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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2024-03-28 17:57 (목)
펑펑 울면서 썼던 그 날의 질의서
펑펑 울면서 썼던 그 날의 질의서
  • 김현지 서울대병원 권역응급의료센터 내과 진료교수 admin@doctorsnews.co.kr
  • 승인 2020.08.10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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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신형록 전공의의 과로사

한창 추웠던 2019년 2월 1일 아침에, 인천 가천대길병원에서 일하던 소아청소년과 신형록 전공의(31)가 당직실 침대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설 연휴 전날이었다.
  
사건이 보도된 그 날부터 정말 참담한 마음으로 아득바득 자료를 모았다. 유족을 소개 받아 만났다. 고인에 대해 듣고, 당직표 등 근무기록과 관련된 자료를 모았다. '전공의법'에 따라 전공의는 주 평균 80시간을 초과하여 근무할 수 없으나 예상대로 고인은 80시간을 훌쩍 넘겨 110시간 이상을 근무하고 있었다. 이게 가능했던 이유는 병원에 제출하는 88시간짜리 '공식 당직표'와 110시간짜리 실제 당직표'가 따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건이 터지고 나서야 복지부는 뒤늦게 현지조사를 나갔으며, 길병원 측의 '전공의법' 위반을 적발했다. 
  
당시 여론의 화살은 살인적인 근무를 시켰던 길병원을 향했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이 청년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면 병원뿐만 아니라 복지부도 자유로울 수 없다. 각 수련병원이 '전공의법'을 준수하는 지 관리·감독하는 의무는 복지부에 있다. 복지부는 故신형록 전공의가 사망하기 6개월 전 길병원 소아청소년과를 대상으로 수련환경평가를 시행했지만 수련규칙 위반 여부를 적발하지 못했다. 

내가 대한전공의협의회 부회장으로서 복지부 산하 수련환경평가위원회 위원으로 직접 일했기에 왜 복지부가 적발하지 못했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길병원에서 '전공의법 수련규칙을 이행했다.'는 사실 여부만 제출받고 전공의 당직표 등 근거 자료를 제출받거나 확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꼴이다. 실제로 국정감사를 앞두고 복지부에 2018년도 수련환경평가당시 제출받은 당직표 등 근거 자료의 자료제출을 요구했으나 복지부는 하나도 제출하지 못했다. 제출받은 적이 없었으니까. 복지부가 병원 측의 진술만을 믿고 당직표 등 근거자료를 확인하지 않은 것은 명백한 직무유기다. 
  
뻔히 알고 있었지만 내 눈으로 다시 확인하면서 절망스러웠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했다. 누구나 신형록이 될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나도 주 110시간 이상 일했고 48시간 이상 연속으로 일했으며 임신했던 내 동기는 만삭의 몸으로 밤샘 당직을 섰다. 누구나 과로로 목숨을 잃을 수 있다. 우리는 그저 운이 좋아 살아남은 생존자다.  
  
2019년 8월 근로복지공단은 고인의 사인을 과로로 인한 업무상 질병으로 인정했고 사건은 일단락되었지만, 작년 국정감사에서 굳이 아픈 상처를 다시 끄집어냈다. 이대로 묻히면 안 된다. 나는 이 사건이 영구 기록되길 원했다. 만약에라도 유사한 사건이 또 터진다면, 이미 2019년에 정부가 잘못을 시인했으며 대책 마련을 약속했다는 것을 국정감사 회의록에 남겨야 했다. 이 문제를 두고 누군가는 싸웠음을 기억해주길 바랐다. 결과적으로 2019년 10월 2일 보건복지위원회 국정감사 장에서 복지부 장관은 당시 수련환경평가가 미흡했음을 직접 인정했다. (국회희의록 20대 371회 국정감사 보건복지위원회 74쪽) 원래는 유족들을 직접 참고인으로 초청하여 고인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려 했지만 긴 고민 끝에 포기했다. 울림은 더 컸겠으나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식 잃은 부모님 속을 헤집는 건 너무 잔인한 일이었다. 차마 할 수 없었다. 
  
국정감사 전 날, 불 꺼진 의원실에 혼자 남아서 해당 질의서를 작성하며 많이 울었다. 길병원이 당직표가 허위로 작성된 것을 인정한다고 한들, 복지부 장관이 사과한들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오진 않는다. 그 날의 질의서는 선배의사로서, 대전협 전 부회장으로서 스스로 마음의 짐을 덜자고 준비한 의미가 컸다. 그 사건 이후로 마음의 빚이 있었다. 잠자듯 떠난 그 후배님에게. 대전협 부회장이 되고, '전공의법' 시행규칙과 계약서를 만드는 과정에 직접 참여했고, 실제로 정말 열심히 했으며, 결과물도 썩 나쁘지 않다고 자부했지만 그 후배님을 살리기에는 아직 한참 부족했다는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앞으로 제 2, 3의 신형록이 나오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여전히 많은 병원에서 '전공의법'에 따른 주 최대 80시간은 당직표에만 존재하는 유니콘이다. 대한민국의 전공의들이 주 80시간'만' 일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다시 한 번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항상 잊지 않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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