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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2024-03-28 17:57 (목)
'술 권하는 사회'
'술 권하는 사회'
  • 여한솔 전공의 (이대목동병원 응급의학과 R1) admin@doctorsnews.co.kr
  • 승인 2019.11.17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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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주권을 침탈받은 일제 침략 시절의 지식 청년의 사회 부적응 이야기를 그려낸 '술 권하는 사회' 소설을 고등학교 때 감명 깊게 읽었던 적이 있다.

근무가 끝나고 단잠을 잔 뒤 십수 년이 흘러 다시 이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 보았다. 그 당시 시절을 되살리며 읽었던 이 소설은 여전히 그의 문체에 매료되어 '술술' 읽혔지만, 읽고 난 뒤의 느낌은 고등학교 때와 사뭇 달랐다. 현진건 작가가 그려내고자 했던 갈등의 시대와는 또 다른 씁쓸함을 낳게 했다. 그놈의 '술' 때문에 겪는 응급 의료 현장 때문일 테다.

우리나라 알코올 사용 장애 유병률은 수년 전 기록으로만 보더라도 WHO 평균을 기준으로 남성의 경우는 6.76%에 다다른다.  음주는 각종 질병 외 교통사고, 폭력, 자살 혹은 타살 등의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된다. 살인·강도·강간 등 강력범죄 중 주취 상태에서 발생한 비율은 30%를 넘어서기까지 했다. 알코올 소비량이 지속해서 늘어나기는 추세라고 가정할 때, 아니, 우리 동네에 있는 술집에 사람들이 더욱 바글대는 것만 보더라도 음주로 인해 발생하는 사회적 비용은 앞으로 더더욱 증가할 것으로 추측한다.

실제로 한 논문에 의하면 응급실 손상 환자 중 술에 취한 경우는 17%에 육박하는데, 응급실 환자 사고 중 1명은 술에 취한 상태에서 사고를 당해 응급실을 찾는 셈이다. 문제는 이렇게 술에 취한 상태로 응급실을 찾게 되면 술을 마시지 않은 환자보다 체류 시간이 27% 더  길어지며, 이는 결과적으로 다른 응급환자들이 치료받을 기회가 줄어듦을 간접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지표가 된다고 한다.

밤낮 가릴 것 없이 주취 상태로 발생한 사고들로 전국 대부분의 응급실은 항상 시끄럽다. 특히 법적 보호자 없이 주취 상태로 응급실을 들어오는 환자들은 그날 있었던 어떤 스트레스보다도 더 나를 괴롭힌다. 무엇보다도 환자의 정확한 병력 청취가 되지 않아 상태를 파악하기 어렵고 적절한 치료를 시행하기 위한 검사를 권하여도 협조가 되지 않아 애를 먹는다.

응급실은 '응급의료'를 행하기 위해 세워진 공간인데, 응급실을 찾은 다른 환자들을 잠시 제쳐두고 주취 상태의 환자 혹은 보호자와  이런 실랑이를 벌이면서까지 내가 다투어야 하는지, 그래서 '음주 상태'를 응급하다고 간주해야 하는 것인지 의문이 들 때가 있다.

주취자가 들어오게 되면 우리는 이들에 대해 결정적으로 놓쳐서는 안될 급성기 질환들을 감별하기 전까진, 절대 함부로 응급실 밖으로 보낼 수가 없다. 그렇기에 이들을 제대로 평가하기 위한 어떠한 강제력도 행사할 수 없기에 주취자와 실랑이를 벌이고 '대부분'의 경우로 이어지는 고성과 폭언, 아주 심하면 의료진을 폭행하는 경우까지 이어지는 참담한 현장을 날마다 마주하고 있다. 어쩔 수 없다.

이들을 그대로 돌려보냈을 때 문제가 생긴다면 그들을 강제하지 않은 대가로 버젓이 의료진의 책임을 되묻고 있는 불편한 법적 판례들 때문이다. 어쩌면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닌 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아닌지 주어가 바뀐 건 아닐까.

이러한 불편한 현실을 어떻게 개선해나가야 할까 고민한 적이 하루 이틀이 아니다. 의료진의 잠깐의 '고생'으로만 끝나면 불행 중 다행이겠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아니다, 왜 우리만 고생해야 하는가!- 음주로 인해 발생하는 질환들로 인해 일개 개인의 비용, 그리고 이들을 위한 사회적 비용 또한 어마어마하게 급증하고 있는 현실에서, 이를 제재하고 계도하기 위한 정책적 소홀함과 느슨한 음주문화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가령 '삼진아웃제'를 도입해 음주로 인해 응급실 내 반복적인 폭언 폭행을 행한 경우에 한해 건강보험 급여를 미적용 시킨다든지, 음주 소비를 강력히 제한하는 제도를 고민해 보았다. 추후 부딪힐 수 있는 법적인 문제를 떠나 이러한 정책에 드라이브를 걸게 된다면 국민에게 '표' 떨어질 고민부터 하게 될 씁쓸한 정치꾼들의 작태를 떠올리노라면 아직 이러한 제도는 내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요원한 제도로 남게 될지 모르겠다.

책임없는 자유를 누리며 술을 마시고 자기 자신뿐 아니라 가족, 타인에게도 피해를 주는 음주문화는 어떻게든 근절시켜야 한다는 것이 내 지론이다. 그들이 처한 현실에 대해, 그들에게 술 권하는 이 사회를 어린 전공의 1년차는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가 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내가 힘들단 말이다! 소설 '술 권하는 사회'에 나오는 아내의 명언이 있다.  오늘도 응급실을 찾는 그들에게 이 대사를 그대로 베껴 되묻는다. 

'술 아니 먹는다고 흉장이 막혀요?! 그 몹쓸 사회가, 왜 술을 권하는고!'

■ 칼럼과 기고는 본지의 편집방침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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