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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2024-03-29 14:04 (금)
"저는 특혜(privilege)를 받았습니다"
"저는 특혜(privilege)를 받았습니다"
  • 황건 인하의대 교수(인하대병원 성형외과) admin@doctorsnews.co.kr
  • 승인 2022.02.02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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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의사협회 의료지원단 생활치료센터 근무를 마치며
황건 인하의대 교수(인하대병원 성형외과)
황건 인하대병원 성형외과 교수
황건 인하대병원 성형외과 교수

코로나19 환자를 진료하기 위해 대한의사협회에서 모집하는 '의료지원단'에 합류해 일한 지 23일이 됐다. 오늘 받은 항원검사가 음성으로 나오면 내일 드디어 퇴소한다. 

놀이공원과 수영장으로 한 때는 사람들로 붐비었을 이곳 리조트는 폐쇄된 채 생활치료센터로 쓰이게 되어, 콘도미니엄은 경증 환자의 수용시설로, 강당은 상황실로 이용되고 있다. 

바쁜 일과 중에 문득 창 밖을 내다보니 삼면이 침엽수로 쌓여 있어 이 추운 겨울에도 푸른 빛을 띠고 있지만 돌아가지 못하는 회전목마는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문득 이 리조트가 망망대해에 뜬 하나의 큰 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나는 이 곳에서 환자와 직원의 검체를 채취하고, 경증환자의 입소·퇴소 결정과 증상에 따른 치료나 전원 결정을 담당했다. 

입소할 때 찍은 흉부방사선 검사에서 활동성결핵이 의심되는 경우는 거점병원으로 전원시켰다. 처음 근무를 시작할 때 수십 명에 불과하던 환자가 차차 늘어나 최대 수용 인원인 200명이 거의 차고 있으며, 격리 기간의 단축으로 들고 나는 수가 매일 수십 명에 이르렀다.

큰 배가 항구에 닿을 때마다 사람들이 내리고 타듯이 환자들이 입소하고 퇴소하며 그들을 돌보는 근무자들도 자주 바뀌었지만, 그들의 업무는 전임자에게서 후임자에게 인계되며 더욱 효율적인 방향으로 개선되는 것을 보았다.

코로나19 바이러스라는 대홍수에 이 치료 센터는 '방주'의 역할을 한다는 것을 확연히 알게 됐다.

며칠 전 대선배 외과의사가 미국에서 '카카오톡'으로 노래를 하나 보내주셨다. 

개신교에서는 '내 주를 가까이 하려 함은'으로, 천주교에서는 '주여 임하소서'로 번역된 'Nearer, My God, to Thee'였다. 노래 3절에는 'There let the way appear Steps unto heaven'(그곳에서 하늘로 향하는 사다리가 나타나게 하소서)가 나왔다. 

창세기 28장에 나오는 내용으로 야곱이 꿈에서 보았던, 사다리가 하늘에 닿아 천사들이 오르내리며 천상과 지상을 왕래하던 그 사다리를 뜻했다. 

이 곡을 들으니 영화 '타이타닉'이 생각났다. 침몰해가는 배에서 두려워 떨고 있는 사람들 앞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침착하게 연주한 곡이 바로 이 곡이었다. 실제로 타이타닉호에 승선했던 그 악단장은 '왈레스 하틀리(Wallace Hartley)'라는 인물이라고 한다. 그가 연주를 끝내고 동료 연주가들에게 한 말이 잊히지 않는다. 

"Gentlemen, It has been a privilege playing with you tonight"(여러분, 오늘밤 그대들과 함께 연주할 수 있었던 것이 저에게는 특혜였습니다).

이 곳에서 나는 같이 일하는 공중보건의사들, H의료원에서 파견 나온 간호팀장과 간호사들에게 신세를 지고 많이 배웠다. 교수라는 직함이 일차진료현장에서는 오히려 거추장스럽기만 했다. 

나의 전산입력 속도가 젊은 의사들보다 느렸지만, 그들은 친절하게도 매뉴얼을 만들고, 내가 막힐 때마다 가르쳐주어 내가 업무를 수행하는데 도움을 줬다. 대신 나는 방호복을 입으러 달려가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우리의 아침 인사는 "아침 드셨어요?"이고 저녁 인사는 "저녁 꼭 드셔요"였다. 환자가 밀어닥치고 '입소방', '퇴소방', '의사방' 등의 카톡방에 빨간 문자가 뜨기 시작하면 바빠져서 식사를 미루다가 식당이 닫혀버리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입소 때 내가 가져온 온풍기와 가습기는 후임의사들이 사용하도록 인계했다. 앉아서 일하다 보면 무릎이 시리기 때문이다. 옆자리의 간호팀장과 간호사들에게는 주문해 배달 받은 무릎담요를 한 장씩 선물했다.

이제 나도 이 배에서 내릴 시간이 다가왔다. 내일 아침 카톡방에 올릴 글은 다음과 같다.

"여러분들과 함께 일할 수 있었던 것이 저에게는 특혜(privilege)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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