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모이'와 우리말을 사랑했던 해부학자 고 정인혁
'말모이'와 우리말을 사랑했던 해부학자 고 정인혁
  • 황건 인하의대 교수(인하대병원 성형외과) admin@doctorsnews.co.kr
  • 승인 2020.01.07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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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정인혁 연세대 명예교수를 추억하며…
황건 인하의대 교수(인하대병원 성형외과)
황건 인하의대 교수(인하대병원 성형외과)

영화 팬인 필자가 2019년에 본 영화 중 가장 인상깊었던 영화는 '말모이'였다. 관람 전에 막연히 '어휘를 모아 놓는 목록'으로만 생각했으나, 관람 후에는 '1910년대 조선광문회에서 주시경 선생등 언어학자들이 참여해 편찬했으나 출판하지 못했고, 이후 조선어 사전의 밑바탕이 된 최초의 우리말사전 원고'라는 것을 알게 됐다.

영화를 보고 집에 돌아오면서 우리말을 사랑해 우리말 의학용어를 다듬는 일에 평생을 바친 한 해부학자와의 인연이 생각났다.

1976년 의과대학에 입학한 필자는 6년간 의과대학 과정의 대부분을 영어로 쓰여진 두꺼운 책으로 교육받았다. 이후 군복무와 전공의수련을 마치고 전문의가 되어 대학병원에 근무하기 시작해 환자들에게 진단서를 발급하려하니, 우리말 의학용어가 필요했으나 찾아볼 의학용어집이 별로 없었다. 한글로 쓰여진 성형외과 교과서들도 병명이나 수술방법에 대해 서로 다른 용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대한의사협회에서 의학용어집 제3집을 냈다는 소식을 듣고 구입했으나, 12만개의 용어 중에 성형외과용어는 약 180개에 불과했으며, 일관성이 없어 진단서 발급 등 사용에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다. 답답한 마음에 대한성형외과학회 학술대회에서 '성형외과학 용어 정리작업의 필요성'이라는 연제를 발표하게 됐고, 그 인연으로 1997년부터는 대한의사협회 의학용어실무위원으로 활동하게 됐다.

그 때의 위원장이 바로 그 해부학자였다. 그는 외국에서 수입된 학문을 배울지라도 교육만큼은 우리말로 해야 한다는 지론에 따라 우리말 의학 용어로 강의를 함으로써 우리말 사랑을 실천하고 있었다. 이전에 나온 해부학 교과서들의 명칭은 모두 '인체해부학' 이었으나, 그가 써낸 교과서의 이름은 <사람해부학>이었다.

해부학용어집을 만들고 남북한용어를 비교했던 그는 의학용어를 다듬는 데에 소신과 원칙이 있었다. 19세기 유럽에서 혼란스러웠던 해부학용어를 다듬은 원칙을 우리말 용어에도 적용하려 애썼다. 즉, '이름이 붙는 각 구조에는 하나의 용어만 쓴다', '우리말로 표기하고 언어학적으로 맞아야 한다', '이름은 기억하기 좋은 낌새를 주어야 하고, 설명이나 추론적인 해석이 주장돼서는 안된다', '관련 있는 용어는 될 수 있는 대로 비슷해야 한다' 등의 내용이었다.

그가 위원장으로 2001년 출간한 대한의사협회의 <의학용어집> 넷째 판은 일본식 용어 일색이었던 의학 용어를 상당 부분 우리말로 바꾼 우리말 사랑의 실천적 증거로 의학계를 비롯 각계의 주목을 받았으며, 이후 <필수의학용어집> <의학용어집> 제5판, 제6판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는 '심상성 좌창'을 '보통 여드름'으로 바꾸었으며, 슬관절은 무릎관절로, 비경(鼻鏡)·이경(耳鏡) 대신 코보개·귀보개라는 용어를 사용토록 권장했다. '상안검거근'을 '눈꺼풀올림근'으로, '안검거상술'을 '눈꺼풀당김술'로 바꾸어 호응을 받았다.

그 해부학자가 새해 1월 4일에 세상을 떠났다. 평생을 시신을 해부하며 연구하고 학생들을 교육하던 터이라 그런지 암 선고를 받고 투병중에도 죽음에 대해 매우 의연했다. 돌아가시기 약 6개월전에 해부학의 이모저모를 많은 사례와 흥미로운 해석으로 풀이한 <해부학을 통해 본 사회모습>이라는 수필집을 펴냈다. 집안에 선친의 뼈대를 보존한 해부학자의 이야기와 그동안 연세의대 해부학교실에 시신을 기증한 분들의 사연들을 접하다보면, 해부학 교수가 시신기증자들에 대해 갖는 경외와 감사의 마음이 물씬 느껴진다.

생전에 마지막으로 뵈었을 때 물었다.

"영정사진 옆에 어떤 책들을 놓을까요?"

그가 대답했다.

"그런 것 놓지 마세요."

2004년 그가 '외솔상'을 받을 때 시상식에 참석했던 기억이 난다. 수상 소감이 매우 짧았다.

"제 나라에서 제 말글을 열심히 썼다고 해서 상 주는 일이 다시는 없는 밝은 사회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환자와 의사가 소통할 수 있는 우리말 의학용어를 위해 평생을 애쓰던 그가 저 세상에서는 평화롭게 안식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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