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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취재]누가 합의를 파기했나
[기획취재]누가 합의를 파기했나
  • 이정환 기자 leejh91@kma.org
  • 승인 2004.02.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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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땅 잃는 의사들-조제위임제도의 빛과 그늘(4)

<글 싣는 순서>
1. 오래된 음모 - "약사는 의사다"
2. 의료영역이 무너진다
3. 벼랑 끝에 선 1차의료
4. 누가 합의를 파기했나?(의약정 합의 및 의발특위 중심)
5. 정책실패의 원인과 대안


'의·약동일' 기형 논의구조 파국 자초

실패 정책에 약속 남발

조제위임제도(의약분업)를 입안하고 추진하는 과정에서 이해 당사자 사이에 많은 약속이 오갔다.
합의 가운데는 일부 지켜진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파기되거나 무산되는 바람에 상호 불신만 부추기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조제위임제도 시행 4년째인 지금 이 제도는 실패한 정책의 표본으로 널리 회자되고 있다.
조제위임제도 실패 책임은 개혁이라는 미명 아래 잘못된 제도를 강행하고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남발한 당국에 있다는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별로 없다고 본다.

조제위임제도와 관련해 정책적 신뢰에 결정적인 먹칠을 한 것은 지난 1999년 5월 10일 '의약분업 실현을 위한 시민대책위원회'가 마련해서 의협과 약사회가 합의한 의약분업방안과 관련한 정부의 이해하기 어려운 태도였다.

의협과 약사회가 시민단체안에 서명할 당시만 하더라도 복지부는 "의약분업에 관한한 정부안과 시민단체안 모두 기본 취지는 동일하다"며 "양 단체가 합의서명을 이끌어낸데 대해 매우 고무적이며 바람직하다"는 입장을 보임으로써 정부와의 정책 공조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정부 말바꾸기 불신 확산

그러나 결과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정부는 시민단체안에 서명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말을 바꾸어 버렸다.
차흥봉 복지부장관은 1999년 6월 15일 김대중대통령에게 의약분업 실시에 따른 보고를 하면서 불과 한달전과는 사뭇 다른 입장을 보였다.

차 장관은 "시민단체 주관으로 의사 및 약사단체가 합의한 병원·종합병원의 외래 조제실 폐쇄, 의약분업 대상기관에 보건소·보건지소 포함, 의약분업 대상 의약품에 주사제 포함시킨 것 등은 정부안과 다르다"고 보고 했다.

이어 "현재 의약분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시민단체안은 의사와 약사단체의 이해 조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시행 여건 및 국민 불편에 대한 고려가 불충분하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그후 정부는 의약분업실행위원회를 운영하면서 시민단체와 합의한 사항조차도 무시한채 의약분업의 본질을 훼손시키는 정책을 밀어 부치는 바람에 의료계의 강력한 저항을 받기도 했다.

이를 계기로 의료계 내부에는 정부 정책을 믿을 수 없다는 기류가 폭넓게 확산됐다.

"임의조제 근절" 말 뿐

당초 의협이 많은 문제가 있는 줄 알면서도 5·10 시민단체안에 서명을 한 것은 추후 문제점을 보완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고, 정부도 합의내용을 지킬 것이라는 한가닥 믿음이 있어서 였다.

그러나 의료계의 그같은 예상은 크게 빗나가고 말았다.
정부의 합의 파기행위는 의·정 및 의·약·정 합의를 실천에 옮겨 나가는 과정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났다.
정부의 약속 가운데 특히 의약품 남·오용 근절대책과 관련한 정책은 신뢰를 떨어 뜨린 결정적 요인이 됐다.

조제위임제도 시행을 전후해 약사의 불법진료조제(임의조제)에 대한 의사들의 반발이 게세지자 정부는 의료계 달래기에 나섰다.

정부는 ▲약사의 임의조제를 금지하고 처벌하는 법규 및 각종 규제조치와 함께 임의조제시 행정처분하는 규정을 신설할 계획이다. (1999년 10월 4일· 의약분업 관련 의협 건의에 대한 복지부 회신) ▲의약분업 시행시 임의조제 감시단을 구성하여 철저히 감시한다. (2000년 4월 6일· 김재정 의쟁투위원장과 이종윤 복지부차관이 서명한 합의 내용)는 등의 약속을 쏟아 냈다.

보건복지부는 그것도 모자라 2000년 11월 14일 최선정 장관 명의로 된 공문을 의협으로 보내 임의조제를 막기위한 구체적인 방안까지 제시하기에 이르렀다.
임의조제를 근절하기 위해 전국 16개 시·도에 감시인력 100명을 배치하고, 7억여원의 예산을 들여'의약분업 특별감시단'을 본격적으로 가동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준비없는 조제위임제도

의·약·정 회의결과가 발표된 이후 임의조제 부분이 미흡하다는 의료계의 지적이 있어 그러한 조치를 취하게 된 것이라는 설명도 빼놓지 않았다.

