묻고 직접 배상하라고 하면 그 누가 판사를 하겠냐는 거다.

지금 한국에서는 의사가 현장을 떠나고 병원은 의사를 고용하지 않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왜 의사는 현장을 떠나고, 왜 병원은 의사를 고용하지 않는지, 이 두 가지를 모두 해결해야 필수의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단순히 OECD 평균에 비해 의사 수가 부족한 게 원인이라는 등, 수가를 조금 올려주면 될 거라는 등 전혀 근거가 없거나 지엽적이고 단편적인 해결책으로는 현재의 필수의료, 나아가 대한민국 의료의 붕괴는 막을 수 없다.

평생 진료현장에 한 번도 나서지 않은 책상머리에 앉아 보건의료정책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소위 보건의료정책 전문가들의 주장은 멀리해야 한다. 아직도 사명감으로 의료 현장을 지키고, 지키다 지쳐서 현장을 떠나는 의사들의 모습을 눈을 크게 뜨고, 그들의 말에 귀를 열고 듣는 게 문제 해결의 시작이라는 것을 인정해야만 대한민국 의료의 몰락을 막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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