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응급의학과 콩나물 의사가 되어있으리라
멋진 응급의학과 콩나물 의사가 되어있으리라
  • 여한솔 전공의(이대목동병원 응급의학과 전공의 1년) admin@doctorsnews.co.kr
  • 승인 2019.10.13 2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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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한솔 전공의(이대목동병원 응급의학과 전공의 1년)

응급의학과 전공의 1년 차 생활도 벌써 6개월이 넘게 흘렀다. 응급실 근무 첫날 아무것도 할 줄 몰라 땀 뻘뻘 흘리던 때를 돌이켜 보니 따지고 보면 지금도 역시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풋내기에는 분명하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의 여유를 찾은 느낌이다.

그렇다고 힘들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다만 전국 3000여 명의 1년 차 전공의 선생님들이 함께 힘들어할 시기이기에, 그리고 수많은 우리네 선배 의사들이 겪었을 좁은 길이기에 작은 위로가 되긴 한다.

전공의 생활을 끝내기까지, 지금부터 3년 6개월, 1200일이 남았다. 아침을 잘 안 챙겨 먹는 나로선 그동안 먹을 밥을 얼추 계산해보니 2500번이나 먹어야 한다.

무인도에 떨어져 동굴에 하루하루 표류하였던 날짜 수를 새겼던 캐스트 어웨이 톰 행크스처럼  쪽방의 벽에 줄을 그어볼까도 생각했다. 잠자고 일어난 어느 날 1200개의 작대기가 벽에 수북이 그어져 있을 것을 혼자 상상하면서 씁쓸한 웃음이 나도 모르게 나오고 말았다.

누군가가 그랬다. 이 전공의 시절을 어떻게든 버티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고. 4년 차가 되어 전문의 시험을 치고 합격하는 그 순간만을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버틴다. 그래, 생각의 방향을 조금만 바꿔보면 오늘 먹은 밥 2끼로 인해 이제 나는 2498번만 밥 먹으면 이 생활도 끝이 날 수 있다는 것이다!! (슬프다.)

걸어서 10분도 걸리지 않는 집 문을 나서 출근할 때마다 다가올 낮과 밤에 쏟아질 환자들을 생각하면 실신하기 직전처럼 눈앞이 깜깜해지면서 식은땀이 날 것 같아 나도 모르게 하늘을 바라본다. '왜 서울 하늘은 내 앞날처럼 뿌옇기만 할까….' 내 마음처럼 한없이 뿌옇기만 하다.

내가 평생 만나야 할 환자들은 수천 명이 넘겠지만, 몇 개월 안되는 기간에도 수많은 환자를 보았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웃기기도 하고 눈물 나기도 했던 환자들의 이야기는 당분간은 글로 싣지 않기로 했다.

환자들의 이야기 하나하나가 충분히 우리네 삶을 돌이켜보게 하는 글감이 될 수는 있지만, 그 이야기들을 지면을 통해 곧바로 실을 수 없는 이유는 의사윤리라는 측면을 떠나 상대적으로 가까운 시기에 그들의 아픔을 들춰내고 싶진 않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 어떤 사람인지 누구도 기억할 수도 없을 때가 되어서야, 좌충우돌 희로애락이 담긴 작은 책 한 권을 쓰겠다고 다짐하고 일화들을 바탕화면 메모장에 한줄 두 줄씩 적어가고 있다.

우리네의 추억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쌓여 가는 것처럼, 전공의 1년 차의 하루하루 마주하는 환자들과 순간마다 배워가는 술기와 의학적 지식은 그저 스치듯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둘 쌓일 것이라 굳게 다짐한다.

다행히도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의국에 있다고 자부한다. 훌륭한 교수님들은 물론 위 연차 선생님들이 너무도 잘 가르쳐 주고 계셔서 몸은 힘들지만, 마음은 행복한 하루하루를 채워나가고 있다.

모두가 느끼듯 병원 문을 나서 퇴근하는 그 순간처럼 행복하고 여유로운 순간도 드물다. 시끄러운 도로의 자동차 소음을 피하고자 헤드폰에서 흘러나오는 오아시스 노래를 들으며 걷는 5분간의 짧은 출근길에 붉게 노을 진 하늘을 바라보면 씻은 듯이 피로가 가시곤 한다.

지옥과 지옥 사이의 순간에 천국의 여유를 찾는 방법을 인제야 조금씩 찾아가는 것 같다. 애써 즐거운 마음으로 근무해보려 하지만 솔직히 근무가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

하지만 그 와중에도 나는 성장하고 있다 굳게 믿는다. 물을 주면 줄줄 새버리지만, 어느새 자라 있는 멋진 응급의학과 콩나물 의사가 되어있으리라….

내일 출근하는 아침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기만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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