그러나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조제위임제도 시행을 전후해 전문가들은 정부가 제시한 방안으로는 약사의 불법진료조제를 막기란 역부족이라는 점을 강조해 왔다.

불법진료조제를 막으려면 의약품 분류가 엄격하게 이루어져야 하고, 일반약과 한약을 통한 불법진료를 원천적으로 차단할 수 있는 기전이 완벽하게 갖추어져야 하는데 정부안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는 지적을 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근본대책을 마련하지 못한채 쫓기듯 조제위임제도를 도입했고, 의료계의 뜨거운 의권투쟁 열기를 잠재우기 위한 방편으로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한 것이다.
조제위임제도와 관련한 정책이 실패한 원인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가장 큰 오류는 '의'와 '약'을 동일선상에 올려 놓고 그 한가운데서 문제 해결을 위한 답을 얻으려 했던 점이 아닌가 싶다.

정부의 판단 잘못으로 조제위임제도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길이 막혀 버렸고, 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합의를 파기 할 수 밖에 없었던 측면도 있었다고 본다.
의료제도발전특별위원회(의발특위)의 구성과 운영 과정을 들여다 보면 그런 사실을 어느정도 감지 할 수 있다.

의약 동일선상 논의 오류

의발특위의 전신인 보건의료발전특별위원회(보발특위)는 의료계의 의권투쟁 와중에서 의협과 정부가 합의해 국무총리 산하 기구로 설치하게 된 것이다.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한 보발특위는 당초 의료의 범주에 당연히 약도 포함된다는 전제 아래 산하 의료정책위원회에서 의약분업에 관한 사항도 다룰 수 있게 했다.

그런데 보발특위를 대통령 직속으로 격상시키는 과정에서 엉뚱한 방향으로 상황이 꼬이고 말았다.
대한약사회가 보발특위가 의사 위주로 구성돼 있다며 약사제도를 위한 다른 위원회를 설치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2000년 10월 24일 의정합의가 이루어졌고, 이듬해인 2001년 12월 대통령 직속 '의료제도발전특별위원회'와 '약사제도 개선 및 보건산업발전특별위원회(약발특위)'가 출범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의발특위와 약발특위를 함께 운영하는 초기 단계에서부터 예상했던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약발특위에서 설정한 검토과제 가운데는 보건의료기술 분야나 의료서비스 해외진출문제,처방 가이드 라인 작성과 같이 당연히 의사가 관여해야 할 사항이 포함돼 있어 갈등을 빚을 수 밖에 없었다.

처음부터 의료문제의 중심에 '의'를 두지 않고 형평성과 공정성을 앞세워 '의'와 '약'을 같은 비중으로 다루려 했기 때문에 결국 이같은 기형적인 논의구조를 형성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실패인정 합리적 대안 모색

물론 정부는 의발특위와 약발특위를 운영하면서 쟁점이 되는 사항을 협의, 조정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운영협의회를 두기도 했지만 두 기구가 폐지될 때까지 단 한차례도 운영협의회가 가동되지 않았다.

이러한 예를 보더라도 의발특위와 약발특위와 같은 기구를 통해 의약분업 시행과정에서 첨예하게 대립된 의와 약 문제를 풀어보려고 한 발상 자체가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정 및 의약정 협의에 따른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의발특위 등에서 찾으려고 했으니 그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할 수 밖에 없다.

정부는 그동안 국민 뿐 아니라 의료계와의 합의를 수없이 많이 파기해 왔다.
합의는 지켜져야 한다.
그것이 국가가 한 약속이라면 더욱 그렇다.

만약 국가가 '아니면 말고'식의 약속을 남발한다면 정책적인 신뢰는 기대하기 어렵다.
합의를 하기전에 심사숙고를 해야 했고, 애초부터 지키지 못할 약속일 듯 싶으면 합의를 하지 말았어야 했다.
모든 것을 어쩔 수 없는 상황논리로 돌려 버리려는 무책임한 행태는 정부가 취할 태도가 아니다.

정부는 이제라도 정책적인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고통과 불편을 안겨준 국민에게 용서를 구하고,약속을 지키지 못한데 대해 의료계에 진솔하게 사과를 해야 한다.

그 바탕 위에서 실현 가능한 합리적인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
그래야만 정책적인 신뢰를 회복할 수 있고, 지난 잘못을 어느정도 용서받을 수 있다고 본다.

<기획취재 2팀>
편만섭기자 pyunms@kma.org
조명덕기자 mdcho@kma.org
송성철기자 songster@kma.org
이석영기자 dekard@km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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