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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2024-03-19 13:14 (화)
모든 것을 포기하기엔 아직 이르다
모든 것을 포기하기엔 아직 이르다
  • 여한솔 전공의 (이대목동병원 응급의학과 R2) admin@doctorsnews.co.kr
  • 승인 2020.07.26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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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한솔 전공의 (이대목동병원 응급의학과 R2)

경부고속도로 연쇄 8중 추돌사건

지금도 흔하게 일어날 수 있는 사고이지만, 지난 2017년 광역버스 한 대가 버스 전용차선이 아닌 2차로로 달리다 앞서가던 승용차를 들이받으면서 차량 8대가 추돌 했던 사건이 있었다. 이 사고로 버스 바로 앞 승용차에 타고 있던 50대 부부가 그 자리에서 즉사하였고, 버스승객 포함 10여명이 병원에서 치료 중에 있다.

버스운전기사는 경찰 조사 중 "쿵 소리가 나서 깨어보니 사고가 났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 가정의 부모가 생을 마무리하기엔 너무나도 갑작스레 벌어진 일이다. 한없이 안타까운 일이다.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은 유가족들에게 심심한 조의를 표한다.
 
버스기사의 졸음운전으로 야기된 사고

아직 경찰조사가 끝나지 않았기에 위 사고와 관련된 모든 사항들은 성급하게 판단할 순 없지만, 변명의 여지없이 버스 운전기사의 졸음운전으로 인한 사고는 확실하다. 졸음이 오면 운전대에서 손을 떼어 잠시 휴식을 취하든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운전대를 맡겼어야 하는 것이 맞다. 이것은 상식이고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필자는 이 글에서 이 사건에 연루된 운전기사의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과연, 모든 것이 이 버스기사 한명의 문제로 야기된 사건일까? 필자는 개인의 잘못도 있지만, 이번에는 사회 시스템의 잘못도 있다고 생각하기에 아래의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한다.
 
대한민국 근로기준법 강제조항 정말 강제조항인가?

근로기준법 제 50조에서는 1주간의 근로시간은 휴게시간을 제외하고 40시간을 초과할 수 없다고 규정했다. 여기에 하루에 최대 12시간까지 12시간 한도로 연장 근무할 수 있는 규정 또한 마련되어 있다. 이는 근로기준법에 명시된 강제조항이다.

하지만 같은 근로기준법 제59조에는 노사간 합의를 전제로 한다는 내용이 있지만 공중 편의를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휴게 시간을 변경하거나 무한정 근로를 연장할 수 있도록 근로 시간 및 휴게 시간 특례를 인정하고 있다. 간략하게 나열하면, 운수업·물품 판매 및 보관업·금융보험업·영화제작 흥행업·통신업·연구조사 사업·광고업·의료 및 위생 사업·접객업·소각 및 청소업·이용업 그밖에 공중의 편의 또는 업무의 특성상 대통령령으로 정한 총 26개 업종이 이에 해당한다.

정부 자료에 의하면 2014년 기준으로 5인 이상 사용 근로자 1000만명 중 약 400만명 정도가 특례 업종에 소속돼 있다고 보고되고 있다. 강제조항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로 400만 명의 근로자들은 법의 울타리 안에서 보호받지 못하고 근로기준시간을 넘어서 근무하고 있는 실정이다.

노사 간의 서면합의 전제하라는 말은 우리나라의 현실과 너무 맞지 않아 보인다. 위 버스 사고와 관련해서 버스기사노조에서 언급한 인터뷰를 보자면, '근무환경의 개선'을 첫 번째로 꼬집는다. (물론 노동조합이 주장하는 이야기들이 항상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 사고를 개인의 관점이 아니라 시스템의 관점에서 바라보고자 함이니 오해는 없길 바란다.)

많은 기사들이 충분한 쉼 없이 피곤한 상태로 운전을 하고 있는 것도 높은 노동 강도에 의한 불가피한 사고로 이어진다는 것을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된다. 개인의 잘못이라고 보기엔 해마다 이런 대형사고가 끊임없이 재발하는 것이 이를 반증한다.
 
의료업 역시 예외는 아니다

더 힘든 일을 하고 있는 업종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내 눈에 띄는 예외 직종이 있다. 의료업. 조만간 병원에서 짧게는 4년, 길게는 6년 이상 수련과정을 밟아야 할 나의 일이기도 하거니와, 학교 다닐 때부터 매번 고민했던 전공의들의 수련시간을 연관시켜 이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실제 병원 전공의들을 대상으로 전공의(인턴∼4년차)의 주 평균 근무시간은 가장 낮은 곳이 72시간에서 가장 많은 곳이 105시간으로 조사됐다. 연차별로 조사된 자료는 없었지만, 주변 동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아도 낮은 연차의 전공의들은 최소 100시간 이상 최대 120시간까지 근무를 하고 있다.

