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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의 삶과 디아스포라의 삶
의사의 삶과 디아스포라의 삶
  • 김연종 원장(경기 의정부·김연종내과의원) admin@doctorsnews.co.kr
  • 승인 2022.10.12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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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사시인회 10주년...마종기 시인 초청 간담회
김연종 원장
김연종 원장

"사람이 사람을 만나 서로 좋아하면 두 사람 사이 물길이 튼다"
- 마종기, '우화(禹話)의 강' 중에서

한글날 연휴가 시작되는 주말 오후, 하늘은 높고 가을은 무르익어 간다. 오전 진료를 마치고 서둘러 인사동으로 향한다. 원로 시인이자 선배 의사인 마종기 시인과 한국의사시인회 회원들이 만나기로 했다. '마종기 시인 초청 간담회' 번개모임 형식으로 이뤄진 조촐한 만남이다.

마종기 시인을 대표하는 수식어는 의사 시인이다. 생의 대부분을 의사로 살다가 의사로 은퇴했으니 당연한 결과이리라. 

또한 빠짐없이 등장하는 수식어는 디아스포라의 삶이다. 반백 년 이상을 미국이라는 낯선 곳에 살았으니 이 또한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시인은 은퇴 후 플로리다에 거주하며 꾸준히 시를 쓰고 작품을 발표하며 왕성한 문학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늘 그의 곁에 머물러 있는 정서는 귀소본능일지도 모른다.

디아스포라의 삶과 귀소본능 사이의 간극을 문학으로 채우려는 듯, 일 년에 한 번씩은 고국을 방문하고 지인들을 만난다. 그것은 문학에 대한 본능이고 고국에 대한 그리움이고 타지에서 느끼는 외로움이기도 하다. 그래서 더욱 모국어에 집착하고 한시도 손에서 시를 놓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첫 산문집 <별, 아직 끝나지 않은 기쁨>에서 "한 가지 소원이 있다면, 언젠가 내 자식들이 이 책의 한두 쪽이나마 읽을 수 있게 되고 이해하게 되어서 미국의 의사로서만 알아 온 아비의 삶의 궤적을 조금이라도 발견하고 생각해 주었으면 하는 것이다"라고 밝힌 바 있다.

그가 후일담을 들려주었다.

교회에서 한국어 반을 만들어 손수 한국어를 가르치기도 했던 그는, 영문으로 번역된 자신의 책을 슬그머니 아들에게 권하기도 했지만 아무리 한국어에 익숙해도 미국 정서에 길든 자식들이 시집을 읽을 리 만무하다고 씁쓸해했다. 

언젠가 그는 실용주의만 맹종하는 미국의 세태를 꼬집은 적도 있다. 

집에 가지고 있는 장서 중에서 시집이 대부분인 집의 자녀는 방랑자나 몽상가가 되기 쉽고 현실 적응력과 경쟁력이 떨어져 사회생활에 부적합하게 되기 쉽다는, '시를 읽지 마라'는 제목의 위싱턴 포스트의 기사였다.

의사이면서 시를 쓴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고민하는 후배들을 위한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근거 중심의 학문에 길들여진 의사들은 과학적 사고 보다는 상상력을 기반으로 하는 비유에 약할 수 있다. 좋은 시를 쓰는 의사시인들도 많지만, 평론가들에게 저평가받는 게 안타깝다는 개인적인 소회도 밝혔다. 결론이 있을 리 없지만, 그의 시집 <천사의 탄식> 표4글에서 조그만 단서를 찾아본다.

한국의사시인회는 10월 8일 오후 서울 인사동 옥정에서 의사시인회 창립 10주년을 기념해 '마종기 시인 초청 간담회'를 열었다. 마종기 시인(앞줄 가운데)과 의사시인회 회원들이 자리를 함께 했다.
한국의사시인회는 10월 8일 오후 서울 인사동 옥정에서 의사시인회 창립 10주년을 기념해 '마종기 시인 초청 간담회'를 열었다. 마종기 시인(앞줄 가운데)과 의사시인회 회원들이 자리를 함께 했다.

"의사였을 때는 보이는 것을 자세히 그리고 정확하게 보는 것이 중요했고 들리는 소리를 확실하고 분별 있게 듣는 것이 필수였다. 그런데 내가 시를 쓰는 이유는, 보이지 않는 것도 보고 싶어서이고 들리지 않는 소리도 듣고 싶어서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고 시도하지 않는 시인이라면 시인의 감수성이나 상상력이란 것이 어디에 무슨 소용이 있으랴."

그리고 몇 마디 당부한다. 좋은 시를 쓰겠다는 각오가 인생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단언컨대 좋은 시를 쓸 수 없다. 하루 중 머리가 맑은 시간은 많지 않다. 그때 시를 읽고 시를 써야 한다고.

'마종기 시인 초청 간담회'지만 그는 함께 밥 먹고 술 마시고 사진 찍으며 깔깔대는 오랜 친구 같았다. 하지만 그의 말과 표정에는 내내 숙연함이 깃들어 있었다.

"이별을 하면서 나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했었다. 싱겁게 서로 만나 반기는 것이 아니라 이별이 동반되어야 아름다운 사랑이 완성된다고 믿었다." 

그는 오래전에 떠난 동생을 그리워하며 애절한 심정을 밝힌 바 있었는데, 최근에 곁을 떠난 또 다른 누이동생을 그리는 시 '아침의 발견'을 낭송해 모두를 숙연케 했다.

그는 80대 중반의 노인이지만 몸은 여전히 꼿꼿하고 말에서는 기품이 느껴진다. 하지만 그의 얼굴 어딘가엔 진한 외로움이 배어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날이 갈수록 고국에 대한 향수는 더욱더 깊어지는 듯했다. 그가 태어난 고국도 생의 터전이었던 미국도 온전히 그를 품어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런 기분을 감지한 누군가가 홍지헌 시인의 '마중'을 낭송하며 분위기를 달랜다.

선배 시인께서/ 봄 맞으러 남쪽으로 떠나셨다/ 꽃 마중 가신 것인데/ 어찌 꽃만 맞으랴/ 꽃이 오면 꽃잎이 날려 오면/ 향기 담긴 바람도 오고/ 나무 위 새소리도 오고/ 문득, 눈물도 오고/ 아무도 전해주지 않던 사람의 안부도/ 함께 오겠지/ 그러다가 길 끝 멀리/ 어렴풋이, 천천히, 점점 또렷하게/ 시가 찾아오겠지/ 뜨거운 포옹을 하시겠지

누구는 가져온 시집에 사인 받고 누군가는 자신의 사인본 시집을 나누어 주고 또 누군가는 연신 술잔을 기울이며 마음의 물길을 튼다. 이런 날은 내게도 시 한 편 찾아오려나. 이렇게 뜨거운 포옹을 하면 시가 무르익으려나. 그렇게 우리는 다가오는 시를 마중하고 노시인을 환대하며 깊어 가는 가을밤을 배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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