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을 위한 바른 소리, 의료를 위한 곧은 소리
updated. 2024-03-28 17:29 (목)
"왜 당신들이 사과해야 하는가"
"왜 당신들이 사과해야 하는가"
  • 여한솔 전공의 (이대목동병원 응급의학과 R2) admin@doctorsnews.co.kr
  • 승인 2020.10.26 11:52
  • 댓글 10
  • 페이스북
  • 트위터
  • 네이버밴드
  • 카카오톡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잘못된 의료정책 바로잡기 위해 '순수한 열정' 불태운 후배들에게 죄송

지난 2020년 여름 뜨거웠던 의료계의, 아니 젊은 의사들의 단체행동 결과는 참혹하기 그지없다. 혹자는 의료계가 제일 처음 주장했던 '공공 의대 설립'과 '의대 정원확충'을 이 파업을 통해 막았다고 할지 모르겠으나, 우리에게 남은 상처는 너무나 크기 그지없다. 이렇게 해서 막았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젊은 의사는 파업의 대오에 함께 하지 못한 선배 의사를 더 이상 신뢰하지 않는다. 의대생은 젊은 의사들과 선배 의사들에게 배신당한다. 전공의는 파업을 강행하자는 의견과 파업을 중단해야 한다는 의견으로 서로 양분되어 대립한다.

파업이 종료되고 불과 며칠이 지나지 않아 여당의 의료계를 향한 거침없는 막말이 쏟아졌고 약속이나 한 듯  국회에서는 몰상식한 법안들이 발의되고 언론은 수년간 묵혀왔던 의료계 내부의 부끄러운 일들을 펼쳐내기에 급급하다. '코로나 종식'을 위한 그 어떤 치료제도 나오지 않았고 백신이 나오기까진 마냥 국민들은 불안에 허덕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확진자가 100명 이하로 며칠간 줄었다고 해서 사회적 거리 두기 단계는 1단계로 하향 조정되었고 산책 가와 길거리 식당, 술집은 인산인해를 이룬다.

8월 19일 기준 하루에도 전 세계 34만 명이 감염 확진 판정을 받고 5200명이 죽어 나가는 현실을 언론은 의도적으로 축소하기에 바쁘고 당국은 코로나를 막아내고 있다는 자만심에 빠져 있다. 실제 의료 현장은 아직도 열나는 환자로 가득 차 혹시나 코로나감염은 아닐지 노심초사하며 Level D 방역복을 입는 아수라장인데 말이다.

그 와중에 의대생들이 어쩔 수 없이 국시 거부를 철회하고 다시 시험에 응시하고자 하였으나 매몰차게 정부에 거절당했다. 보건의료 정책관은 '국민의 건강을 책임져야 할 의사가 되고자 하는 예비 의사들이 과연 기준과 판단에 따라서 행동할 수 있을 것인가, 또 국민이 양해할 것이냐, 이런 기준을 가지고 종합적으로 판단할 사항이다.'며 사실상 국시 거부한 본과 4학년 학생들의 국시 응시 기회를 주지 않았다.

왜 당신들이 사과해야 하는가. 잘못된 의료정책을 바로잡기 위한 순수한 열정 하나로 불구덩이인 줄 알면서도 뛰어들었던 후배들이 왜 사과해야 하는가. 이 파업을 감정적으로 출구전략 없이 시작했던 자들, 그리고 이 파업이 허무하게 끝나버리게 했던 의료계의 위정자들이 후배 의사들 앞에서 엎드려 읍소해야 하지 않는가.

왜 힘없는 우리 후배들이 '죄인' 취급 받고 국민에게 사과해야 하는가. 파업 기간 동안 수많은 전공의 회의들에서 내가 되뇌었던 것은 '파업 철회의 가장 우선 전제조건은 의대 정원 확대철회, 공공 의대 설립취소가 아닌, 처벌받을 소지 있는 전공의들의 면책과 국시 거부에 동참하고 동맹휴학을 결성했던 의대생들의 보호'였다. 결국 우리 전체 회원을 보호해 주지 못하여 사분오열된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왜 후배들이 부끄러운 선배들 앞에서 뭘 잘못했다고 고개 숙이고 있어야 하는가.

국민들은 괘씸죄를 적용해 의대생들의 국시 재응시 기회를 주지 말아야 한다고 한다. 여당과 정부는 지지율 눈치를 봐가며 좀처럼 국시 응시 기회를 주지 않을 것 같다. 만에 이 결정이 바뀌지 않는다면,  2021년은 약 2000여 명의 의사가 덜 배출 될 것이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 필수 의료의 붕괴는 내가 5년 전 예견했던 것보다 더 빨라질 것 같다.

단순히 2000명의 의사가 부족해서가 아니다.

당장 올해 시험을 치르는 후배 의사들은 대부분 필수의료과가 아닌 마이너 과에 지원할 가능성이 높다. (올해 국시에 접수했던 후배들을 비난하지 말아 달라.) 아니, 그렇게 마이너 과에 지원하길 개인적으로 부탁한다. 2021년도 인턴전형에서 당장 빅5 대학병원들은 어찌 맞출 수 있겠으나, 서울·경기 중형 병원, 지방 병원은 그야말로 인턴지원율이 턱없이 낮은 결과가 초래될 것이다.

그것뿐일까. 그 다음년도인 2022년도 레지던트 모집에는 필수의료와 연관된 과의 지원율은 제로에 수렴할 것이다. 다음연도에 TO를 당장 늘리기도 어려울 것이고, 한 연차가 비어있는 필수에 2023년도 필수의료과에 지원하는 비율 역시 줄어들 것이다.

레지던트가 없이는 정상적인 병원 운영이 불가능한 병원들은 모든 꼼수를 부릴 것이고 이는 결국 의사면허인력이 아닌 간호 면허인력이 들어와 환자들을 진료하고 처방 내는 파국을 맞이할 것이다.  사실 이미 그 파국은 모든 병원에서 시작되었다. 보건복지부가 알고도 묵인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 대한민국 의료 무너짐의 기울기는 끝없이 가파를 것이다.

회복할 기회가 분명히 있었다. 정부, 의사, 국민 모두 상생할 기회가 분명히 있었다. 나는 정부가 이 모든 판을 엎어버렸다고 생각하고,  이제는 잠들 때마다  차라리 그냥 우리나라의 모든 의료체계가 망해버리라고 기도한다. 거스를 수 없는 파국의 흐름을 이 못난 정치권이 어떻게 망가뜨리는지 뒤에서 똑똑히 지켜볼 것이다.

그런데, 우리 후배들에게 사과하라니…. 왜 당신들이 사과해야 하는가. 사과해야 할 사람은 후배들이 아니라 나를 포함한 선배 의사들이다.

이 글을 빌어 국시 응시를 거부했던, 우리만 믿고 따라주었던 전국의  모든 의대생 후배들께 고개 숙이고 사과한다.

'입이 열 개여도 할 말이 없습니다. 후배들이 배운 대로 행하지 못하는, 사명감으로 환자들을 대하지 못하는 이런 거지 같은 의료 환경을 만들어주어 너무나 죄송합니다.'

■ 칼럼이나 기고 내용은 <의협신문>의 편집 방침과 같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