일주일 중 하루를 꼬박 쉴 수 있는 주는 손에 꼽을 정도이며 휴일 없이 근무를 한다 해도 일 평균 최소 14시간에서 최대 17시간의 노동을 담당하고 있다. 의사들은 한숨을 쉬거나 혹은 힘없이 고개를 숙이며 인정하겠지만 일반 사람들은 '에이 설마 그럴 리가?' 라고 물을 수 있다. 안타깝지만 전공의 특별법이 발효된 이후에도 크게 바뀌지 않는 엄연한 '현실'이다.

이 때문에 생기는 불가피한 의료사고들이 우리나라에도 예외 없이 발생하곤 한다. 역시나 이런 사고들을 개인의 잘못으로부터 원인을 찾으려고만 급급했지, 시스템의 문제를 지적하는 사람들은 현장에서 일하는 의료인들 밖에 없었다. 그 외침은 너무도 미약하여 항상 대중으로부터 묻히고 말았다. 하지만 문제를 직시하고 시스템을 전면적으로 개혁하여 많은 문제점들을 예방할 수 있었던 사례가 있어 이를 소개하고자 한다.
 
미국의 좋은 사례

1984년 미국에 고열과 오한의 증세로 응급실을 찾은 한 대학생은 의료진으로부터 병용 처방 금기약물을 처방 받아 사망했다. 18시간 이상 근무하던 인턴이 약을 잘못 처방했기 때문이었다. 이 대학생의 죽음을 계기로 사회단체와 의료계, 그리고 법조계가 많은 논의를 통해 2003년 미국에서는 전공의의 근무시간을 주 80시간으로 제한하고 24시간 이상 연속 근무를 금지하는 법안이 발효되었다.

어느 한 인턴의 개인적인 실수로 단정 짓고 이 문제를 덮고 넘어갈 수도 있었겠지만, 미국사회는 잘못된 시스템의 문제를 회피하지 않았다. 전공의들의 과도한 업무량으로 인한 국민의 생명권이 위협받았다고 미국사회는 단순히 그 인턴에게 징계를 내려 무마시키지 않았다.

반드시 고쳐져야 했을 의료계의 낡은 시스템의 틀을 개혁함으로서, 경제적, 정치적 잣대로 국민들의 생명을 위험으로 빠뜨리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보여준 것이라고 나는 평가하고 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더 소중한 것은 '생명'임을 미국사회가 놓치지 않은 것이다.
 
시스템의 개혁이란?

필자는 '단순히 전공의들의 근무시간을 줄이면 모든 문제가 해결 될 것이다'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응급환자나 중증환자를 돌보는 곳은 대형병원이 맡고, 만성질환 혹은 경증환자들에게는 의원과 소규모의 의료기관이 포괄적인 서비스를 제공하게끔 국민들을 설득하고 유도하는 정부의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관행적으로 운영되는 시스템을 한꺼번에 모두 바꾸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하나하나씩 차근차근 점진적으로 잘못된 문제점들을 바꿔나가야 할 끈기가 필요하다. 그 첫 단추가 전공의들의 근무시간 단축이라고 생각한다. 1984년 미국의 아픈 사례처럼 억울하게 고통당하는 국민이 생겨나지 않도록 의료계와 정부 그리고 국민 모두가 관심 갖고 바꾸어야 할 중요한 문제이다.
 
결론

새로이 개정된 운전면허실기시험을 시행한 2016년 12월부터 지난 6개월간 운전면허를 취득한 초보운전자의 교통사고 건수가 전년 같은 기간에 비해 37.8%나 감소했다고 경찰청이  밝혔다. 2011년 운전면허 시험 간소화 이전과 그 후를 비교 했을 때에 사고건수가 30%이상 증가한 것을 보더라도, 운전면허 시험을 강화시키는 것이 수많은 국민들의 안전을 위해 바람직한 것으로 볼수 있는 좋은 사례이다.

버스기사님들의 이야기를 듣고 근무 환경을 개선시키는 것은 앞서 말한 예처럼 버스 기사님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기사님들은 물론, 그 버스에 탑승한 승객들과 도로 위를 함께 누비는 국민들의 안전을 빼고는 이 이야기를 시작 할 수 없고 또 그래서도 안 된다. 의료계가 직면하는 위의 문제 또한 하등 다를 것이 없다.

의사와 환자의 관계가 많이 악화되어 있는 것이 대한민국의 현 주소이다. 하지만 우리끼리 싸워선 안된다. 국민건강을 우선하지 않고 경제논리에 좌지우지되는 정부의 정책들에 반(反)하는 것이지, 결국 시간이 거듭할수록 의사는 국민들의 건강을 최우선으로 지켜야 하는 사람들인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위에 언급한 문제점들에 대해서 함께 머리를 싸매고 같이 고민하고 토론하는 시간들이 쌓여 의사와 국민 모두가 승리할 수 있는 돌파구를 하나씩 찾아나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한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포기하지 말자.

'모든 것을 포기하기엔 아직 이르다.'

■ 칼럼이나 기고 내용은 <의협신문>의 편집 방침과 같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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