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말을 잃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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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0.12.20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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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건 인하의대 교수(인하대병원 성형외과)
황건 인하대병원 성형외과 교수
황건 인하대병원 성형외과 교수

얼굴뼈 골절을 치료할 때 위턱뼈와 아랫턱뼈는 입안으로 접근해 입술과 잇몸 사이로 절개를 가하고 뼈를 노출시켜야 하므로 시야 확보가 쉽지 않다. 수술을 돕는 제자가 당기개로 해당 부위를 벌려주지만, 나도 고개를 기울여 들여다보며 뼈막을 벗겨내고 나사못을 박아 고정해야 하므로 긴 수술 뒤에는 목과 어깨가 뻐근하고 파스를 붙일 정도로 아프기도 한다.

그저께는 야구공에 볼을 맞아 위턱뼈가 여러 조각으로 골절된 환자를 수술했다. 큰 조각 한두 개만 고정하려 계획하고 수술실에 들어갔는데, 나머지 조각들도 불안정해 결국 티타늄판을 세 개나 사용해 고정했다.

골절부위가 넓어 학생시절 야구동아리에서 활약해 팔뚝이 굵은 제자도 수술 시간이 길어짐에 따라당기는 힘이 점점 약해졌다. 제자들에게 힘내어 당겨 달라는 주문을 여러 차례 반복하고 독려해 겨우 수술을 끝냈다.

어제 아침 일어나려는데 오른쪽 목덜미 근육이 뭉쳐 목을 돌리기가 거북했다. 그런 수고 덕인지 환자의 수술 후 방사선 촬영을 확인하니 다행히 티타늄판들이 뼈조각들을 잘 잡고 있었다.
 
오늘 아침 회진하며 보니 환자의 볼은 붓기가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뒤돌아 나오려는데 환자가 "잠깐만요" 하며 약간 구겨진 누런 색의 종이를 내밀었다. "제 딸이 선생님께 드리라고 주었어요."

네 모서리가 색 바랜 금박으로 둘러진 그 종이는 '칭찬상장'이었다.

의사선생님께.

위 의사선생님은 힘든 상황에 수술로 저희 아버지의 얼굴뼈를 고쳐주셨기에 의사선생님께 이 칭찬상장을 전합니다.

2020년 12월 15일 미송초등학교 2학년 2반 김루비 드림.

그 상장을 받고 나는 나를 시인으로 추천한 조오현 시인의 시 '나는 말을 잃어버렸다'가 생각났다.

내 나이 일흔둘에 반은 빈집뿐인 산마을을 지날 때/늙은 중님, 하고 부르는 소리에 걸음을 멈추었더니/예닐곱 아이가 감자 한 알 쥐여주고 꾸벅,/절을 하고 돌아갔다/나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그 산마을을 벗어나서/내가 왜 이렇게 오래 사나 했더니/그 아이에게 감자 한 알 받을 일이 남아서였다/오늘은 그 생각 속으로 무작정 걷고 있다

나도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겨우 "고맙다고 전해주세요" 하고 병실을 나왔다.

그 상장을 액자에 넣어 재작년에 대통령에게 받은 '훈장증' 옆에 걸었더니 벽에 완벽한 균형이 잡혀 보였다.

내가 정년이 2년밖에 안 남았는데도 왜 힘든 수술을 계속하나 했더니 그 소녀에게 상장 받을 일이 남아서였다.

오늘도 그 생각을 하며 수술실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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